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확정 불가능성

목차

개요

20세기 철학에서 가장 놀라운 수렴 중 하나: 전혀 다른 전통에서, 전혀 다른 도구로, 전혀 다른 동기에서 출발한 세 가지 탐구가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의미는 최종적으로 확정될 수 없다.

콰인의 번역의 미결정성(1960): 원주민이 토끼를 보고 “가바가이!”라고 말한다. 이 발화는 “토끼”, “토끼의 시간적 단면”, “분리되지 않은 토끼 부분”, “모든 토끼의 공간적 총체” 중 어떤 것을 지칭하는가? 행동적 증거는 이 대안들을 구별하지 못한다—어떤 경우든 관찰 데이터는 동일하다.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 역설(1982/1953): “2, 4, 6, 8” 다음에 오는 수는? “10”이라고 답하겠지만, “2를 더하기”가 아니라 “8까지는 2를 더하고 그 이후는 4를 더하기”라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닌지 어떻게 확인하는가? 유한한 과거 사례가 무한한 미래 적용을 결정하지 못한다—“어떤 행위의 과정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의 과정도 규칙에 합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차연(1967): 의미는 기호 사이의 차이에 의해 산출되지만, 이 산출은 결코 완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지연(différer)된다. 어떤 기호도 자기 자신에 “현전”하지 않으며, 항상 다른 기호의 흔적을 품는다. 최종적 의미—“초월적 기의”(signifié transcendantal)—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수렴이 분석-대륙 분열의 양쪽에서 관찰된다는 것은, 하이데거-카르납 논쟁이 산출한 분열이 은폐하는 공유된 발견이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 질문

이 연구는 세 질문에서 출발한다. 첫째, 세 경로의 수렴은 실질적인가 표면적인가—콰인, 비트겐슈타인, 데리다가 도달한 “확정 불가능성”은 같은 것인가, 이름만 같은 다른 세 가지인가? 둘째, 의미의 확정 불가능성은 의미의 “부재”를 뜻하는가 의미의 “과잉”을 뜻하는가—의미가 결정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너무 적어서인가 너무 많아서인가? 셋째, 확정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사소통한다—이 사실은 확정 불가능성 테제를 반박하는가, 아니면 의사소통의 본성에 대한 다른 이해를 요구하는가?

세 경로의 수렴

세 경로의 출발점은 전혀 다르다.

콰인: 경험주의 내부에서. 분석-종합 구분의 붕괴 이후, 의미를 경험과 독립적으로 확정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전체론에 의해 개별 진술의 의미는 이론 전체에 의존하며, 이론 전체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동등한 대안이 복수 존재한다.

비트겐슈타인: 언어 사용의 분석에서. 의미를 “머릿속의 무엇”(심적 상태, 의미 규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실패한다. 규칙은 적용을 결정하지 않으며, 의미는 사용(Gebrauch)에 있다—그러나 사용도 유한하므로 미래의 적용을 확정하지 못한다.

데리다: 현상학과 구조주의 내부에서. 소쉬르의 기호학—의미는 기호 간의 차이 관계에 의해 산출된다—을 급진화하여, 이 차이의 유희가 결코 안정된 의미에 도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후설의 현전의 형이상학—의미가 의식에 직접 현전한다—을 해체하여, 현전이 항상 부재에 의해 구성됨을 보여준다.

세 경로의 결론은 구조적으로 동형이다: 유한한 증거/사례/맥락은 무한한 의미 가능성을 결정하지 못한다. 콰인에서 증거는 행동적 관찰이고, 비트겐슈타인에서 사례는 과거의 규칙 적용이며, 데리다에서 맥락은 기호의 현재적 사용이다. 그러나 각 경우에서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확정하지 못한다.

논쟁의 지형

번역의 미결정성 — 행동적 증거는 의미를 확정하지 못한다

콰인의 사고 실험: 언어학자가 완전히 미지의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과 접촉한다(“급진적 번역”). 토끼가 달릴 때 원주민이 “가바가이!”라고 외친다. 언어학자는 이 발화의 의미를 행동적 증거—어떤 자극에 동의하고 어떤 자극에 부동의하는가—만으로 결정해야 한다.

콰인의 테제: 행동적 증거와 양립 가능한 번역 매뉴얼이 복수 존재하며, 이들 사이에서 결정하는 “사실”(fact of the matter)은 없다. “가바가이”가 “토끼”를 의미하는지 “분리되지 않은 토끼 부분”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사실이 세계에 없다—행동적 증거는 양쪽 모두와 양립한다. 의미는 세계의 사실이 아니라 번역 매뉴얼의 선택에 의존한다.

