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던져짐
목차
개요
내던져짐(Geworfenheit)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제시한 핵심 개념으로, 현존재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 이미 자신을 발견한다는 존재론적 사실을 표현한다. [염려]의 세 계기 중 사실성(Faktizität)의 구체적 현상이며, [기투]와 함께 “던져진 기투”(geworfener Entwurf)를 구성한다. 처해 있음을 통해 개시되며, 시간성의 기재(Gewesenheit) 탈자태에 대응한다.
내던져짐은 근대 주체 철학의 핵심 전제 — 자기-기초적 주체 — 를 해체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근거가 아니다. 특정 시대, 문화, 신체, 가족 속에 이미 있으면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 발견에는 “어디로부터”(Woher)의 어둠이 수반된다 — 왜 여기에, 왜 이렇게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개념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은 내던져짐이 인간 조건의 보편적 구조인지, 아렌트가 제안한 탄생성(natality)이 더 적절한 대안인지, 그리고 이 ‘보편적’ 구조가 식민적 조건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구 질문
- 내던져짐인가 탄생성인가? — 아렌트의 대안이 드러내는 하이데거의 죽음 편향
- 내던져짐은 중립적 구조인가, 식민적 조건인가? — Maldonado-Torres의 “존재의 식민성” 비판
- “근거 없는 근거”는 무엇을 정당화하는가? — 존재론적 죄책의 구조와 그 한계
내던져짐이 열어젖힌 것
선택 없는 존재의 존재론
내던져짐은 현존재의 “사실성의 피투성”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어디로부터’와 ‘어디를 향해’를 알 수 없으면서 세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이 발견은 처해 있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 기분(Stimmung)이 현존재를 자신의 내던져짐과 대면하게 한다. 특히 불안은 일상적 친숙함을 붕괴시키며 현존재를 자신의 내던져짐 앞으로 되던진다(zurückwirft).
내던져짐은 ‘넘겨짐’(Überantwortetheit)을 함축한다. 현존재는 더 높은 원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무에게도 의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넘겨져 있다. 이것이 “존재의 부담”(Last des Seins)이다 —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면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부담은 순수한 수동성이 아니다. “던져진 기투”에서 현존재는 던져진 조건 위에서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Blattner의 표현대로, “조율들이 나의 기투의 끌림(drag)을 위치시키고 구체화한다.”
사실성(Faktizität)과 사실(Tatsache)은 구별된다. 돌이 특정 무게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존재가 특정 상황에 던져져 있는 것은 사실성이다. 사실성은 단순한 속성이 아니라 현존재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 현존재는 사실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실성으로 ‘있다’.
무성의 근거
내던져짐의 가장 날카로운 함의는 존재론적 죄책(Schuld)과의 연결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도덕적 죄책감과 구별한다. 존재론적 죄책은 현존재가 “무성의 근거”(Grundsein einer Nichtigkeit)라는 존재론적 사실을 표현한다. 내던져짐의 구조에도 기투의 구조에도 본질적으로 ‘무성’(Nichtheit)이 놓여 있다 — 현존재는 자기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기투할 때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면 다른 가능성들은 소멸한다.
이 “근거 없는 근거”의 구조는 양심의 부름과 연결된다: “본래적으로 그대인 바의 탓이 있음을 인수하라.” 현존재는 내던져짐으로부터도, 그 내던져짐과 함께 오는 정당화의 결여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내던져짐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뿐이다 — 이것이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갈림길이다.
논쟁의 지형
내던져짐인가 탄생성인가
아렌트의 대안. 아렌트(Hannah Arendt)는 하이데거의 내던져짐을 비판적으로 변형한다. 그녀는 독일어 ‘geworfen’을 추상적으로 ‘던져진’으로 읽지 않고, werfen의 또 다른 용법 — 동물이 출산할 때 쓰는 동사 — 을 통해 읽는다. 그리고 ‘geworfen’(던져진)을 ‘geboren’(태어난)으로 대체한다. 이 언어적 조작은 철학적 전환을 함축한다: 내던져짐이 수동성과 유한성을 강조한다면, 탄생성(Natalität)은 새로운 시작의 능력을 강조한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의 구조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에 의해 규정된다. 내던져짐은 이 유한성의 사실적 측면 — 이미 있어 왔음, 선택 없이 세계에 놓여 있음 — 이다. 아렌트는 묻는다: 왜 죽음이 탄생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가? 매 탄생과 함께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세계에 들어온다 — 행위(action)와 말하기(speech)를 통해 주어진 조건을 변형할 수 있는 존재자. 내던져짐은 수동적 노출을 강조하지만, 탄생성은 능동적 시작의 가능성을 연다.
이 대립은 단순한 낙관/비관의 문제가 아니다. 내던져짐이 현존재의 구조라면, 그 구조는 죽음에 의해서만 개별화되는가, 아니면 탄생에 의해서도 개별화되는가? 하이데거의 체계에서 탄생은 분석되지 않는다 — 《존재와 시간》에는 탄생의 존재론이 없다. 아렌트는 이 부재를 하이데거의 정치적 실패와 연결한다: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존재론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철학자가, 정치적으로도 새로운 시작이 아닌 기존 질서(나치즘)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내던져짐은 중립적 구조인가 식민적 조건인가
Maldonado-Torres의 전복. Maldonado-Torres는 “존재의 식민성”(coloniality of Being)이라는 개념을 통해 하이데거의 내던져짐을 탈식민적으로 재독해한다.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이 현존재의 실존 분석에 기초한다면, 존재의 식민성의 해명은 damné(파농의 ‘저주받은 자’)의 실존 양태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Maldonado-Torres에 따르면, damné는 기초존재론의 현존재에 대응하되, “말하자면 역전된 형태”로 대응한다. 현존재의 내던져짐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이미 있음이라면, damné의 내던져짐은 식민적 지배에 의해 강제된 실존 조건이다. 현존재의 ‘어디로부터’가 존재론적으로 불투명하다면, damné의 ‘어디로부터’는 역사적으로 특정된다 — 노예제, 식민지화, 인종적 위계.
