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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1

크게 기대하지 않고 펼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책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독서 모임이든 커뮤니티든 뭔가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하게되는 이런저런 생각들… ‘아 맞아 나도 이런 생각 했었지’하며 웃고 무릎도 치고 그랬다.

다만 챕터 제목이…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제목… 별다른 의미도 없고 내용과의 연관성도 없고 그냥 뭔가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소박하게 힙한 느낌을 만들려는 느낌이… 좀 짜증났다.

인상적이었던 주제들을 챕터 구분과 관계없이 내 맘대로 묶어서 첨언해 보았다.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을 미워하는 것 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를 미워하는 편이 더 낫다는 말에 대해

정말정말 동의한다. 정확히는 동의한다기 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할까? 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에는 사실 실체가 없다. 기껏해야 어떤 불특정 다수가 뭉게뭉게 모여있는 뭉텅이? 같다는 느낌 정도다. 작가가 말하는 ‘인류’라는 말도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작가가 개인과의 관계를 ‘체념’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실제 존재하는 개인을 만날 때는 상대방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특별히 좋은 배려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악의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남 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인생이 재미 없으니 그러는 걸 어쩌겠냐는 느낌… 인생이 재미 없다는 걸 내가 모르는 입장도 아닌데 말이다.

“자기 인생이 재미가 없다고 남을 그렇게 씹고 다니면 안 되지!” 맞는 말이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근데 그 사람이 성숙하겠어? 그런 말을 하는 본인도, 본인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 중에 성숙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물론 어떤 사람의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거나 피해를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고 그래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겠지. 근데 또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이 성숙한 사람의 기준에 못 미친다고 욕을 하는 것 까지도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체념이 하나 더 늘었다.

말하기-듣기의 인간과 읽기-쓰기 인간에 대해

작가는 말하기-듣기 인간과 읽기-쓰기 인간을 구분하고 스스로를 읽고 쓰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말로는 말하기-듣기와 읽기-쓰기가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말하기-듣기가 세상을 점령해 나가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나도 비슷하다.

저널리즘에서도 글로 된 기사가 아니라 카드 뉴스나 동영상 뉴스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욕망을 자극하고 다양한 감정을 건드릴줄 아는 사람이 점점 더 유리해진다. (ex 쓸모없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기업가, 선동과 음모가 필요한 정치인)

‘허세’, ‘씹선비’, ‘진지충’ 같은 단어들이 유행을 타는 것 만으로도 읽기-쓰기 인간의 입지가 얼마나 좁아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요새는 읽기-쓰기의 인간이 스스로를 자조하는데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 기질이 사회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심지어 본인조차 그런 기질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많이 놀렸을 것 — 동족 혐오 —), 남에게 욕 먹기 전에 스스로 욕을 박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읽기-쓰기의 인간은 맘에 드는 인간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꽤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트레바리니 뭐니 하는 서비스들이 흥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 사람 글은 잘 쓰는데 인성은 별로더라”는 말에는 위화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은 그 사람 자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를 판단하려면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는 오랜 미신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말하기-듣기 커뮤니케이션에는 노이즈가 많다. 예를 들어 별 생각 없이 중간에 말을 멈추면 사람이 신중해 보인다. 목소리와 말투, 외모나 차림새 따위가 대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느껴본 적이 있다면 말하기-듣기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판단할 때 가급적 그 사람이 쓴 글로 판단하려고 한다. 그 편이 더 명확하다.

읽기-쓰기가 주는 정보와 노이즈가 있는 것 처럼, 말하기-듣기 역시 어떤 정보를 주고 어떤 노이즈를 준다. 사실 그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말하기-듣기에 대한 신뢰를 비판하는 것 까진 좋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읽기-쓰기에 대한 신뢰로 넘어가버리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작가가 마냥 읽기-쓰기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읽고 쓰면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내 인생의 책> 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고) 이 소설은 글자로 된 야수다. 독자를 찢어발기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는다. 나는 <악령> 이후로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p65

크으으 진짜 좋다. 나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던 책은, 그게 에세이던 소설이던 모두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주지 못했다. 그게 위로던 힐링이던 뭐시깽이던… 오히려 혼란스러운 것, 기분 나쁜 것, 허망한 것을 주었을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문학을 멀리하는 것이 낫다.

‘소설가로서 롤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조지 오웰이라고 답한다. p68

그 전에도 장강명이 조지 오웰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널리스트 경력도 그렇고 (그 경력에서 영향을 받았는지)글의 저널리즘적 성격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의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에세이는 즐겁게 읽었다(리뷰 참고). 장강명의 소설 <표백>은 좋았지만, <한국이 싫어서> 같은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저널리즘의 냄새 때문에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재밌게 잘 읽었다. 확실히 둘에게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책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는 점, 그걸 읽으니까 묘하게 내 친구가 된거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점이 그랬다.

전자책과 종이책의 장단점에 대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 종이책을 선호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공감하지 못한다. 책의 물성이 주는 특별한 감각을 자기는 못 느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책이 주는 다양한 편의기능에도 시큰둥한 모습을 보인다. 본인은 오로지 책의 본질적인 의미인 ‘독서’에만 집중하려고 하는 모습과, 그 ‘독서’를 위한 편리함, 좋은 접근성 등등의 ‘실용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실용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이렇게나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전혀 본질-실용적이지 않다. 책 애호가들이 종이책의 물성에 알수없는 감정이나 묘한 애착을 갖고 종이책을 찬양하듯이, 본인은 본인의 본질에 집중하려는 모습, 잡다한 것을 걷어내려는 드라이하고 미니멀한 안목에 취해있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