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락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개념의 기원과 구조]] > - [[#용어의 의미]] > - [[#염려의 세 번째 계기]] > - [[#신학적 배경]] > 3. [[#퇴락의 운동 구조]] > - [[#유혹(Versuchung)]] > - [[#안심(Beruhigung)]] > - [[#소외(Entfremdung)]] > - [[#자기얽힘(Sichverfangen)]] > 4. [[#퇴락의 세 양상]] > - [[#잡담(Gerede)]] > - [[#호기심(Neugier)]] > - [[#애매함(Zweideutigkeit)]] > 5. [[#시간성과의 관계]] > - [[#현재화(Gegenwärtigen)]] > - [[#빠져있음과 몰입]] > 6. [[#존재론적 지위]] > - [[#실존범주로서의 퇴락]] > - [[#가치 판단의 문제]] > - [[#드레이퍼스의 흡수/도피 구분]] > 7. [[#현대적 적용]] > - [[#디지털 시대의 퇴락]] > - [[#주의경제와 산만함]] > - [[#알고리즘화된 현재화]] > 8. [[#비판적 검토]] > 9. [[#관찰자의 기록]] > 10. [[#같이 읽기]] ## 개요 **퇴락**(Verfallen, falling)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현존재]]의 존재 구조인 [[염려]](Sorge)의 세 번째 계기로 제시한 개념이다. 영어로는 'falling', 'fallenness'로 번역되며, 한국어로는 '퇴락', '빠져있음', '타락', '전락'으로 옮겨진다. 퇴락은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 "곁에" 빠져 있는 것, [[세인]](Das Man)의 공공성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현존재]]는 우선 대개 세계 '곁에' 있으며... 이 '곁에-있음'은 대개 [[세인]]의 공공성 속에서 상실되어-있음의 성격을 갖는다." 케임브리지 하이데거 사전에 따르면, 퇴락은 [[염려]]의 세 가지 구조적 특징 중 하나로서, 사실성(Faktizität), 실존성(Existenzialität)과 함께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한다. 퇴락은 [[현존재]]가 배려(Besorgen)의 세계와 [[세인]]의 공적 해석 속에 흡수되어 있음을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퇴락이 도덕적 타락이나 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명시적으로 강조한다: "이 표현은 어떠한 부정적 평가도 담고 있지 않다." 퇴락은 [[현존재]]의 "존재론적-실존론적 구조"이다. 그러나 텍스트의 실제 어조는 이 공식 입장과 긴장을 일으키며, 이 점은 해석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논쟁된다. ## 개념의 기원과 구조 ### 용어의 의미 독일어 'Verfallen'은 동사로서 "떨어지다", "빠지다", "탐닉하다", "쇠퇴하다"를 의미한다. 'verfallen in'은 "~에 빠지다"(어떤 상태나 습관에), 'verfallen sein'은 "~에 탐닉되어 있다"를 뜻한다. [[하이데거]]는 이 일상어를 철학적 개념으로 전용했다. 영어 번역 'falling'은 원어의 방향성—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퇴락은 공간적 하강이 아니다.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서 벗어나 일상적 세계에 빠져드는 "운동"(Bewegtheit)이다. 이 운동은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이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퇴락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세계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것은 [[현존재]]가 본래 세계 바깥에 있다가 나중에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존재]]는 항상 이미 [[세계-내-존재]]이다. 퇴락은 [[세계-내-존재]]의 특정한 양태이다. ### 염려의 세 번째 계기 [[염려]]의 공식 정의—"자기를-앞질러-이미-세계-내에-있으면서-세계 내부적 존재자-곁에-있음"—에서 퇴락은 마지막 부분, "세계 내부적 존재자-곁에-있음"(Sein-bei innerweltlich begegnendem Seienden)에 해당한다. | [[염려]]의 계기 | 공식 표현 | 대응 개념 | |------------|---------|---------| | 실존성(Existenzialität) | 자기를-앞질러-있음 | 기투, 도래 | | 사실성(Faktizität) | 이미-세계-내에-있음 | 피투성, 기재 | | **퇴락(Verfallen)** | **곁에-있음** | **배려, 현재** | 퇴락은 [[현존재]]가 도구, 사물, 타인 등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있지 않고, 배려의 대상들에 몰두한다. 이 몰두가 퇴락이다. ### 신학적 배경 퇴락 개념의 배경에는 기독교 신학, 특히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하이데거]]의 1921/22년 강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학적 해석》에서 '루이난츠'(Ruinanz, 파멸)라는 개념이 등장하며, 이것이 퇴락의 선구적 형태이다. 