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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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집이 불탔을 때, 동생보다 박제된 나비를 먼저 걱정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비디오 아트를 통해서만 보며, 방 안의 조화들에게 꾸준히 물을 준다. 'C'는 절정의 순간에 상대방의 목숨을 끊어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고 그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해봐야 여전히 지루할 뿐이다. 하물며 삶은 어떤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들에게 휴식을 권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아마 '나'의 다음 고객은 'C'가 될 것이다.

그날 나는 대학로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세 남녀가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친척이고 나머지 한 남자는 한 남자의 친구이다. 여자는 햄버거 가게의 여급이고 두 남자는 건달이다. 셋은 도박판에서 딴 돈으로 차를 빌려 여행을 떠난다. 짐 자무시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이다. 영화는 단 한번도 등장 인물을 클로즈업 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관객들은 지루해하고 관객들 못지 않게 배우들 역시 지루해 한다. 그들의 생활이란 따분하기 그지 없는 것이어서 그들의 일탈이란 고작 도박이거나 여행 정도이다. 도박을 해봐야 다시 도박으로 날려버리고 여행을 떠나봐야 어디든 거기가 거기다. “여기가 호수야.” 여자는 호수를 가리키지만 클리블랜드 호수는 얼어있고 게다가 폭설이 내리고 있다. 아무거도 보이지 않는다. 멀리 왔는데도 달라진게 없다고 남자는 투덜거린다. 그 영화엔 그 흔한 연애나 섹스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앞부분을 뒷 부분에 갖다 붙여 놓아도 관객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p56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을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 것도 변한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 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