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미셸 우엘벡
브뤼노는 평생 만족만을 쫓았다. 그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상징한다. 브뤼노는 성 도착증에 가까웠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떨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부 본질적으로 브뤼노와 같다. 맛있는 음식, 따듯한 커피, 차분한 음악, 몸이 개운해지는 루틴... 브뤼노의 욕망처럼 추잡해 보이지 않을 뿐, 육체의 쾌락를 위해서 사는 것은 같다. 주말이면 혓바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맛집과 카페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온 서울이 북적북적하다. 이불 덮고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이제 모두의 행복이 되었다. 브뤼노처럼 사정을 못해서 안달나지는 않았지만, 썸, 자유 연애, 많은 연애 경험과 그에 수반되는 즐거운 섹스는 언제나 권장되는 미덕이다. 먹고, 마시고, 운동하고, 섹스하고...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을 빼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그렇게 쾌락이 거의 전부인 우리 삶이지만, 안타깝게도 그 쾌락들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연애와 섹스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합리주의의 미명 아래 연애/섹스의 자유 경쟁 시대가 열린지도 오래 되었고, 사람들은 그 경쟁에서 도태될까봐 전전긍긍하거나, 혹은 이미 도태되어서 부끄럽고 비참한 감정을 느끼며 산다. 결혼을 통해 '내 사람'을 정해준다는 것은, (마치 사유재산제가 '내 재산'을 보호한다기 보다 '내것이 아닌 재산'을 명확하게 해주는데 더 방점이 찍혀 있다는 루소의 말처럼)매력과 섹스 시장의 강자도 절대 winner takes all 하지 못하게 막아준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 해방과 자유 연애는 이런 보호 장치를 무너뜨렸고, 결국 욕구 불만에 절여진 수많은 브뤼노 주니어를 양산하게 되었다. 브뤼노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동경하고 좌파들의 사민주의가 연애 분야까지 미치지 않은 것을 절망하는 이유도 그의 욕구 불만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입술이 과일 속살 같은 젊은 여자로부터 펠라티오를 받는 것뿐이었어. 디스코텍에는 그런 젊은 여자들이 많았어. 아내가 없는 동안 나는 〈슬로 록〉과 〈지옥〉이라는 디스코텍에 여러 번 갔어. 하지만 그런 젊은 여자들은 나 아닌 다른 남자들과 사귀고 있었고, 내 성기가 아닌 다른 남자들의 성기를 빨고 있었어.
<가정>이나 <살림>같은 아름다운 말들이 시사하듯이, 부부와 가족은 자유주의 사회 내부에서 원시 공산주의의 마지막 섬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성적인 자유는 개인을 시장 원리로부터 지켜주는 그 마지막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자유 연애와 섹스의 해방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2021년을 사는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잘못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꼰대 소리를 들을까봐 솔직하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잘못이 아니지, 그럼 맛있는거 먹지마? 섹스 하지마?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제 없는 합리적인 시스템이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뭐가 문제일까? 왜 행복은 순간이고 언제나 남는것은 고통과 공허 뿐일까? 사람들은 '왜 멍청하게 그런 유혹에 휘말려서 인생이 꼬이는걸 자초하냐'고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둘 중 하나다. 멍청한 결정을 해서 인생이 꼬이거나, 멍청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거나. 후자의 경우, 멍청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만 생긴다면 언제든지 그 결정에 몸을 던질 것이다.
<멋진 신세계>가 오면 우리는 행복할까? 그동안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행복의 노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셸의 이야기가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미셸은 ‘자아/개인을 초월하고자 하는 존재’의 상징이다. 미셸은 우리가 욕망을 아주 손쉽게 만족시킬 수 있고 불행으로부터 아주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죽음에 대한 공포의 지배를 받는 한, 생은 한 번 뿐이고 죽음은 곧 존재의 소멸이라고 믿는 한, 여전히 개인주의와 자유, 자아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만 봐도 중산층 힙스터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힙스터들에게 중요한 것은 취향과 매력을 길러 자아를 비대화 시키는 것 뿐이다. 그들에게는 섹스, 연애, 이데올로기, 정치, 모든 것이 패션이 된다. 그리고 그 힙스터 문화(자아의 비대하게 만들고 또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장하는 것)는 이제 대중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다시금 거울에 비친 형상과 자기가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애써 지워 버려야만 했다. 자아란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신경증이다. 첫번째 구에는 존재와 구별이 있었다. 두번째 구에는 무와 개인의 소멸이 있었다. 그는 주저없이 몸을 돌려 두번째 구를 향해 평온한 마음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이제와 다시 사람들에게 종교적 사후세계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모든 인류에게는 합리주의에 대한 믿음이 뼛속까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셸은 과학을 통해 영생을 이루어낼 수 밖에 없었다. 현실의 우리에게도 신인류는 탄생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이 모양 이 꼴일지도.
- 거의 8년만의 재독인거 같다. 오랜만에 밀도 높고 즐거운 독서를 했다는 느낌이다.
- <멋진 신세계>는 <소립자>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요한 소재인데, <멋진 신세계>에 대한 브뤼노의 생각이 내가 전에 썼던 독후감과 완전히 일치해서 놀라웠다. 전에 <소립자>를 처음 읽었을 때는 <멋진 신세계>를 읽지 않았었기 때문에 몰랐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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