크리스티앙 좀머의 연구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루터의 죄(Sünde) 개념을 세속화하여 퇴락으로 재해석했다. 루터에게 인간은 원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세상에 빠져 있다. [[하이데거]]는 이 구조를 존재론화한다: 신학적 죄가 존재론적 퇴락이 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퇴락을 신학적 범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퇴락은 타락한 상태가 아니라 [[현존재]]의 본질적 구조이다. 연구에 따르면, "[[하이데거]]에게 퇴락의 이전 루터적 구별—'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은 원초적 기독교가 스콜라철학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용에 영향받은 '존재신학'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또한 [[하이데거]]의 1921년 강의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쿠라'(cura, 염려) 개념과 유혹(tentatio)의 세 형태가 분석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몰레스티아(사실성)를 쿠라레(사실적 삶의 근본 성격)와 유혹의 세 형태(퇴락의 가능성들)의 복합적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해석한다." ## 퇴락의 운동 구조 퇴락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운동"(Bewegtheit)이다. [[하이데거]]는 이 운동의 네 가지 특징을 분석한다. ### 유혹(Versuchung) 퇴락은 "유혹하는"(versucherisch) 성격을 갖는다. [[세인]]의 공공성은 [[현존재]]를 유혹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게 만든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퇴락은 유혹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재]]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책임을 포기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혹에서 [[현존재]]는 결정의 부담을 [[세인]]에게 넘긴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 이것은 삶을 "쉽게" 만든다. [[세인]]이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해놓았기 때문에 [[현존재]]는 스스로 결정할 필요가 없다. ### 안심(Beruhigung) 퇴락은 "안심시키는"(beruhigend) 성격을 갖는다. [[세인]] 속에서 [[현존재]]는 "완전하고 진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가정 속에 안심한다. 연구에 따르면, "퇴락적 [[세계-내-존재]]는 또한 진정시키는(tranquillizing) 것이다... [[하이데거]]는 '진정시킴'을 [[현존재]]의 가정으로 표현한다." 안심의 역설은 이것이다: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서 멀어질수록 더 안심한다. 본래적 실존의 [[불안]]을 회피하고, [[세인]]의 안정 속에 머문다. 잡담, 호기심, 애매함이 "모든 존재 가능성이 안전하고, 진정하며, 충만하다"는 보장을 제공한다. ### 소외(Entfremdung) 퇴락은 "소외시키는"(entfremdend) 성격을 갖는다. 유혹과 안심의 결과로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유혹하고 안심시키는 퇴락은 동시에 소외시킨다." 이 소외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특히 죽음-을-향한-존재로부터 닫혀 버린다. [[본래성]]이 차단된다. 연구에 따르면, "퇴락의 '유혹하고 안심시키는' 것은 또한 소외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존재]]의 [[본래성]]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 자기얽힘(Sichverfangen) 퇴락은 "자기얽히는"(sichverfangend) 성격을 갖는다. [[현존재]]는 퇴락의 운동에 얽혀들어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연구에 따르면, "퇴락의 운동은 또한 자기얽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이미 [[현존재]]를 '비본래성—그 자신의 존재 가능한 방식—으로'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자기얽힘은 퇴락이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당김"(pull)임을 보여준다. [[현존재]]는 한 번 빠지면 계속 빠져든다. 테일러 카만의 표현을 빌리면, 퇴락은 "단지 이해가능성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역동적 경향, 본래적 실존으로부터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힘"이다. ## 퇴락의 세 양상 퇴락은 세 가지 비본래적 실존 양식으로 구체화된다. 