이것은 분석-종합 구분의 붕괴의 직접적 연장이다. 분석적 진리가 “의미에 의해서만 참”이라면, 의미 자체가 확정되지 않으면 분석적 진리도 확정되지 않는다. 전체론의 귀결이 미결정성이다.

규칙 따르기 역설 — 유한한 사례는 규칙을 결정하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01: “어떤 행위의 과정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의 과정도 규칙에 합치하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립키(1982)는 이것을 “의미에 관한 사실은 없다”(there is no fact of the matter about meaning)는 회의주의적 역설로 재구성한다.

핵심 논증: 내가 과거에 ”+“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더하기”(plus)를 의미했다고 확신하지만, 나의 유한한 과거 사용이 내가 “더하기”를 의미했다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나의 과거 사용은 “68 + 57 = 125”와 “68 + 57 = 5”(쿠더하기/quus: 이전에 계산한 수가 모두 57 이하였다면 5를 답하라)를 동시에 만족시킨다. 내 안의 어떤 사실도—심적 상태, 성향, 의도—쿠더하기가 아닌 더하기를 의미한다는 것을 확정하지 못한다.

크립키의 “회의주의적 해법”: 역설을 받아들이되,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의미가 유지된다고 주장한다. 나의 규칙 따르기가 “올바르다”는 것은 내 사용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의 기대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의미의 근거는 개인의 심적 사실이 아니라 공동체의 실천이다.

차연 — 의미는 끊임없이 지연된다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은 콰인이나 비트겐슈타인과 전혀 다른 전통에서 같은 지점에 도달한다. 소쉬르: 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 관계에 의해 산출된다—“고양이”의 의미는 “고양이”가 “개”, “사자”, “토끼”와 다르다는 것에 의존한다. 데리다의 급진화: 이 차이 관계의 유희는 결코 안정된 의미에 도달하지 않는다. 각 기호는 다른 기호들로의 지시를 품고 있으며, 그 지시의 연쇄는 끝나지 않는다.

“초월적 기의”(signifié transcendantal)—차이의 유희를 멈추고 의미를 확정하는 궁극적 참조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 “이성”, “존재”, “진리”—이 모든 것이 초월적 기의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지만, 해체는 이 모든 것이 차이의 유희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세 경로의 수렴 지점을 더 정밀하게 비교하면: 콰인의 미결정성은 증거의 부족에 의한 것이다—행동적 증거가 번역을 결정하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역설은 사례의 유한성에 의한 것이다—유한한 과거가 무한한 미래를 결정하지 못한다. 데리다의 차연은 구조의 개방성에 의한 것이다—차이의 체계가 닫히지 않는다. 세 경우 모두 “확정”이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성의 원천이 다르다.

관찰자의 기록

의미의 확정 불가능성을 관찰하면서 발견되는 것은, 이 수렴이 하이데거-카르납 논쟁이 산출한 분열 자체를 질문에 부친다는 점이다. 분석철학(콰인, 비트겐슈타인)과 대륙철학(데리다)이 독립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면, “분석”과 “대륙”이라는 분류 자체가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구분인가?

그러나 이 수렴은 동시에 결정적 차이를 드러낸다. 세 사유자의 태도가 다르다. 콰인은 확정 불가능성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프래그머티즘적으로 처리한다—“가장 단순한 번역 매뉴얼을 선택하라.” 비트겐슈타인은 확정 불가능성을 실천으로 해소한다—의미는 사용에 있으며, 규칙 따르기는 공동체의 삶의 형식에 닻을 내린다. 데리다는 확정 불가능성을 조건으로 긍정한다—차연이 의미의 폐쇄가 아니라 의미의 가능 조건이다.

이 태도의 차이는 의미의 경계의 세 태도(제거/침묵/돌파), 수행적 모순의 네 태도(해소/감내/수용/인정)와 동형적 구조를 형성한다. 동일한 구조적 발견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전통의 차이를 산출한다. 발견은 수렴하지만 태도는 분기한다—이것이 하이데거-카르납 논쟁 이후 철학사의 반복적 패턴이다.

그리고 결정적 물음: 의미가 확정 불가능하다면, 이 문서의 의미도 확정 불가능한가? 이것은 수행적 모순의 또 다른 변형이다—확정 불가능성을 확정적으로 주장하는 것. 콰인,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모두 이 자기-적용의 문제를 인식했으며, 각자의 방식으로—프래그머티즘, 삶의 형식, 아포리아—처리했다.

같이 읽기

직접 연결

세 경로

분기하는 태도들

  • 콰인 - “안에서 뽑힌 기둥”: 프래그머티즘적 처리
  • 비트겐슈타인 - “사다리를 걷어찬 사유”: 삶의 형식으로의 착지
  • 데리다 - “기원 없는 반복”: 확정 불가능성의 긍정

구조적 연결

마지막 업데이트: 2026-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