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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담배: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의 짧은 산문집. 평소 조지 오웰을 그렇게 좋아하던건 아니어서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짧은 산문집 치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다.

책과 담배

책은 전혀 비싼 취미가 아니고 따라서 당신들이 책을 안 읽는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지 비싸서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내용이다. 주변에서 하도 뭐라하니까 작정하고 계산해서 글로 쓴 듯 ㅋㅋㅋ

요새야 굳이 이렇게 자세히 금액을 계산해서 보여주지 않더라도, 책이 비싼 취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대신 ‘(문학 같은 부류의)책을 왜 읽어?’라고 물으면서 인문학 전반의 효용을 의심하는 질문들은 많았던 것 같다. 솔직히 나에게는 인문학이 그닥 쓸모있지 않았다. 다만 인문학의 효용을 묻는 사람들이 인문학 책을 안 읽는 시간에 얼마나 생산적/효율적인 여가를 보내고 있을지는 뻔하지 않을까…

어느 서평가의 고백

책을 향한 수많은 추천사와 찬사들이 얼마나 기계적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 나는 맘에 안 드는 책을 읽고나면 자주 악평을 늘어놓는데, 그동안 그런 일에서 내심 가지던 양심의 가책을 약간이나마 덜 수 있었다.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

<동물 농장>이나 <1984> 같은 조지 오웰의 소설은 유명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지만, 지적인 자극에는 별로 도움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글의 처음 느낌도 딱 그랬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 글을 쓰던 당시인 20세기 초중반에는 분야를 막론하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공산주의와 공산당이 대세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체주의의 위험이 있었고, 실제로 많은 공산주의 정부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했던 사례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이 이를 고의적으로 축소하거나 모른 척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 전체주의가 정치-시사 분야는 물론 문학을 포함한 전 분야의 예술에 걸쳐 파괴를 일삼고 있고, 작가들은 살기 위해 공산당의 비위를 맞추고 있으며, 이는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을 보자. 지금은 개나소나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말로 ‘파시스트’를 사용할 정도로 전체주의는 전 세계의 적이다(오히려 아무데나 파시스트를 가져다 붙이는걸 조심해야 할 정도). 그런데 이제와 굳이 모두가 동의하는 전체주의 비판을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지금도 전체주의적인 움직임은 (결코 예전 만큼일 수는 없겠지만)크고 작게 곳곳에서 눈에 띄지만, 동시에 모두가 알아서 (자기 말고 남의 마음속에 있는)전체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즉 현대에 와서는 조지 오웰의 생각 == 모두의 생각이기 때문에 이런 류의 이야기가 지적인 자극을 주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어떻게든 시의성 있는 주제와 연결해 보자면 이런건 어떨까 싶다. 요즘에는 많은 분야에서(젠더, 성소수자 등) ’윤리적인 것’을 많이 강조한다. 윤리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죄악시 되고(윤리적이지 않은 것을 죄악으로 취급한다는 말은 동어 반복인가? ㅋㅋㅋ), 그에 따라 예술을 포함한 여러 컨텐츠들도 대중에게 엄격하게 검열 받고 있다. 이런 것도 전체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일견 그런 면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치자면 세상의 어떤 정치 운동이 “너희 OO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이야!”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다. 모든 사회 운동은 자기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며 정치 세력을 모아 권력을 얻기 위해 노력할텐데 말이다. 머리 아픈 일이다.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책

요즘 같은 포스트 모던 시대에는 절대 할 수 없는 ‘작품의 수준’ 같은 말을 거침없이 해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만약 요즘에 어떤 영화 비평가가 ‘영화 OOO은 수준이 낮은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어떤 말을 듣게 될까?

  • 수준이라니, 내가 좋으면 좋은거 아닌가요?
  • 작품의 수준 운운하는거 보니 참 수준 낮은 분이시네요.
  • 평론가라는 사람이 이런 발언을 하다니, 직함 반납하셔야 할 듯.

이상한 것은 ‘작품 OO이 수준이 높다’는 평가는 얼마든지 해도 되지만 ‘수준이 낮다’는 평가는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수준이 낮다’는 평가에 달리는 비판들은 ‘수준 운운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이상하게 ‘수준이 높다’는 평가에는 이런 비판 전혀 달리지 않는다. 왤까? 사실 모두가 작품 마다의 수준 차이가 존재한다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가 작품을 평가하는 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수준을 결정하는 각자의 기준이 다르다고 해서 수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작품이 별로라고 했다면, ‘수준 운운하지 말라’고 하기 보다는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수준 높고 가치 있는 작품이다’라고 말하는 쪽이 좀 더 적절한 비판이지 않을까?