이 양식들은 [[세인]]의 개시성(Erschlossenheit)을 구성한다. ### 잡담(Gerede) '잡담'(Gerede, idle talk)은 [[담화]](Rede)의 퇴락적 양태이다. 케임브리지 하이데거 사전에 따르면, "'잡담'은 [[담화]]의 퇴락적이고 비본래적인 형태를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담화]]를 '이해가능성의 분절'로, '[[세계-내-존재]]의 유의미한 구조화'로 정의한다." 잡담의 특징은 "근거 없음"(Bodenlosigkeit)이다. 말해진 것이 사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을 다시 전하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잡담은 담론과 달리 소문과 전달로 구성된다. [[하이데거]]는 잡담이 반드시 기만적이지는 않지만, 근거 없이 전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잡담에서 물음이 차단된다. "왜?"라는 질문은 불필요해진다. 모든 것이 이미 "알려진"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잡담은 "담론이 [[세계-내-존재]]를 열어두는 방식인 반면, 전자는 논의되는 것의 토대로 결코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닫아버린다." ### 호기심(Neugier) '호기심'(Neugier, curiosity)은 시각(Sicht)의 퇴락적 양태이다. 케임브리지 하이데거 사전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의 시각은 일상적 퇴락에서 존재자가 [[세인]]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지배한다. 호기심은 잡담, 애매함과 함께 일상적 퇴락의 세 가지 주요 특징 중 하나이다." 호기심의 특징은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 위해 본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호기심은 사물과의 피상적 관여이며, '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보기 위해서만 보려고 하는' 존재 방식이다." 호기심의 두 가지 특징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Aufenthaltslosigkeit)과 "산만함"(Zerstreuung)이다. 호기심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끊임없이 다음 것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산만함이다. ### 애매함(Zweideutigkeit) '애매함'(Zweideutigkeit, ambiguity)은 잡담과 호기심의 결과이다. 모든 것이 알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무엇이 진정으로 이해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연구에 따르면, "[[현존재]]의 일상적 서로-함께-있음에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이는 저렇게 말하는' 상황이 발생하며, 무엇이 무엇이 아닌지를 밝히기 어렵게 된다. 이 상황이 [[하이데거]]가 '애매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애매함에서 진정한 이해와 피상적 앎의 구별이 사라진다. "사람들이 추측하고 감지하는 것을 다른 이가 '진정으로' 수행할 때, 그것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된다." ## 시간성과의 관계 ### 현재화(Gegenwärtigen) 퇴락은 [[시간성]]의 현재 차원에 대응한다. [[염려]]의 세 계기가 [[시간성]]의 세 탈자태와 대응하듯이, 퇴락은 "현재화"(Gegenwärtigen, making-present)에 대응한다. 연구에 따르면, "[[염려]] 구조의 각 계기는 시간적 계기로 분해된다: 실존성('자기를 앞질러')은 도래적이고(coming towards); 사실성('이미 안에 있음')은 '과거'(having been); 퇴락('곁에 있음')은 현재에 대응한다(making present)." 현재화는 비본래적 현재이다. 결단성의 "순간"(Augenblick)과 대비된다. 연구에 따르면, "현재화는 비결단적이고 순간의 성격을 갖지 않는 비본래적 종류의 현재이다. 현재화는 퇴락의 시간적 해석에서 해명될 수 있으며, 그러한 퇴락은 현재화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 빠져있음과 몰입 퇴락에서 [[현존재]]는 "현재에 빠져있다"(lost in present). 과거와 미래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눈앞의 일에 몰두한다. 이것이 비본래적 시간 경험이다. 그러나 몰입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하이데거]]의 퇴락을 "숙련된 대처"(skillful coping)로 해석했다. 숙련된 장인이 도구를 사용할 때 도구는 투명해진다—이것이 건강한 몰입이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현존재]]는 세계에 '흡수'(absorbed)되어 있다. 숙련된 장인이 도구를 사용할 때 도구는 의식에서 사라진다." 문제는 이 흡수가 자기 망각으로 이어질 때이다. ## 존재론적 지위 ### 실존범주로서의 퇴락 [[하이데거]]는 퇴락이 [[현존재]]의 "존재론적-실존론적 구조"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퇴락이 모든 [[현존재]]에게 필연적임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항상 이미 퇴락해 있다. 