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장 폴 사르트르
부제: 영웅 로캉탱의 가슴 뜨거운 대모험
작년 여름에는 경남 함안엘 놀러갔었다. 조용한 기차를 타고 연꽃밭으로 둘러싸인 숙소에 도착했다. 낮에는 수영도 하고 맥주도 마시며 즐겁게 보냈다. 그러나 너무 외진곳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항상 그랬듯이 문제는 해가 지고 나타났다. 시커먼 하늘 아래 커다란 연잎 뒤로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만 스산할 때, 가장 가까운 가로등 불빛도 희미할 때(서울에서는 종종 눈이 아플 정도였는데), 환상에 가까운 진실이 드러난다. 개구리가 비웃는다. 가로등의 주황색 빛도 조롱한다. 나는 무서워서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함께 앉아있었다. 해가 지고나면 이런 풍경은 삶의 의미라기보다 오히려 도피처가 된다. 나는 다급하게 친한 사람들과 어깨 동무를 했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우주를 향해 의기양양한 척 말했다. ‘내 삶은 의미로 충만해, 나는 만족해!’ 마치 우주가 우리의 언어를 이해해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 뿐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이게 내 구토의 경험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의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나타나고,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지만, 결코 연역될 수 없다. 난 이점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의 원인이 되는 필연적 존재를 꾸며냄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어떤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우연성은 가장이나 흩트려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며, 따라서 완전한 무상이다. 모든 것이 무상적이다. 이 공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간혹 이 사실을 알아채게 되는데, 그러면 속이 뒤집어지고, 저번 저녁에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그랬듯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구토다. p306
정말 명료한 설명이다.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왜 '속이 뒤집어졌'을까? 공허는 공허고 덩어리는 덩어리일 뿐일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들은 로캉탱으로 하여금 구토를 하게 만들까? 사실 나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 나는 내 주변의 공간이 쪼그라들때마다 화가 나고 우울했는지? 다행히 로캉탱은 답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가, 그리고 내가 '모험'을 원했기 때문이다.
내게는 잘 의식하지 못한 채로 다른 무엇보다도 집착했던 어떤 것이 있었다. (...) 그러니까 나는 어떤 순간들에 나의 삶은 희귀하고도 귀중한 특질을 지닐 수 있다고 상상했었다. (...) 나의 현재의 삶에는 대단한 것이라곤 전혀 없다. 하지만 이따금, 예를 들어 카페에서 음악이 연주될 때, 나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예전에 런던에서, 메크네스에서, 도쿄에서 나도 멋진 순간들을 맛보았다고, 나도 몇 가지 모험을 겪었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10년 동안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왔음을 방금 명확한 이유 없이 불현듯 깨달았다. 모험은 책 안에 있다. 물론 책에서 얘기하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책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내가 그토록 강하게 집착했던 것, 그것은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이었다. P95
그러니까 구토란, 나만의 ‘모험’과 ‘서사’와 ‘의미’를 허용하지 않는 우주에 대한 분노이고, 내가 가질 수도 없고 될 수도 없는 어떤 고귀한 것, 영원한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질투이다. 한마디로 손에 든게 변변찮은 자의식 과잉들의 발작 증세라는 뜻이다. 그러나 너무 빈정대고 싶지는 않다. 약간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누구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예컨대 박물관에서의 ‘병사’)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혹시라도 로캉탱이 같잖았다면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그를 통해 본인의 자의식과 욕망을 엿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슷한 말을 다시 로캉탱에게 되돌려줄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것이 그냥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부 무용하다고 말한다면, 그 깨달음 역시 무용하다. 그 진리를 알았다고 해서 어떤 삶의 태도를 ‘연역적’으로 구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본인이 말했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설사 사람들이 부조리를, 실존을, 권리 없음을,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진흙 취급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아니 친절하게 대해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 점에서 만큼은 모두가 같은 처지잖아. 어쩌면 그래서 소설 마지막에 와서야,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로부터 구원받겠다’는 결론을 내렸는지도 모르겠다(솔직히 갑자기 개어이없었음 여태까지 동네 사람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고 다니고, 독학자한테 극딜 박을때는 언제고 갑자기 소설을 써서 구원받겠다고?).
(…) 사르트르는 이런 시각에서 구토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구토>에는 인간 존재가 구토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방법과 ‘진정하지 못한’ 또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힌 방법들이 그려진다. p425
‘진정한’ 방법이라니... 아무리 진리가 절대적인 무상성이라고 해도 인간은 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주가 인간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적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을 살 수는 없다. 결국 수행할 배역과 관객이 되어줄 다른 인간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모험’이나 ‘완벽한 시간’같은 의도적인 연극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만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통한 구원이라는 것도, 직업이 주는 배역 덕분에 자기라는 사람의 '쓸모'로 도망치는 의사, ‘의무’를 수행하고 ‘권리’를 요구한다는 도덕적 배역을 선택한 초상화 속의 사람들, 휴머니즘의 낙원으로 향하는 영광스러운 고행길을 걷는 순례자라는 배역을 맡은 독학자가 사는 방법과 정확히 같다.
그래서 ‘진정한’ 방법 같은 것은 없다. 오직 ‘인간적인’ 방법이 있을 뿐...
추신 1
“(...) 선생님의 가장 하찮은 행동 가운데에도 무한히 영웅적인 것이 들어 있단 말입니다!"
"디저트는 뭘 드실래요?" 웨이트리스가 묻는다.
"치즈요." 나는 영웅적으로 주문한다. p283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카페에서 혼자 ㅈㄴ 웃음
추신 2
불쌍한 로캉탱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If you close the door, the night could last forever
Leave the sunshine out and say hello to never
All the people are dancing, and they're having such fun
I wish it could happen to me
But if you close the door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If you close the door, the night could last forever
Leave the wineglass out and drink a toast to never
Oh, someday, I know someone will look into my eyes
And say, "Hello, you're my very special one"
But if you close the door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Dark party bars, shiny Cadillac cars
And the people on subways and trains
Looking gray in the rain as they stand disarrayed
Oh, but people look well in the dark
And if you close the door, the night could last forever
Leave the sunshine out and say hello to never
All the people are dancing, and they're having such fun
I wish it could happen to me
'Cause if you close the door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once more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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