그런데 그러기엔 생각보다 좋은건 왜 좋은지, 싫은건 왜 싫은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자세히 말해달라고 할 수록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어진다. 그러다 보니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화자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OO의 수준이 어쩌구 저쩌구’하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이유는 보통, 비판 자체 보다는 사람이 오만하다고 욕을 먹게 된다. 물론 오만한 사람을 욕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 오만한 사람은 최소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자꾸만 개인의 윤리 문제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게 ‘작품을 즐기는 올바른 태도’라고 믿는다. 자기가 하는 말은 실상 그 작품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말이다.

그에 반해 자기 느낌이나 생각을 꽤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중의 어떤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저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었을 뿐인 이야기는 이런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그러다보면 어느정도 권위도 가지게 된다. 즉, 작품에 대한 어떤 설명이 그 작품이 왜 좋은지 혹은 왜 안 좋은지 잘 설명해줄 수 있다면, 그 설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럿 모이거나 또는 비슷한 설명들이 모여 어느정도 작품의 수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래봤자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권위에는 반감을 드러낸다. 아니 정확히는 권위가 내 편이면 딸딸이의 도구가 되고 내 편이 아닌 권위는 꼰대새끼가 되는 것이다.

책방의 추억

나는 책방을 운영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니, 장사 자체에 대한 욕망이 없다고 하는게 더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일단 이 글에서 말하는 것 처럼 온갖 같잖은 사람들을 일일히 상대하기 싫다. 그리고 한 장소에 내 모든 재산과 생활이 묶여 있어야 하는 것이 싫다(비슷한 맥락으로 집도 매매 보다는 임차를 선호한다).

물론 ‘공간을 구성해서’ 장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은 나에게도 있다. 그 욕망은 아마 내가 편집한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대중에게 전시하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무언가를 전시하려는 순간 보통은 위와 같은 문제가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장사를 한다면 남은 이유는 뭘까? 돈 때문일까? 그럴 수도… 그럼 이제 나는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장사를 하고 싶다고 말할 수는 없게된다.

나는 왜 쓰는가

  1.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다, 관심 받고 싶다, 사후에도 기억되고 싶다 등등. 모든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
  2. 미학적 열정. 단어와 단어, 이야기의 리듬, 견고한 산문 등이 주는 느낌.
  3. 역사적 충동. 경험한 것을 보존하고 싶은 욕망.
  4. (넓은 의미의)정치적 목적.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가려는 욕망.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예술은 없다.

나도 주로 1번 동기로 글을 쓴다. 이를 좀 더 내 표현으로 바꿔 보자면, 스스로의 보잘 것 없음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

요즘에는 잘 안하지만 갓 취직했을 때 자주하던 생각이 있었다. ‘주말이 아니라 주중에 행복해야 한다’ 혹은 ‘여행이 아니라 평소에 행복해야 한다’ 같은 생각이었다. 삶의 아주 짧은 부분만을 차지하는 ‘주말’이나 ‘여행’ 같은 이벤트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 만큼 바보같은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그 생각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있다. 정확히는 ‘주중과 평소에 행복하겠다’는 목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할까? 왜냐하면 언제나 권태는 ‘매일’에, 행복은 ‘가끔’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바랬지만, ‘무엇을 위한 자유’를 생각하지 못해왔다. 이 글이 말하는 것 처럼, 유토피아(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할 이상적인 무언가)를 그리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니체는 주인의 도덕을 강조하며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초인이라는 놈들이 창조한다는건 도대체 뭐란 말일까? 내가 실존주의로부터 배운 것은 공허를 극복하는 법이 아니라(어떤 실존주의 작가도 그럴듯한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눈 앞에 점점 선명해지는 공허와, 그 공허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 뿐이었다.

계급이건 젠더건 아니면 그저 개인이건… 그게 뭐든 어쨌거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성장하는 나’ 같은 영웅 서사가 세계 어디의 어느 시대에서나 항상 인기를 얻는 것과 같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이 좋아진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고, 미래에도 부족할 것이고, 따라서 부족을 채우려는 노력은 계속해서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투쟁은 계속될 것인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투쟁은 계속 되어야 한다.’ 행복의 열쇠는 좋은 세상이 아니라 투쟁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유토피아)는 가짜고 고통은 진짜다. 모두가 유토피아가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실제로 사실이기는 하다) 사실 모두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비극이고 해결할 문제들이다. 실은 모두가 마조히스트인 셈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죽는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채로 물건같은 취급을 받으며 죽어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좁은 병실에 쑤셔 넣어 사람들 눈 앞에서 치워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이 시대에서도 이런 병원은 최악의 케이스였다고 하고,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도 이런 일을 겪을 확률이 많이 낮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거지같은 병실에서 추하게 죽지 않더라도, 깨끗한 침대에서 가족과 함께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죽음과 마주하는 것은 결국 혼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