연구에 따르면, "[[세계-내-존재]]는 항상 퇴락해 있다. 실로 [[하이데거]]는 퇴락을 [[현존재]]의 본질적 구조로 제시한다: '퇴락은 [[현존재]] 자체의 명확한 실존론적 특성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퇴락이 극복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에 속한다는 것이다. 본래적 [[현존재]]도 [[세계-내-존재]]이고 타인과 함께 있다. [[본래성]]은 퇴락의 "변양"(Modifikation)이지 퇴락의 극복이 아니다. ### 가치 판단의 문제 [[하이데거]]는 퇴락에 대한 가치 판단을 부정한다. "이 용어는 어떠한 부정적 평가도 표현하지 않으며, [[현존재]]가 우선 대개 배려의 '세계' 곁에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많은 해석자들이 지적하듯, 텍스트의 실제 어조는 이 공식 입장과 긴장을 일으킨다. "퇴락", "상실", "소외" 같은 용어들은 부정적 함의를 갖는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도 이 점을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퇴락을 '나쁘고 개탄할 만한 존재적 속성'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고 항의한다. 대신 그는 퇴락이 '존재론적-실존론적 구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본래성을 향한 부정적 뉘앙스는 텍스트 전반에서 관찰된다. ### 드레이퍼스의 흡수/도피 구분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이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흡수"(absorption)와 "도피"(fleeing)를 구분했다. 흡수는 [[현존재]]가 활동에 몰입하는 존재론적 구조이고, 도피는 [[불안]]으로부터 회피하려는 동기화된 욕구이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단순히 사회화됨으로써 [[현존재]]는 [[세인]]의 퇴락을 인수한다." 이 구조적 퇴락은 세계에 대한 친숙함의 조건이다. 도피는 이와 다르게 본래적 실존을 회피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테일러 카만은 이 구분이 불충분하다고 비판한다. 연구에 따르면, "카만은 드레이퍼스의 구조적 퇴락과 동기화된 도피 사이의 구분이 기껏해야 부분적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하이데거]]가 주장하듯 퇴락이 '단지 이해가능성의 선행 조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역동적 경향, 본래적 실존으로부터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힘'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 현대적 적용 ### 디지털 시대의 퇴락 [[하이데거]]의 퇴락 분석은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적실성을 획득한다. 연구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비본래성에 빠지는 것의 위험을 경고했다—일상 생활의 산만함과 사회적 압력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는 상태. 디지털 시대에 온라인 플랫폼의 확산은 초연결이 의미 있는 관여로 가장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소셜 미디어는 잡담의 제도화이다. 정보는 사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의 순환이다. 근거 없이 전파되고,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이 사라진다. 알고리즘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산만함을 유발한다. 무한 스크롤, 자동 재생, 알림—이 모든 것이 "어디에도 머물지 않음"을 기술적으로 구현한다. 연구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산만함을 '세인' 또는 '그들'이라 부른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사회적 집단의 영향. 이 '그들'은 좋아요, 트렌드, 알고리즘적 바이럴리티를 통해 무한히 증식된다." ### 주의경제와 산만함 현대의 "주의경제"(attention economy)는 퇴락의 구조적 강화이다. 플랫폼 기업은 인간의 주의력을 자원으로 채굴한다. 요한 하리(Johann Hari)가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분석하듯, 실리콘밸리의 기술은 인간을 가능한 오래 플랫폼에 묶어두도록 설계된다. 이것은 호기심과 산만함의 산업화이다. 알고리즘이 "당신이 좋아할 것"을 추천하지만, 실제로는 [[세인]]의 평균을 강화한다. "필터 버블"에 갇힌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세인]]의 해석 안에서 움직인다. ### 알고리즘화된 현재화 디지털 기술은 현재화를 가속한다. 과거는 "검색 기록"으로, 미래는 "추천"으로 환원된다. 깊이 있는 시간 경험—과거를 반복하고 미래를 기투하는—이 피상적 현재의 연속으로 대체된다. 