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가장 핵심적인 메세지인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이다’가 내 생각과 너무 똑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불행’이란 안진진이 말하는 ‘삶의 양감’, ‘부피’와 같은 말일 것이며, 아마 <구토>의 로캉탱이 말하는 ‘모험’과 같은 개념일 것이다. 물론 로캉탱은 자신의 삶에서 ‘모험’이 구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범인에 불과한 우리가 ‘양감’, ‘모험’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 부분은 따로 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흔한 말로 옮겨보자면 아마 이런식이 될 것 같은데 ㅋㅋㅋ
하지만 행복과 불행이 모두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광기에 대한 찬양처럼 이야기가 흘러가는게 쪼끔 아쉬웠다.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복을 좋아하니까, 밸런스를 맞추자는 말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불행을 강조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불행을 강조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빠져나오는 낭만적인 냄새가 있기 마련이고, 거기에서 살짝 촌스럽다는 느낌? 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일종의 낭만을 담아 광기를 찬양하는 와중에도, 이야기의 주인공인 안진진의 태도는 어땠는지? 평생을 가정폭력범과 거렁뱅이로 살아온 아빠, 그런 아빠를 포함한 온갖 개고생 조차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는 일류 엄마, 권태를 이기지 못해 자살해버린 이모, 자기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을 담구고 빵에 들어간 안진모에 비하면, 안진진은 그저 가짜 광기, 광기 호소인에 불과하다는 느낌이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이 대사도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es muss sein!” 이잖아 ㅋㅋㅋ) 라고 당차게 외치던 이야기의 시작에 비해, 이어지는 그녀의 시니컬한 태도에 비해, 안진진의 선택은 귀엽기 그지없다. 그녀가 한 것은 그저 김장우냐 나영규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안진진이 여행지에서 김장우와의 사랑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장면 만큼은 정말 좋았다.
나는 그에게 기대어 숲 향 그윽한 오솔길을 걸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중이었다.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한쪽 어깨를 빌려주고 기대는 것, 이것이 사랑일까… (…)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혀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그 무엇으로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 힘이 사랑이라면,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랑의 손을 잡았다.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나, 안진진의 사랑을 상면한 이후 내 기분은 급격히 저조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답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마음자리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서 거기로 가을 찬바람이 쉭쉭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을 만난 다음이 이렇다는 고백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p194-195
그렇게 매혹적이던 광기 조차도 삶의 품 안으로 들어오고 나면 바로 다음 순간에 권태로 변할 준비를 시작한다는 것, 그건 나영규라는 현실을 선택하고 일년 후에 느끼는 후회의 감정과 같다. 그 감정이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선택들이 정반합의 모형을 따라 어떤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믿음이 착각이라는 것, 우리는 고통과 권태의 진자 운동을 따라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좌우로 흔들릴 뿐이라는 것이다.
ps1 근데 읽다 보니 자꾸 머릿속에 mbti가 떠오름…
- 안진진: INTP
- 안진모: ENTP
- 아빠: INTP
- 엄마: ENFP였지만 고생하면서 ESTJ가 됨
- 이모: ENFP인 척하는 INFP
- 이모부: ISTJ
- 김장우: INFP
- 나영규: ESFJ
ps2 시인과 촌장이 소재로 쓰여서 반가웠다.
이 사람들은 왜케 비둘기를 좋아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