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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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2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1
크게 기대하지 않고 펼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책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독서 모임이든 커뮤니티든 뭔가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하게되는 이런저런 생각들… ‘아 맞아 나도 이런 생각 했었지’하며 웃고 무릎도 치고 그랬다. 다만 챕터 제목이…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제목… 별다른 의미도 없고 내용과의 연관성도 없고 그냥 뭔가

에서 이어짐

문화 비평의 죽음에 대해

작가는 영화, 대중음악, 미술, 문학을 걸쳐 대부분의 문화 비평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고 말한다. 작품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거 진짜 재미 없음. 완전 구림’이라는 한 줄짜리 감상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중략) 하지만 ‘완전 구림’이라는 한 줄 감상은 절대로 비평은 아니다. 거기에는 작품을 읽어내겠다는 의지가 없다. ‘눈물 나도록 좋아요’, ‘누구누구는 너무 낡았다’ 같은 것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평이 아니라 소비자 반응에 가깝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라는 질문을 던질 수는 있겠지만 “몰라요, 그냥요”라고 대답하면 거기서 끝이다. (중략) 나는 자세한 해설을 원한다. 읽고 쓰는 사람들 간의, 글자를 통한 대화를 원한다. 악평도 좋다.

문화 컨텐츠를 소비하고 나서 친한 사람들과 가벼운 감상을 나누는 것은 정말 즐겁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정리되거나 배설되지 못한 말들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내가 그 장면에서 왜 거부감을 느꼈는지, 갑자기 거기서 왜 온몸에 전율이 돋는걸 느꼈는지, 이 작품이 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허접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자세히 알길 원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마음도 자세히 알기를 원한다.

물론 내 감정에 대한 정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리된 내 생각을 공유하는 것, 그러면서 남의 정리된 생각을 들을 기회를 얻기란 매우 어렵다. 한두번의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정도의 질문으로는 피상적인 대답이나 겨우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꼬리를 무는 질문을 반복했다간 상대방은 공격받는다는 느낌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아마 생각해본적이 없었거나, 당장 생각해본다고 해서 흩어진 감정과 생각의 편린들이 잘 정리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어버버하는 자기 모습이 창피할 수도 있고, 자기를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는 상대방이 짜증날수도 있다. 나도 예전에는 여러 대화를 시도하고는 했지만, 비슷한 경험을 몇번 겪고 나서는 상대방이 먼저 묻기 전에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쓸데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거슬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굳이 얻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좋은 비평을 쓴다는 것은 컨텐츠를 진지하게 소비했다는 뜻이고, 많은 에너지를 들여 자기 감정과 생각을 정리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 일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심신도 상당히 지치는 일이니 별로 하고싶지 않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 오히려, 진지한 비평을 남겨주는 사람에게는 그게 설사 악평이라고 할지라도 고마운 감정을 느끼게 될 것 같다.

독서 팟캐스트의 역할에 대해

독서 팟캐스트는 무엇일까? 긴 글 읽기를 버거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요약 서비스인가? (중략) 교양 있는 사람들의 점잖은 토크쇼일까, 책은 그저 거들 뿐인? (중략) 신간을 알려서 구매로 이어지게 하는 홍보용 매체일까?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는 듣기 전이든 후든 청취자가 책을 읽을 것을 전제로 하는가, 아니면 읽지 않아도 괜찮은가? (중략) (팟캐스트에서 나누는)이 대화가 그 자체로 완결된다면 왜 굳이 책이 필요한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면 많은 청취자들이 방송에서 소개하는 책을 읽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의미를 묻고 따지는 것은 나의 고약한 버릇이고, 읽고 쓰는 세계 거주자들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은 힘이고 은총이며 고통이자 저주다.

작가는 독서 팟캐스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독서 모임에 (길게 혹은 짧게)참가해 보기도 했고 운영해 보려고 했던 적도 있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많이 됐다. ‘이거(독서 모임) 왜 하는거지? 여기서 나 혹은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게 뭐지?’ 같은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사람이 모이고 나면 읽기-쓰기 인간이 하는 이런식의 고민은 대체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목표를 정하고 그에 충실하게 매 모임을 구성하는 생산적인 활동은 절박한 사람들이 하는 스터디이지 취미 모임이 아니다.