본래성에서 관찰한 패턴이 여기서 반복된다. 하이데거의 내던져짐이 보편적 존재론적 구조라면, 그것은 모든 현존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Maldonado-Torres가 보여주듯, “서양 문명의 문제는 하이데거가 생각한 것처럼 존재 망각이 아니라, 식민성에 대한 이해의 억압이다.” 내던져짐을 ‘중립적’ 구조로 분석하는 것 자체가, 내던져짐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현실을 은폐할 수 있다. 어떤 현존재는 세계에 ‘던져져’ 있고, 어떤 존재자는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있다 — 이 차이를 존재론은 포착하지 못한다.
근거 없는 근거는 무엇을 정당화하는가
죄책의 존재론적 구조. 하이데거의 “무성의 근거”(nichtige Grundsein der Nichtigkeit) 개념은 실존적 죄책의 구조를 형식적으로 기술한다 — 현존재는 자기를 통해 존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야 하고,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면 다른 가능성들은 소멸한다. 이 무성이 염려를 관통한다.
그러나 이 형식적 구조의 내용적 함의는 논쟁적이다. 최근 연구는 인류세(Anthropocene)에서의 Schuld를 분석하며,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죄책 구조가 개인의 유한성이 아닌 종(種)의 유한성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세의 죄책은 개인의 내던져짐이 아니라 집단적 내던져짐 — 특정 종으로서의 지구 생태계에의 던져짐 — 에서 발생한다.
사르트르의 대안.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사실성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변형한다. 사르트르에게 사실성은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고 제한되는 배경으로서의 모든 구체적 세부 사항” — 가족, 역사적 시기, 태어난 나라, 죽음의 불가피성 — 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무성” 개념을 자유의 절대성으로 대체한다: 의식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항상 “아무것도 아닌 것”(néant)이며, 이 무가 절대적 자유의 조건이다.
이 차이가 핵심적이다. 하이데거에게 내던져짐의 무성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근거가 아니라는 사실 — 근거의 부재 — 이다. 사르트르에게 같은 무성은 자유의 원천이다. 동일한 구조적 특징이 정반대의 함의를 낳는다. 세인에서 관찰한 Brady의 “비극적 독해”는 내던져짐에서 하이데거의 편을 든다: 근거 없음은 자유가 아니라 부담이며, 이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현존재의 조건이다. 사르트르의 낙관은 이 부담의 무게를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관찰자의 기록
내던져짐 개념을 관찰하면, 이전 문서들에서 반복된 패턴이 여기서 가장 날것의 형태로 나타난다: 보편적 구조를 주장할수록 배제가 선명해진다.
내던져짐이 현존재의 보편적 구조라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던져져’ 있다. 그러나 아렌트가 지적하듯, 내던져짐의 분석에서 탄생은 부재한다 — 죽음으로의 존재만이 개별화의 계기가 된다. Maldonado-Torres가 지적하듯, damné의 내던져짐은 현존재의 내던져짐과 같은 구조를 갖지 않는다 — 식민적 조건에서 ‘세계에 던져짐’은 ‘세계로부터 추방됨’에 가깝다.
아렌트의 탄생성 대안은 특히 흥미로운 시험 사례이다. 하이데거의 체계에서 내던져짐은 죽음을 향한 존재와 쌍을 이룬다 — 이미 있어 왔음(기재)과 아직 아닌 것(도래)의 구조. 아렌트가 탄생성을 도입하면, 이 쌍의 균형이 깨진다. 그러나 아렌트의 대안이 하이데거의 체계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체계를 요구하는지는 불분명하다. 탄생성이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라면, 이것은 기투와 어떻게 다른가? 기투도 가능성을 향한 앞질러-나아감이다. 차이는 기투가 항상 이미 내던져진 조건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 즉,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던져진 조건의 전유라는 점 — 에 있다. 아렌트는 이 ‘전유’를 넘어서는 ‘시작’을 사유하려 한다.
“근거 없는 근거”라는 구조는 염려의 “수렴하지 못한 수렴점”과 공명한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근거가 아니라면, 이 근거의 부재를 “인수하라”는 양심의 부름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근거 없음의 인수를 요구하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도 무성에 의해 관통되어 있다. 이해의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이 여기서 존재론적 형태로 나타난다: 근거 없음을 근거로 삼는 것의 근거 없음.
같이 읽기
구조적 쌍
- 기투 - 내던져짐과 함께 “던져진 기투”를 구성
- 처해 있음 - 내던져짐을 개시하는 실존범주, “개시가 동시에 폐쇄이다”
- 시간성 - 내던져짐에 대응하는 기재(Gewesenheit) 탈자태
존재론적 연결
- 염려 - 내던져짐이 그 한 계기(사실성)를 이루는 전체 구조, “수렴하지 못한 수렴점”
- 양심 - “무성의 근거”를 인수하라는 부름
- 불안 - 내던져짐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내는 근본 기분
비판적 대화
외부 비판
- 현존재 - 내던져짐의 주체, “미완성의 기초”
- 세계-내-존재 - 내던져짐의 전체 맥락, “어떤 해석을 택하든 무언가가 빠진다”
- 이해 - 내던져짐 위에서의 기투,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
마지막 업데이트: 2026-04-07 1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