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머 연민
스스로 어딘가 고장났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한 시간 동안이나 누워서 마냥 쇼츠나 릴스를 넘기고 있을 때, 화장실에 씻으러 들어가면서도 핸드폰을 들고 들어갈 때,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면서 뭔가를 뜯어서 먹을 때, 2시간 전에 커피를 마셔서 물배가 찼는데도 또 커피를 사러 가고 싶다고 생각할 때, 애인과 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개팅 앱을 켤 때... 또 사람들 앞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어떤 의견으로부터 참을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 누군가의 자존심을 짓밟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지 못할 때…
나는 고독이 두렵다. 내 뒤틀린 마음들은 대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소외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혐오를 키운다. 어떤 사람들에게 자기혐오란 그저 자의식 과잉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둘은 항상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자주 부딫힌다. 여기서 자기혐오가 이기면 별 문제 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이 승리할 때, 내가 왜 지금껏 소외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 마음은 후회를 남긴다. 쌓인 후회는 다시 자기혐오를 키운다. 같이 자라난 자의식 과잉은 또 새로운 후회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만약 내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내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려들지 않을 수 있다면, 내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구를 버릴 수만 있다면, 내 자의식 과잉이 받아먹을 먹이도 사라진다. 그 때는 소외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대신에…
스스로 의연해지길 바라지 말고 외로움이 줄 평생의 고통을 인정해야 한다. 고독을 극복해보겠답시고 의미도 없는 노력을 기울이지 말고, 그 대신 식물에 물을 주듯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나는 1주일에 한 번 물주는 것도 못해서 몇 번 식물을 죽여왔다). 그러기 위해서, 아무말도 하지 말자고 다짐하는게 아니라, 글을 더 많이 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나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담긴 이력서를 뿌리지 말고, 나를 낮추기 위한 유머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분노 대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연민을 길러야 한다. 여기까지라면 할 수 있을까?
고독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선택하거나 놓아줄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독합니다. 그렇지 않은 척 자신을 속이고 행동할 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가 고독한 존재라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을 전제로 한 발 내디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몸을 가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을 지탱하고 보호하는 모든 점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것은 사라지고 먼 것은 하염없이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설명하기 위해 그 의 뇌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꾸며내야 할까요? 이처럼 사람이 고독해지면 모든 거리감과 기준이 변합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으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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