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알베르 까뮈
공의 매혹
그 날도 분명히 잘 살고 있던 하루였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세상 전체가 나에게서 멀어졌다. 꼭 공간이 왜곡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구겨지는 공간 끄트머리에, 알 수 없는 공허한 감정과 이상한 우울들이 따라왔다. 이런 이상한 순간들은 생각보다 자주 반복되었다.
'현타온다' 같은 말로 이런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낮은 해상도로 내 감정을 뭉개버린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당시에 나에게는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줄 섬세함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다 벌써 10년도 더 전 쯤에, <이방인>에 이어 <시지프 신화>로 까뮈를 접하면서 나는 완전히 매혹되어버렸다. 평소에 내 안에서 그냥 흘러가버리던 묘한 생각과 감정들이 분명한 언어로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때의 희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p28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p29
그리하여 이 언덕들, 다사로운 하늘, 이 나무들의 윤곽이 지금까지 우리가 부여해왔던 허망한 의미를 단숨에 잃어버리고서 이제부터는 잃어버린 낙원보다도 더 먼 존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p30
섬세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냉정하면서도 굳건해보이는 '반항'이라는 해결책은 어린 나를 놀라게 했고, 그 뒤로도 나를 '실존주의'라는 단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깔짝거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재밌게 본 책들이야 많았지만, 그 와중에도 <시지프 신화>는 내 모든 마음과 언어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까뮈의 해결책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의 문제의식에 200%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지금까지도 '부조리의 추론'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테마이고, 그래서 <시지프 신화>를 정말 좋아하지만, 이제 이 책의 절반을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지금부터 '반항'에 이르는 논리적 귀결에 대한 내 생각을 써보려고 한다.
사실로 당위 만들기
갈릴레이는 죽기 싫어서 과학적으로 진실이 아닌 천동설에 찬성했다. 까뮈는 그걸 보고 '과학적 진실이 목숨을 걸 만큼의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부조리의 운명은 어떨까?
종이에 점을 3개 찍고 이 점 사이를 선으로 이으면 삼각형이 된다. 3개의 점 중 하나만 없어져도 삼각형은 삼각형이 아니게 된다. 명백한 진실이다. 그러나 이 명백한 진실이 '삼각형의 점 3개 중 하나도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당위로 연결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명증성을 요구하는 인간, 침묵하는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부조리로 이루어진 삼각형 역시도, 감탄스러울 정도로 탁월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정확한 묘사가 다시금 '자살은 명백히 존재하는 명증성에의 요구를 지워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에 기권이고 도피이며 그래서는 안 된다'라는 당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나 어떤 정교한 지식이 삶의 의미(혹은 무의미)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때, 인간에게는 그 정교함이 오히려 교묘함으로 다가온다. 스스로가 어떤 '논리적 귀결'에 이르렀다는 착각으로 말이다. 이는 까뮈 스스로도, 본인이 좋아하는 니체도 똑같이 말했듯,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비롯한 온갖 과학적 지식/진실들이 삶의 의미가 되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신앙인이 신으로 도피하듯이 과학자나 무신론자는 진리로 도피한다)과 정확히 같은 원리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에서 엄격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에 만족해하는 노동자들이 있다고 해서, 이것이 전체로서의 과학이 오늘날 하나의 목표, 하나의 의지, 하나의 이상, 커다란 믿음에 대한 정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과학은 이상 상실 자체의 불안이며, 위대한 사랑의 결여에서 오는 고통이며, 본의 아닌 만족 상태에 대한 불만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3논문 23절
치유를 위한 반항
그렇다면 까뮈는 왜 이런 자가당착에 빠졌을까? 바보라서? 그럴리가 없다. 내 생각에 이유는 단순할 것 같다. 바로 '치유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가 키에르케고르에게 했던 말 그대로, 그러나 본인 역시도 '치유를 원하는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가 부조리의 정신의 최종 모습에 대해, 온갖 영웅적인 수사를 범벅해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재라는 이름의 지옥, 이것은 마침내 그의 왕국일 수밖에 없다. (...) 이제 죽을 것인가, 비약을 통해서 문제를 모면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들의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부조리의 비통하도고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나갈 것인가? (...) 이때 육체, 사랑, 창조, 행동, 인간적 고귀함은 어처구니 없는 세계 안에서 그들의 자리를 재발견할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거기서 부조리라는 술과 무관심이라는 빵을 되찾을 것이며 그것을 자양분으로 하여 그의 위대함을 키워갈것이다. p81
이에 대해 까뮈가 도피를 권했다면서 비판했던 선배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자기 지배, 이런 견고성, 믿음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인 이런 안심입명 따위는 대개가 거의 동화와 종이 한 장의 간격을 두고 경계선을 접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동화와 다름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서, 그런 전체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곧 무다. 이 자기는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자신의 자기로 발전시키고, 자기 자신으로 있는 그 사실에 절망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향락하려고 하고, 또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명장으로서의 소질과, 시인으로서의 소질을 명예로 삼으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도서출판 치우, p147-148
오히려 인생 전체에 대해 반항하고 인생 전체를 적대시하여, 그 가시를 지닌 자기 자신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뇌를 자랑으로 삼아가며, 그 가시를 보존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것을, 특히나 이 경우에 있어서는 하느님에게는 일체가 가능하다는 부조리의 도움을 받아서 구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것을 그가 절대로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어던 다른 자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그래야만 할 경우에 이르면, 다른 자의 도움을 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온갖 지옥의 고통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이려고 한다. p151
그렇다. 바로 '시인'이다. 까뮈는 시인이 되어 '불굴의 영웅'이 가진 '미학'과 '멋'을 시로 표현해 치유받고 싶었던 것이다. 명증성을 원하는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특히 나는 이제까지 이 '반항의 멋'으로 부터 많은 감동을 받아왔다). 시는 곧 서사를 뜻한다. 그래서 인간이 세계에게 명증성을 요구한다는 말은, 곧 우리 삶에 서사를 내놓으라는, 인간이 서사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몸이라는 뜻이 된다.
물론 부조리의 정신 안에는 '우리 삶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조리의 정신을 삶의 태도로 삼는 순간 '나는 부조리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캐릭터, 스타일, 개성)', '무의미한 삶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서사를 써버리게 된다. 그래서 까뮈의 수사가 (가슴이 웅장해지는)문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나 교묘한 심리 트릭인지!
그래서 나는 무의미와 마주한다는 것은 곧 무의미를 도피한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인간이 자신의 무의미를, 공허를, 서사 없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자기에 관한 시를 쓰고(이 글처럼), 스스로를 드라마 속으로 던진다. 심지어는 그 드라마가 아무리 클리셰로 범벅된 4류 5류짜리 싸구려라도 말이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둬 봐라, 책 없이. 그러면 우리는 곧 혼란에 빠질 것이고 길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합류해야 할지도,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도,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하는지도, 무엇을 존경해야 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 우리는 사산아들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아버지들로부터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한 취향을 발전시키고 있다. 곧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관념으로부터 태어나는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p197
시지프 안녕
이렇게,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보고자 원하되 밤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장님인 시지프는 지금도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p188
이 문장을 얼마나 다시 봤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멋있었다. 하지만 지금에야... '정신승리 하지 말라'는 잔인한 말로 시지프를 깎아 내리기에는, 아직 마음이 약해져서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오랫동안 내 옆에서 내 삶과 생각의 근거가 되어준 시지프와 그의 바위에게, 진심으로 존중을 담은 안녕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