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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밀라의 바람(결혼, 여름): 알베르 까뮈

제밀라의 바람(결혼, 여름): 알베르 까뮈
결혼.여름
결혼은 알베르 카뮈가 1939년에 집필한 서정적 에세이. 지드의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의 섬과 더불어 프랑스 지적 산문집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렇다. 나는 현존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놀라운 느낌을 갖게하는 것은 내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 왜냐하면 한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현존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더 이상 아무것도 미래에 대하여 기대할 것이란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p26
포기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서 미래라든가 더 잘 되고 싶다든가 출세라든가 하는 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마음의 진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p27

'한 걸음 더 나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 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가슴에 와닿는다. 바로 내가 아무리 인간으로서의 '현존'을 깨닫는다고 해도 '미래'니 '출세'니 '마음의 진보'니 하는 온갖 '훗날에'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이든 그렇지 않든, 어쨌거나 그게(포기하지 않는 것) 가능한 '현존'이 있을까? 까뮈 본인은? 역시나 전혀 믿을 수가 없다. 그는 이렇게나 탁월한 저작물을 이렇게나 많이, 무슨 이유로 남겼을까? 왜 고집스러운 원칙을 본인의 삶에 적용하려고 할까? 모든 것이 바로 '훗날에' 때문이다. 죽음을 초월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훗날에'라는 것 역시, 수영, 바람, 달고 시원한 과일이나 욕정 따위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서 나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고 오직 내가 가진 것은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p30

내가 죽음에 대해 아무리 되뇌여도 내 주변의 무대장치는 잠깐 흐릿해질 뿐이다. 생명의 불씨가, 희망이 남아있는 한 무대장치는 무너지지 않는다. 죽음은 죽어서만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있는 한 '훗날에'를 거부할 수 없는 이유다.


이 점에서 볼 때 병보다 더 타기할 것은 없다. 그것은 죽음을 치유하는 약이다. 병은 죽음에 대한 수련인데 그 수련의 첫 단계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 약한 연민의 감정이다. 사람이란 송두리째 죽어버리게 마련이라는 확신을 기피하려는 인간의 그 엄청난 노력을 병은 도와준다. p29

병이 죽음에 대한 수련임을 말하면서도 '타기할 것'이라니? 반대 아니던가? 죽음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흔한 요인이 바로 병 아니던가. 병이 우리와 가까이 있을 수록 우리는 우리 주변의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것을 (공의 순간이 없이도)직접 체험한다. 생명에 대한 원초적인 갈망이 솟아난다. 병은 죽음을 치유하는 약이 아니라 유사 죽음이다.


(...) 그러면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는 삶에 대한 질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 사람들, 꽃과 여자에 대한 욕망이 살과 피로 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을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질투를 느끼는 것이다. p30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무대장치에도 불구하고, 죽는다. 남들은 이렇게 말한다. "네 병이 낫거든..." 그런데 죽는다. (...) 내가 세계에서 멀어져감에 따라, 그리고 영원히 지속하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에 집착을 가짐에 따라, 나는 죽음을 더욱 무서워하게 된다. 또렷이 의식하는 죽음을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곧 나와 세계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좁히는 것이며 영원히 잃어버린 한 세계의 열광적인 이미지들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기쁨도 없이 완성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p31

행복한 엔딩이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질 때, 화창한 날씨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 때, 술자리의 시끌벅적한 소리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어질 때, 나의 슬픔이라는 것도 일정 부분 무언가에 대한 질투로 구성되어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도대체 어디에 질투를 느낀다는 걸까? 잘 모르겠다. 영원? 불멸? 아름다움? 궁극적인 삶의 의미? 실은 있지도 않은 세상의 모든 고귀한 것으로부터 내가 소외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 때, 나의 괴팍한 휴머니즘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것이다. 여러분도 나와 같구나, 여러분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내가 여러분께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