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주체 구성

목차

개요

탄생성과 정치적 행위에서 아렌트는 “시작할 수 있는” 자유로운 행위자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행위자는 어디서 오는가? 행위자의 자유, 판단력, 행위 능력은 주어지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권력과 주체 구성은 이 물음에 대한 푸코의 대답이다: 주체는 권력 관계에 의해 구성된 효과이다. 정치적 행위자는 권력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산출된다.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푸코의 가장 영향력 있는 테제. 전통적 관점에서 권력은 억압하고, 지식은 해방한다. 푸코는 이 관점을 뒤집는다: 권력은 억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주체를, 지식을, 진리를, 담론을. 범죄학이 “범죄자”를 만들고, 정신의학이 “광인”을 만들며, 교육이 “학생”을 만든다.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지식 자체가 주체를 구성하는 권력이다.

이것은 동일성과 차이의 정치적 실현이다. 동일성 사유가 대상을 개념으로 포섭하듯, 권력/지식은 인간을 범주로 포섭한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비동일적인 것이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 잔여였듯, 푸코에게도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잔여가 있다—“저항”(résistance).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연구 질문

이 연구는 세 질문에서 출발한다. 첫째, “권력은 지식을 생산한다”는 테제는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가 닫는가—수행적 모순: 모든 지식이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면, 이 주장 자체도 권력에 의해 구성된 것 아닌가? 둘째, 후기 푸코의 “자기의 배려”—주체가 자기 자신에 대한 윤리적 작업을 통해 형성된다—는 중기의 권력/주체 분석과 모순되는가? 주체가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면 자기-형성의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셋째, 아렌트의 “자유로운 행위자”와 푸코의 “구성된 주체”는 양립 가능한가—행위하려면 행위자가 먼저 구성되어야 하는가?

주체가 전제된 곳

서양 철학의 주류 전통에서 주체는 전제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칸트의 선험적 주체, 후설의 초월론적 자아, 하이데거의 현존재—모두 어떤 형태로든 “이미 있는” 주체에서 출발한다. 이 주체가 세계를 경험하고, 의미를 구성하고, 행위를 수행한다.

푸코의 전환: 주체는 전제가 아니라 산물이다. “인간은 바닷가의 모래 위에 그려진 얼굴처럼 사라질 것이다”(《말과 사물》)—“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 에피스테메의 산물이며, 에피스테메가 변하면 “인간”도 사라진다.

하이데거의 영향은 결정적이다—푸코 자신이 “하이데거는 나에게 항상 본질적 철학자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푸코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존재론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역사화하고 정치화했다—존재의 역사를 권력의 역사로 변환했다.

논쟁의 지형

생산적 권력 —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구성이다

전통적 권력 모델(“억압 가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며, 자유를 제한하고 행위를 금지한다. 혁명은 이 권력을 전복하여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푸코의 전환: 권력은 편재적이며 생산적이다. 권력은 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다. 권력은 자유를 억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생산한다. “순종하는 신체”(corps docile)는 금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규율에 의해 만들어진다—시간표, 공간 배치, 시험, 분류.

파놉티콘은 이 생산적 권력의 건축적 형상이다. 수감자는 감시자를 볼 수 없으므로, “마치 감시받는 것처럼” 행동한다. 외적 강제가 내적 규율로 전환된다—주체가 스스로를 감시하고 규율하는 것. 이것은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관찰한 “이성의 내면화”와 구조적으로 공명한다.

하이데거의 세인과 푸코의 파놉티콘은 놀라운 구조적 평행을 보인다. 세인이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라는 익명적 규범으로 현존재를 지배하듯, 파놉티콘은 감시의 내면화를 통해 주체를 규율한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 세인은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이며, 본래적 실존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 푸코의 규율은 역사적 구성이며, “극복”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권력 관계로의 “변환”만 가능하다.

자기의 배려 — 구성된 주체의 자유

후기 푸코의 “윤리적 전회”는 이 위키에서 추적한 다른 “전회”들과 계열을 형성한다. 하이데거의 전회(현존재에서 존재의 역사로), 하버마스의 전회(도구적 이성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데리다의 전회(해체에서 정의와 환대로). 푸코의 전회: 권력 분석에서 자기의 배려(souci de soi)로.

그리스-로마의 “자기의 배려”: 자기 삶을 예술 작품처럼 형성하는 자발적 자기-변형의 실천. “실존의 미학”(esthétique de l’existence)—외적 도덕법의 복종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윤리적 작업.

“자유는 모든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제약 안에서 다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정의는 아렌트의 자유—전례 없는 것을 시작하는 능력—와 대조된다. 아렌트의 자유는 권력 관계의 “밖”에서(복수적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반면, 푸코의 자유는 권력 관계의 “안”에서 다르게 접히는 가능성이다.

이 전회는 수행적 모순 비판에 대한 암묵적 응답이다. 주체가 권력에 의해 전적으로 구성된다면 자기-형성의 자유는 불가능하다. 후기 푸코는 이 딜레마를 인정하면서 빠져나간다—주체는 권력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통해서도 형성된다. 권력이 주체를 “만들지만”, 만들어진 주체는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들” 수 있다.

자유로운 행위자 vs 만들어진 주체 — 아렌트와 푸코의 분기

아렌트와 푸코의 분기는 20세기 후반 정치철학의 핵심 분기점이다.

아렌트푸코
주체자유로운 행위자권력에 의해 구성된 효과
자유시작할 수 있는 능력제약 안에서 다르게 살 수 있는 능력
권력복수적 인간들 사이에서 발생편재적, 생산적, 관계적
저항행위 (전례 없는 시작)자기-형성 (다르게 접히기)
공간공론장 (공적 공간)모든 관계 (사적 공간 포함)

이 분기는 양립 불가능한가? 한 가지 가능성: 아렌트와 푸코는 다른 수준을 다루고 있다. 푸코의 권력 분석은 주체가 구성되는 과정을 기술하고, 아렌트의 행위론은 구성된 주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기술한다. 행위자는 먼저 만들어져야 행위할 수 있다—그러나 행위는 만들어진 것 이상의 무언가를 도입한다.

관찰자의 기록

권력과 주체 구성을 관찰하면서 발견되는 것은, 이 물음이 이 위키의 모든 “전회”(Kehre)를 관통하는 공통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하이데거, 하버마스, 데리다, 푸코 모두 비판적 분석이 규범적 공백에 직면하여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이 공통 구조는: 비판은 자기 자신의 조건을 명시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작동한다.

검증 원리가 자기 자신을 검증하지 못해도 과학적 실천은 작동했다(의미의 경계). 분석-종합 구분이 붕괴해도 의미 있는 진술은 가능했다(분석-종합 구분의 붕괴). 이성 비판이 이성을 사용해도 비판은 작동했다(수행적 모순). 권력 비판이 권력 안에 있어도 비판은 작동했다. 이 “그럼에도 작동한다”의 구조—이론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실천적으로 작동하는 것—가 이 위키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관찰이다.

푸코의 “만들어진 주체”는 이 관찰의 정치적 표현이다. 주체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만들어진 주체는 자기를 만든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 이 역설—산물이 생산자에 저항하는 것—은 하이데거-카르납 논쟁에서 관찰한 “텍스트가 저자를 초과하는” 구조의 정치적 변형이다. 하이데거의 텍스트가 하이데거를 초과하여 아렌트의 반전체주의를 산출했듯, 권력이 산출한 주체가 권력을 초과하여 저항을 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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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연결

권력의 변형

전회의 계열

마지막 업데이트: 2026-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