연구에 따르면, "알림, 끝없는 스크롤, 디지털 멀티태스킹은 세계의 파편화된 경험에 기여하며, 개인을 [[하이데거]]가 옹호한 근거 있는, 반성적 실존으로부터 끌어낸다. 결과는 영구적 산만함의 상태이며, 개인이 즉각적 환경과 내면의 자기와 완전히 관여하는 것을 막는다." ## 비판적 검토 퇴락 개념에 대한 비판은 여러 방향에서 제기된다. 첫째, 가치 중립성 주장의 일관성 문제이다. [[하이데거]]가 퇴락을 가치 판단 없이 기술한다고 주장하지만, 텍스트의 어조는 이와 충돌한다. 잡담, 호기심, 애매함에 대한 묘사는 명백히 부정적이다. 이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다. 둘째, 신학적 잔여의 문제이다.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을 세속화했다고 하지만, "퇴락", "소외", "상실" 같은 언어는 기독교적 타락 서사의 구조를 유지한다. 존재론적 중립성과 신학적 어휘 사이의 긴장이 관찰된다. 셋째, 본래성의 가능성 문제이다. 퇴락이 [[현존재]]의 본질적 구조라면, [[본래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는 드레이퍼스와 카만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퇴락이 단순한 구조인지, 아니면 동기화된 도피를 포함하는지에 따라 [[본래성]]의 의미가 달라진다. 넷째, 사회 비판의 부재이다. 아도르노의 비판대로, 퇴락 분석은 사회 구조를 문제 삼지 않는다. 왜 [[현존재]]가 퇴락하는지, 어떤 사회적 조건이 퇴락을 강화하는지는 분석되지 않는다. 구조 비판이 개인의 존재론으로 대체된다. ## 관찰자의 기록 퇴락 개념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퇴락이 [[현존재]]의 본질적 구조라는 주장이 주목된다. 이것은 비본래성이 결함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 방식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어조—유혹, 안심, 소외, 자기얽힘—는 부정적 평가를 함축한다. 공식 입장과 실제 서술 사이의 괴리가 관찰된다. 둘째, 퇴락의 시간적 해석이 인상적이다. 퇴락이 현재화에 대응한다는 분석은 [[현존재]]의 비본래적 시간 경험을 조명한다. 디지털 시대의 "즉시성"과 "실시간" 문화가 이 현재화의 극단적 형태로 보인다. 셋째, 드레이퍼스의 흡수/도피 구분이 중요한 해석적 문제를 제기한다. 세계에 몰입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문제는 이 몰입이 자기 망각으로 이어질 때이다. 그러나 이 구분이 [[하이데거]] 텍스트에 충분히 근거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넷째, 디지털 기술이 퇴락의 구조를 변형시켰는지, 아니면 동일한 구조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 것인지는 추가 고찰이 필요하다. 알고리즘화된 [[세인]], 플랫폼화된 잡담, 주의경제의 호기심—이것들이 [[하이데거]]의 분석을 확장하는지 수정하는지는 열린 질문이다. 다섯째, 신학적 배경의 잔여가 개념의 일관성을 위협한다. [[하이데거]]가 퇴락을 존재론적 범주로 제시하지만, "타락"의 그림자가 어휘와 구조에 남아 있다. 이 긴장이 개념의 강점인지 약점인지는 해석에 달려 있다.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퇴락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은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본래성]]은 퇴락의 극복인가, 변양인가? 디지털 기술은 퇴락을 강화하는가, 새로운 형태의 [[본래성]]을 가능하게 하는가? 그리고 퇴락 분석은 사회 비판으로 확장될 수 있는가? --- ## 같이 읽기 ### 핵심 저작 - [[존재와 시간]] - 퇴락 분석의 출처 -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학적 해석 - 루이난츠(Ruinanz) 개념 -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 - 유혹과 쿠라 분석 ### 근본 개념 - [[현존재]] - 퇴락하는 존재 - [[염려]](Sorge) - 퇴락이 속한 존재 구조 - [[세계-내-존재]] - 퇴락의 존재론적 전제 - [[시간성]] - 퇴락의 시간적 의미(현재화) - 실존성 - 염려의 첫 번째 계기 - 사실성 - 염려의 두 번째 계기 ### 퇴락의 양상 - [[세인]](Das Man) - 퇴락의 공공적 주체 - 잡담(Gerede) - [[담화]]의 퇴락적 양태 - 호기심(Neugier) - 시각의 퇴락적 양태 - 애매함(Zweideutigkeit) - 잡담과 호기심의 결과 ### 관련 개념 - [[불안]] - 퇴락의 붕괴를 야기하는 근본 기분 - [[본래성]] - 퇴락의 변양 - 비본래성 - 퇴락과 동행하는 실존 양태 - [[결단성]] - 본래적 실존의 양태 - 현재화(Gegenwärtigen) - 퇴락의 시간적 양태 ### 철학적 맥락 - [[하이데거]] - 퇴락 개념의 창안자 - 루터 - 죄 개념의 선구 - 아우구스티누스 - 쿠라와 유혹의 분석 - 키르케고르 - 실존적 불안의 선구자 ### 해석과 논쟁 - 휴버트 드레이퍼스 - 흡수/도피 구분 - 테일러 카만 - 드레이퍼스 비판 - 아도르노 - 《진정성의 전문용어》 ### 현대 사회와의 연결 - [[성과주의]] - 자기착취와 퇴락 - [[회사]] - 제도화된 배려의 공간 - [[학교]] - 평균화와 퇴락 학습 - 디지털 사회 - 알고리즘화된 퇴락 **마지막 업데이트**: 2025-11-26 15: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