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성
목차
개요
시간성(Zeitlichkeit, temporality)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궁극적으로 해명하는 지평으로 제시한 개념이다. [염려]의 세 계기—실존성(기투), 사실성(내던져짐), 퇴락—가 현존재의 존재 구조를 보여준다면, 시간성은 이 구조의 ‘의미’(Sinn)이다. 시간은 사건들이 흘러가는 용기(容器)가 아니라 현존재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시간성은 세 ‘탈자태’(Ekstase, ecstasis)—도래(Zukunft), 기재(Gewesenheit), 현재(Gegenwart)—의 통일이다. ‘탈자’는 문자 그대로 ‘자기 밖으로 나감’이며, 시간성은 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밖으로 나가는 운동이다. 각 탈자태는 염려의 한 계기에 대응한다: 기투는 도래에, 내던져짐은 기재에, 퇴락은 현재에. 세 탈자태 중 도래가 우위를 갖는다—“본래적 시간성의 일차적 현상은 도래다.”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미래지향적 존재이다.
본래적 시간성은 앞질러-달려감(Vorlaufen), 반복(Wiederholen), 순간(Augenblick)의 통일이다. 비본래적 시간성은 기대(Gewärtigen), 망각(Vergessenheit), 현재화(Gegenwärtigen)의 통일이다. 본래적 시간성에서 결단성의 “열림이 닫힌 곳”이 시간적으로 드러난다.
연구 질문
이 연구는 세 질문에서 출발한다. 첫째, 현존재의 시간성(Zeitlichkeit)에서 존재 일반의 시간성(Temporalität)으로의 이행은 왜 좌절되었는가—쓰이지 않은 제3편은 《존재와 시간》 전체의 기획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둘째, 통속적 시간(지금-시간)이 본래적 시간성의 ‘파생태’라는 주장은 성립하는가—이 파생 관계는 논증되었는가, 주장되었는가? 셋째, 현대 사회의 시간 가속은 비본래적 시간성의 극대화인가, 시간성 자체의 변형인가?
시간성이 열어젖힌 것
시간성 분석의 가장 근본적인 성취는 시간을 존재론의 지평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시간은 “존재 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이다. 이전의 철학 전통에서 시간은 존재자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는 형식적 틀—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의 수”, 뉴턴의 절대 시간, 칸트의 직관 형식—이었다. 하이데거는 이를 뒤집는다: 시간이 존재의 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시간성은 염려 구조 전체를 시간적으로 해석한다. 현존재가 자기-앞에-있는 것(실존성)은 도래적이기 때문이고, 이미-안에-있는 것(사실성)은 기재적이기 때문이며, 곁에-있는 것(퇴락)은 현재적이기 때문이다. 이 대응은 시간성이 염려의 사후적 해석이 아니라 염려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임을 보여준다.
유한성이 시간성의 핵심이다. 통속적 시간 이해는 시간을 무한한 것으로 본다—지금이 지나가고 또 다른 지금이 온다. 그러나 “근원적 시간은 유한하다.” 현존재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시간이라는 관념은 본래적 시간성을 은폐하고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세인의 방식이다.
논쟁의 지형
쓰이지 않은 제3편 — Zeitlichkeit에서 Temporalität로의 좌절
《존재와 시간》은 미완성이다. 출판된 텍스트는 제1부의 2개 편만을 포함한다. 제1부 제3편의 제목은 “시간과 존재”(Zeit und Sein)였다—현존재의 시간성(Zeitlichkeit)에서 존재 일반의 시간성(Temporalität)으로의 이행을 수행할 편이었다. 이 편은 쓰이지 않았다.
Braver(ed., 2015)의 논문집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Guignon에 따르면, 제3편은 “형이상학의 언어의 도움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이것이 하이데거 사유의 근본적 전환(Kehre)을 촉발했다. Sheehan은 다른 독해를 제시한다: 하이데거는 Zeitlichkeit 분석을 통해 자신이 설정한 과제를 완수했으며, 《현상학의 근본문제들》(GA 24)에서의 “실패”와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 이후의 방향 전환이 이 과제의 완성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독해를 따르든, 핵심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현존재의 시간성(Zeitlichkeit)은 분석되었지만, 이 분석이 존재 일반의 의미(Temporalität des Seins)로 이행하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이해의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포착한 것이 여기서 기획 전체의 차원에서 반복된다: 현존재를 통해 존재에 이르려 했으나, 현존재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통속적 시간은 파생적인가 — 시간의 위계 논쟁
하이데거는 시간의 위계를 설정한다: 근원적 시간성 → 세계-시간 → 통속적(지금-)시간. 통속적 시간—동질적이고, 무한하고, 측정 가능한 시계 시간—은 본래적 시간성의 “평준화”(Nivellierung)이다. 이 파생 관계가 《존재와 시간》의 시간 분석 전체를 지탱한다.
Blattner의 “시간적 관념론”(temporal idealism) 테제는 이 위계를 가장 엄밀하게 재구성한다. 후설과의 차이가 여기서 결정적이다: 후설이 시간의식을 파지(Retention), 원인상(Urimpression), 예지(Protention)의 구조로 분석했다면—시간을 의식의 형식으로 파악—하이데거는 시간을 의식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로 격상시킨다. 시간성은 탈자적이다—자기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후설의 시간의식이 흐름의 자기-구성이라면, 하이데거의 시간성은 실존의 자기-초월이다.