내가 운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독서 모임은 결국 커뮤니티를 만드는데 초점을 맞췄다. 책은 그저 커뮤니티의 소재가 될 뿐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심지어 이런 못 박기도 소용없게 된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깊게 파길 원하는 때도 있고, 시의성 있는 주제 여러개를 빠르게 훑고 지나가길 원할 수도 있다. 결국 지치지 않고 모임을 유지하려면, 무형식-무일관성이 될 수 밖에 없다는게 내 결론이다. 일하고 있으면 쉬고 싶고, 쉬고 있으면 일하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 아마 앞으로도, 어떤 원칙에 의해 모임을 운영하겠다는 당찬 포부(?)는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 같다. 의미를 좇으려고 하는 읽고-쓰는 인간으로서 쉽지 않겠지만…

고전이 주는 교훈에 대해

고전은 독자에게 얌전하게 교훈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들은 독자들이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비를 건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맞혀보라고 묻는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오이디푸스는 뭘 잘못한 걸까? 햄릿은 미친 걸까? 덴비는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평했다.
그 책들은 그런 야수성 때문에 고전이 되었다. 동시에 당대에는 격렬한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고 불태워지거나 고발당하거나 판매 금지되었다. 악평을 받는 작품이 모두 길이 남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는 소설은 절대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쓸데없는 야수성 찬양이 거슬린다. 자지 작은 남자가 열등감 때문에 몸을 엄청나게 키우고 싶어하는 느낌… 하지만 동감하는 부분은 많다. 사람들 중에는 책을 많이 읽으면,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을 읽으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거나, 혹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꽤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때의 ‘나은 사람’이라는 말은 대개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경험상 외려 반대의 효과가 더 크게 나는 것 같다. 성공에 가까이 가기 보다 성공을 회의하게 된다. 착한 사람이 되기 보다 구성된 윤리를 의심하게 된다. 삶을 긍정하고 행복을 좇기 보다 세계에 던져진 개인의 비참함에 주목하게 된다.

현대의 윤리 기준으로 보면 잔뜩 욕을 먹어도 싼 고전은 발애 채인다. 단순히 고전이 과거의 작품이기 때문에, 시대 차이가 만드는 다른 윤리 기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예 핵심적인 메세지나 지향하는 바, 그래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현대의 취향이나 관점과는 잘 맞지 않거나 심지어는 정면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책을 많이 읽고도 가치관에 충격을 받지 않고 넘길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더 나쁜 점은 사람을 이따구로 흔들어 놓고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고전 같은건 안 읽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대중 교양서가 말하는 행복에 대해

성공, 독설, 치유, 자존감 등의 키워드가 지나고 이제 사람들은 보다 근본적인 걸 궁금해 한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지?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하던데, 행복이 뭐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지?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략) 그러나 이런 결론은 어딘가 모자라다. 사랑하는 이와의 식사는 물론 좋지만,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바를 그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최인철 교수는 행복은 ‘좋은 삶’의 한 구성 요소이며, 행복 외에도 의미, 품격 같은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행복’이라는 말에서 ‘좋은 삶’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게 뭐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김정운 작가는 여수의 한 섬으로 내려가 화실과 서재를 짓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지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라고 적는다. (중략) “아침에 샤워할 때 나오면 너무 행복해요, 특히 겨울에 추울 때 뜨거운 물이 팍, 나오면,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이게 사는 거지 싶죠.”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식사나 수압이 쎈 뜨거운 물줄기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을 희생시켜가면서 구하려는게 있다. 그걸 품위라고 부르기는 어렵고, 의미?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물리학자의 우주적 진리도 아니고,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삶의 중심도 아니다.

사실 이 챕터에 별달리 덧붙일 말은 없다. 그냥 비슷한 생각을 하던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꼈던 부분들을 옮겨봤다. 다만 개인적으로 김정운을 싫어하는데 역시나 여기서 인용된 대사만 들어도 존나 꼴보기 싫다. 으 쿨한척 하는 나르시스트 아재 냄새 그건 그렇고 자존감 다음으로 요즘에 유행하는 건 뭐지? 퇴사? 우울증? 내면의 평화?

현실과 멀어지는 문학에 대해

내게 진짜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은 사람들이 문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나는 2000년대 2010년대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비정규직으로 인한 노동시장 이원화라고 생각한다. (중략) 하지만 2010년대 중반까지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다른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미생>, <송곳> 같은 웹툰이 떠오른다.
선물 시장이나 투자은행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문인이 몇 명이나 될까? 금융시장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현대자본주의의 탐욕을 지적할 때 그 목소리에 과연 얼마나 힘이 실릴까?

문학은 인간과 골목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선물 시장이나 투자은행을 몰라도 볼 수 있고 비출 수 있는 인간과 골목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빠른 속도로 복잡해진다. 복잡한 사람들의 생각, 골목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연하게도 제대로 비추는 거울을 만들 수 없다. 편미분하고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보이는 부분을 본거고, 필요한 부분을 취한 거지만, 거울에 비추는 모습은 납작한 생각, 납작한 풍경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