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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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이백년 전 출판된 이 로맨스 이야기를 3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잘생기고 돈 많지만 싸가지 없는 남자와 평범한 여자
  • 특별히 가진 것은 없지만 강단이 있던 우리의 여주인공은 자기보다 훨씬 잘난 남자의 싸대기를 갈김
  • 이 때 남자가 "나를 이런식으로 대한 건 니가 처음이야"를 시전하면서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현대에 와서는 지겹도록 반복해서 본 뻔한 이야기를 500 페이지씩이나 넘겨가며 읽어야 한다고! 라며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실은 읽는 내내 현실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동시에 찝찝한 부끄러움이 따라다녔다. 뭐가 부끄럽냐고?

​속물적인 사람이 자기의 속물적 욕망을 미덕으로 포장(유행 지난 '자기계발' 같은 키워드도 훌륭한 포장지가 되어 주었다)하는 위선, 속물적 욕망이 있지만 그걸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조하는 무기력(이제는 힐링이나 소확행 같은 진영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 같다), 속물적이지 않은 자신의 면모가 촌스럽게 느껴져 이를 감추기 위해 더더욱 속물적 가치를 추구하는 척 하는 위악, 나도 이런 모습들이 모두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들을 빈정거려왔고, 나보다 훨씬 재치있는 문장으로 사람들을 비꼬아대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실은 나 자신이 속물적 세계 안에서 적극적으로 살고 있는 모습, 그저 그 안에서 살고 있기만 할 뿐 아니라, 이런 상황이 썩 나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점, 예전에는 속물적 세계를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부끄럽지 않아하는 내가 부끄러운 단계에 이르렀고, 심지어 이런 단계조차도 언제 지나갈지 모른다는 점, 똑같이 살고 있는 주제에 빈정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내가 어딘가 특별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놓지 못하는 점, 보잘것 없는 몇가지 키워드로 위태한 자의식을 지탱하며 살고 있다는 점... 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 이렇게 됐을까?

​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분별있는", "본데 있는", "저속하지 않은" 등등의 표현들이 답답하게 느껴지거나, 어느 측면에서는 역겹다고(속물적 사고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여서)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나라고 그런 단어를 속으로라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식으로 사람들을 구별하는데 더 익숙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콜린스와 가장 닮았다고 느낀다(이 점이 제일 부끄럽다). 나에게는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있과 실제 나의 모습이 있고, 그 갭은 너무나 크다. 그래서 나는 그걸 메꾸기 위한 방법으로 자꾸만 '말하기'로 무언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선택을 한다. 그럴듯한 생각을 드러내고, 재치있는 표현을 사용하고, 일천한 미사여구를 어떻게든 총 동원해서 나의 신분을 높이려 애를 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에 다가가는데 '말하기'만큼 효과적이지 못한 방법도 없다. 오히려 '말'을 할 수록 내가 원하는 나에게서 멀어져만 가는데, 알면서도 멈추기는 어렵다. 콜린스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찐따였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싫어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남보다 똑독한 사람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야.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면, 자신의 재능에 박차를 가할 수도 있고, 재치를 발휘할 기회를 잡을 수도 있잖아. 끊임없이 독설을 퍼붓는 사람은 끝까지 맞는 소리 한마디 못 할 수 있지만, 줄기차게 조롱을 퍼붓는 사람은 이따금 재치 있는 소리 한마디쯤은 할 수 있거든. p302

그래서 이 작품이 더 좋은 소설로 느껴진다. 로맨스적인 측면이야 얼마나 현실적인지 잘 모르겠지만(확실히 재미는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들의 진짜 선택을 보여준다. 등장 인물 중 누구도 뫼르소나 싱클레어나 요조(고전 소설 주인공 3대장) 처럼 극단적으로 고민하거나 방황하지도 않는다. 실은 나도 안다. 내 고민이 그렇게 심각하거나, 내가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래서 베넷 부인을 속물적이라며 욕하는 것도, 리지에게 자의식 과잉이라며 빈정대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어차피 우리 중 누구도 속물적 행복을 거부할 수도, 나에게 어딘가 개성이 있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만과 편견
영국 펭귄북스 수석디자이너 코랄리 빅포드 스미스의 특별한 표지로 제작된 한정판. 자신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에서 제인 오스틴은 이제껏 나왔던 로맨스 스토리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가장 유쾌한 성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