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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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절하기

인간관계 회의론과 함께 손절이 유행한지도 벌써 꽤 오래 됐다.

  • 대학교 친구들 다 부질없다. 비즈니스 관계로 선 그어야 할 듯.
  • 10년지기 친구가 저를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연락 끊어야 할까요?
  •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친한척 오지네 그래봤자 필요할 때나 찾지 중요한 일 생기면 쌩깔 사이 아니냐?

ㅋㅋㅋ 기타 등등… 소재에 약간의 변주만 들어갈 뿐 핵심은 다들 대동소이하다. '친구 손절' 같은 키워드로 검색만 해봐도 비슷한 이야기는 엄청 많이 나온다.

20년 지기 친구와 손절했습니다. | 고민상담 | 루리웹
거의 20년 이상 알고 지내온 친구 손절했습니다. 제가 느낀 어긋남이란게 , 관계가 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크게 보면 2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하나는 전형적인 답정너식 대화를 좋아하는 친구로써, “제가 이런 상처를 받았는데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견뎌야 하는 걸까요?” 같은 질문 아닌 질문을 날리는 유형이다. (물론 어김없이 댓글에는 “님을 낳아준 부모라고 해서 님의 자존감을 깎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손절하세요” 따위가 달림) 물론 답정너 대화법은 언제나 별로지만 그래도 스스로 상처 받았다는 것을 솔직하게 공개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또 다른 하나의 유형, 온갖 쿨내를 풍기면서 나는 너를 손절함으로써 남의 눈치를 안 보고 마이웨이를 가고 있다는 것을 티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유형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인간관계 전반(가족,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등)을 회의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래서 본인을 향한 아주 작은 무례함도 견디질 못하는데, 그래서 오히려 누군가 자기에게 무례하게 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호시탐탐 쿨하게 손절을 날릴 기회만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대개 Fragile하고, 그걸 감추기 위한 '분노’라는 자기 방어로 똘똘 뭉쳐있다.

직면한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 중 어떤 방식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아마 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고 싶어할 것이다. 만약에 누가 나를 업신여기거나 인간적으로 대우해주지 않을 때의 근본적인 해결은 어떤 것일까? 물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고 지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100% 맞는 말이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건 아마 그런게 아닐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호구잡을 수도 있지만 도덕적 판단 때문에 그러지 않기를 원하는게 아니라, 애초에 나를 호구잡을 생각도 못(안)하기를 원한다. 그게 나에게 가장 좋은 상황인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나를 좋아하거나 두려워해야 하는데, 당연하게도 둘 다 쉽지 않다. 이 때 나는 차선책으로 손절을 선택할 수 있다. 당장 나를 좋아하게 만들거나 두려워하게 만들 수 없는 사람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손절을 제외하면 딱히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겠지만(일단 급한 문제는 해결됨), 내가 정말로 원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실행하지는 못한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손절’을 선택했다는 것은, 스스로 베스트 케이스를 만들 역량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차선을 선택했다는 뜻이고, 또 자기 마음이 약해서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못된 말들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는 뜻이 된다. 물론 역량이 부족한 것이나 마음이 약한 것은 전혀 죄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방법이 어떤 멋진 것, 나의 뚝심을 보여주는 것, 내가 얼마나 결정력/실행력이 높은 사람이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도 역시 아니다. 박근혜가 큰 사고가 터졌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엉뚱하게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선언하던 모습을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을까? 문제를 다 부숴서 없던일로 돌리는 것은 언제나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최후의 보루다. 그렇게 자랑스러울 일 까지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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