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에게는 영웅이 필요 없다
언제나 현상만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태되지 않으려면, 승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골몰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세상을 마치 게임처럼 해석한다. 세상에는 룰이 존재하고(그 룰은 공정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쟁을 긍정하고,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따위의 개념을 사랑하는 경우도 많게 된다.
좀 더 극단적으로 간다면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 따위의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치고 진짜 '자연의 섭리'가 뭔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못봤지만(알고보면 별로 관심도 없더라) 말이다. 사실 많은 윤리(당위)가 자연(현상)과는 대척점에 서있다. 자연은 인간과 무관하게 원래 있는 것이지만 윤리는 인간으로부터 구성된다. 자연은 무엇이든 허용하지만(아니 애초에 허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윤리는 그렇지 않다. 윤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고, 그래서 가장 근본에 해당하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즉 인간이 억지로 만들어낸 공리 위에서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윤리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윤리 안에서 살고 있고 뼛속 깊이 윤리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다. 혹시 사람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 윤리적 사고가 뭐고, 그게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미 우리 안에 체화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만약 우리가 민주사회의 기본 원칙에 동의한다면(중요한 전제다), 개인의 영달과 과잉되다 못해 넘쳐흐르는 자의식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게임의 룰을 이해한다는, 스포츠의 승자가 된다는, 전쟁의 영웅이 되고 싶다는, 무리를 지키는 숫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룰을 만들기 위한, 패자도 안녕할 수 있기 위한, 애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고민 역시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의무 말이다. 세상을 내 욕망을 실현하는 장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이런 명백한 의무로부터 도망치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전쟁 영웅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전쟁은 반드시 필요한 무대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지길 바라지 않는다. 좋은 세상은 자기가 주연이 될 기회를 박탈하니까.
그러니까 제발 마블 히어로나 일론 머스크(나한테 둘은 같은 결의 캐릭터다)가 되고 싶다는, 꼬추 작은 새끼들의 마초식 소꿉놀이 좀 집어치웠으면 좋겠다. 게임의 승자가 되어 takes all 하고 싶다는 생각도, 도태된 사람들이 자기를 부러워 해주길 바라는 유치한 생각도, 자기가 겨우겨우 이해한 게임의 룰이 무너질까봐, 아무도 자기가 추구하는 경쟁적 가치관을 따라와주지 않을까봐 두려워(그러면 아무도 자길 부러워하지 않을 테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경쟁을, 탁월해지기를, 혁신의 중요성(ㅋㅋㅋㅋㅋㅋㅋㅋㅋ)을 역설하고 다니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이를 먹어서까지 이 세상과 공동체를 구원하는 방식이 고작 '내가 아이언맨 되기'라고 생각하는 놈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바라건대 스스로 시민의 자격과 권리를 박탈하고 투표권 따위도 내려놓은 채(투표는 왜 한담? 마블 영화에서 정치인이 세상 구하는 거 봤어?) 공동체 밖으로 멀리 걸어나가 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