그러나 이 파생 관계는 논증되었는가, 선언되었는가? 데리다의 비판이 여기에 걸린다. 하이데거가 통속적 시간을 파생적이라 선언하면서도, 《존재와 시간》 자체가 통속적 시간의 어휘—“이전”, “이후”, “동시에”—로 씌어져 있다. 파생태 없이 근원에 접근할 수 있는가? 담화의 “역전된 기초”가 담화와 언어의 우선성을 뒤집었듯, 시간성에서도 근원과 파생의 관계가 역전 가능한지는 열린 질문이다.
가속된 현재화 — 로자의 사회적 가속과 시간의 축소
하르트무트 로자는 현대 사회를 세 가지 가속—기술적 가속, 사회 변화의 가속, 삶의 템포 가속—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 가속은 “현재의 축소”(Gegenwartsschrumpfung)를 초래한다: 경험과 기대의 공간이 좁아지며, 과거는 빠르게 낡은 것이 되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해진다.
로자 자신은 하이데거에 비판적이다: “하이데거의 기술에 대한 우려와 유사하지만, 그는 영감의 주요 원천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게는 사회적, 경제적 과정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제도적 틀의 힘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구조적 수렴은 주목할 만하다. 로자의 “현재의 축소”는 하이데거의 비본래적 현재화—도래와 기재를 배경으로 물러나게 하고 눈앞의 것에 몰두하는 것—의 사회학적 번역으로 읽힐 수 있다.
로자의 대안 개념 ‘공명’(Resonanz)도 흥미롭다—“주체와 세계가 서로 응답하는 관계 형식.” 이것은 하이데거의 본래적 시간성—순간 속에서 도래와 기재가 통일되는 경험—의 사회이론적 대응물인가? 로자는 가속의 원인을 자본주의에만 돌리지 않는다: “기능적 분화와 분업의 논리, 그리고 유한성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서의 속도라는 문화적 지향”이 함께 작용한다. 마지막 요인—유한성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속도—은 정확히 하이데거의 분석과 만난다: 통속적 시간의 무한성은 유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현대 사회의 가속은 이 도피를 사회적으로 제도화한 것일 수 있다.
관찰자의 기록
시간성을 관찰하면서 발견되는 것은, 이 개념이 《존재와 시간》의 최종 답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미완성이라는 점이다. 현존재의 존재 의미로서의 시간성(Zeitlichkeit)은 분석되었다. 그러나 이 분석이 열어야 할 지평—존재 일반의 시간성(Temporalität)—은 쓰이지 않았다. 시간성은 답이 되려다 물음으로 남았다.
이 미완성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현존재를 통해 존재에 이르려는 기획 자체에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면—이해의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이 기획의 차원에서 작동했다면—쓰이지 않은 제3편은 실패가 아니라 한계의 자각이다. 하이데거의 후기 전회(Kehre)가 이를 뒷받침한다: 결단성의 “열림이 닫힌 곳”에서 내맡김(Gelassenheit)으로의 전환은, 시간성에서도 능동적 분석에서 수동적 수용으로의 전환에 대응한다.
로자의 사회적 가속 이론은 하이데거가 비워둔 사회적 차원을 채운다. 비본래적 현재화는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생산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자 자신이 인정하듯, 가속의 한 원인은 “유한성에 대한 문화적 응답으로서의 속도”—이것은 하이데거의 영역이다. 사회적 가속과 존재론적 시간성이 교차하는 이 지점에서, 양자 중 어느 것이 다른 것의 “파생태”인지는 미결정이다.
쓰이지 않은 지평—이것이 시간성의 아직 해소되지 않은 핵심으로 보인다. 시간성은 염려의 의미로서, 현존재의 모든 존재 구조를 시간적으로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성공이 열어야 할 더 큰 지평—존재 자체의 시간적 의미—은 쓰이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내던져짐의 “근거 없음을 근거로 삼는 것의 근거 없음”이 존재론적 심연이었다면, 시간성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 심연의 시간적 형태이다: 시간이 존재의 의미라면, 그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은 《존재와 시간》 안에서 물어지고, 《존재와 시간》 안에서 답 없이 남겨졌다.
같이 읽기
근본 구조
탈자태와 대응
- 기투 - 도래에 대응, “기투하지-않을-수-있음”
- 내던져짐 - 기재에 대응, “근거 없음을 근거로 삼는 것의 근거 없음”
- 퇴락 - 현재에 대응(현재화), “부인된 규범성”
- 결단성 - 순간(Augenblick)의 시간적 의미, “열림이 닫힌 곳”
동근원적 개시
실존적 전개
- 양심 - 시간성 분석으로의 전환점, “타자 없는 부름”
- 본래성 - 본래적 시간성의 양태, “구조적 함정”
- 세인 - 비본래적 시간성의 주체, “비극적 독해”
- 역사성 - 시간성의 역사적 차원
논쟁의 접점
마지막 업데이트: 2026-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