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사에서의 결혼(결혼, 여름): 알베르 까뮈
우리는 사랑과 욕정을 만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우리는 교훈을 찾는 것도 아니요, 위대해지는 데 필요하다는 그 어떤 쓰디쓴 철학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태양과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14p
욕정이야 배고픔과 같으니 그렇다 쳐도, 사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은 사랑의 어떤 부분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도 절대 도망칠 수 없지만, 어떤 부분은 스스로가 기꺼운 마음으로 만들어 나가는 배역이기도 하다. 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따듯한 양양의 바다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뛰어노는 모습을, 너무나 행복해서 가슴마저 아련한 그 모습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구태여 신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딱한 사람들이다. 여기서는 신들이 잠자리가 되고 하루 해의 흐름 속에서 그 눈금 노릇을 한다. "여기에 붉은 것이, 푸른 것이, 초록빛 나는 것이 있구나. 이것은 바다, 산, 꽃들이구나."라고 나는 쓰고 읽는다. 코밑에다 유향나무 열매들을 으스러뜨려 문지르는 것이 이토록 좋다고 말하면 될 것을 구태어 디오니소스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 그런 신 따위는 나중에 자유스럽게 생각하리라. 본다는 것, 이 땅 위에서 본다는 것, 아 이 교훈을 어찌 잊겠는가? p16-17
'지금 여기 있는 것'이외의 모든 것이 헛되다면, 내가 '여기 있는 것'에게 느끼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연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목적 없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바다가 나를 감싸준다고, 태양이 우리를 사랑해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날씨 아래에서 행복을 만끽하던 나를, 태양은 자기의 뜨거움으로 사랑해주고 있는 것일까? 행복과 경이로움을 제공하는 자연에게 감동하는 일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신께 감사를 올리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태양은 사랑 받을 필요도, 사랑을 줄 필요도 없다. 태양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와 합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같은 반푼이 존재만이 사랑을 필요로 한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도저히 알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정말 신화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인간이 신화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작은 일에도 쉽사리 감동해버리는 젊은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온갖 향락으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행복을 떠안은 사람은 반드시 고마워해야 할 무언가를 찾는다. 그 어떤 존재에게 영광을 돌리려 한다. 그것은 끝없는 고통속에서 원망할 누군가를 찾거나, 이런 고통에도 어딘가 의미있는 구석이 있을 것이라고 되뇌이는 불쌍한 사람의 마음과 같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영광과 원망을 받아주어야 할 왕좌에는 누구도 앉아있지 않다. 아마 이것이 바로 우리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지독한 농담의 시작점일 것이다.
배우들이 자기 역을 잘 해냈다고 의식할 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기의 몸짓과, 자기가 분한 이상적인 인물의 몸짓을 잘 일치시키고, 사전에 만들어놓은 그림 속으로 문득 뛰어들어가서 바로 자신의 심장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생동하게 만들었다는 의식을 가질 때 그들이 느끼는 특수한 감정이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바로 그 감정, 내가 나의 역을 잘 해냈다는 그 느낌이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p21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그의 단순성 속에서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력에 차고 멋을 아는 한 종족, 바닷가에 우뚝 서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적 전체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식과 그것을 사랑으로 삼는 자부심이 내게 있으므로. p22
인간으로서의 역, 위대함, 활력, 멋 그리고 그로부터 따라오는 자부심... 모든 단어와 표현들이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치유를 원하는 모자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나도 그렇다. 나이를 먹을 수록 자유라는 저주로부터의 치유는 간절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티파사에서의 결혼을 꿈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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