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통과 무의미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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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통과 무의미의 관계

코로나니 경제 위기니 아무튼 살기가 팍팍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점점 시니컬해져가는 와중에 “삶은 무의미한 고통의 연속이다” 같은 프레이즈는 어느새 클리셰처럼 우리 삶에 자리잡게 되었다. 금방 유행이 지나긴 했지만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은 얼마 전 까지도 인기였다. 그의 말은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삶은 고통이고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너무 동의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떡하라고? "좋은 사람이 되어라. 세상의 고통을 줄여라.” 역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근데 한 발 물러서서 보면, 과연 저 사람이 학생들과 청중들 앞에 서서 저런 이야기를 할 때 무슨 기분이었을까? 아마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은 나에게 좆도 관심없고 공정하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개인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세계와 그 세계가 강제하는 운명처럼 절망적인 비극이 또 있을까? 운명은 무자비하고 인간은 너무나 무력하다. 그러나 패배를 알면서도 싸움에 임하는 모습은 얼마나 성스러운가? 집채만한 해일을 앞에 두고도 도망치지 않고 서있는 인간이 짓는 미소는 얼마나 영웅적인가? 피터슨의 “That’s Hard!”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어렵다는게 중요하다. 어려운 문제를 피하지 않는 사람은 멋지다. 그래서 자꾸만 “삶은 고통이다”를 강조하는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삶의 고통을 줄이자고 말하는 그는, 실은 바로 그 삶의 고통과 비극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저 영상에서도 계속 묻고, 우리도 궁금한 그 질문, “삶은 의미 있을까?”에 답해보자. 당연히 답은 “없음”이다. 삶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공허는 고통스럽다. “나는 좆밥이다. 내 인생은 무의미하다. 나 같은 것은 모두의 안중에도 없다. 내 삶은 우주에서 작은 먼지보다 더 하찮다.” 이런 말을 스스로 되뇌일 때 우리는 얼마나 공허하고 또 고통스러운가?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무의미’를 받아들어야 할까? 당연히 답은 “그렇다”이다. 아니, 안 받아들이면 어쩔건데? 눈 앞에 뻔히 놓여있는 문제에서 눈을 돌리겠다고?

‘무의미’는 곧 ‘서사 없음’이다. 무의미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삶의 서사를 삭제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하찮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에는 우리 삶의 모든것, 즉, 가족, 애인, 일, 사랑, 열정, 꿈, 가치 등이 포함된다. 누가 그걸 전부 부정할 수 있을까? 너무나 고통스럽고 불가능할 것만 같다. 아니 실제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서사를 버리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니체의 초인이나 까뮈의 반항인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닌데? 나는(혹은 내가 아는 누구는) 진짜로 그 무의미를 받아들였는데?” 아니다. 서사를 삭제해 ‘무의미’를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은, 사실 ‘무의미를 받아들이는 것’ 혹은 ‘무의미한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을 자기 삶의 서사로 선택한 것이다. 마치 “삶은 고통이다”를 역설하는 조던 피터슨 처럼 말이다. 이럴수가! 세상의 둘도 없는 진리를 요리해서 자기 서사로 구성하다니! 교묘하기 짝이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둬 봐라, 책 없이. 그러면 우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합류해야 할지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아버지들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한 취향을 발전시키고 있다. 곧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사실 그 순간 나는 ‘인간은 관념으로부터 태어나는 사산아’라는 깨달음을 내 삶의 서사의 일부로 집어 넣은 셈이 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책(서사)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을 조롱했지만, 실은 <지하로부터의 수기> 자체가 서사인 것이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는 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럽고 희망 없는 하루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슈호프를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독자로서, 그런 담담한 받아들임도 하나의 서사로서 다가올 뿐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런 자기 지배, 이런 견고성, 믿음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인 이런 안심입명 따위는 대게 거의 동화와 종이 한 장의 간격을 두고 경계선을 접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동화나 다름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서, 그런 전체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곧 무다. 이 자기는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자신의 자기로, 발전시키고 자기 자신으로 있는 그 사실에 절망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향락하려고 하고, 또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명장으로서의 소질과, 시인으로서의 소질을 명예로 삼으려고 한다.

윽... 그렇다. 인간은 모두 시인이다. 뛰어난 시인과 그렇지 않은 시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무의미와 마주한다는 것은 곧 무의미를 도피하겠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말이 된다. 인간은 무의미를,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 어떡하냐고? 뭘 어떡해... 그저 평생을 같잖은 시만 쓰다가 가는 것이다. 지금 이 글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