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쇠얀 키에르케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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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쇠얀 키에르케고어

후... 끝났다... 내가 여태껏 읽었던 책 중에 제일 어려웠다...

절망의 개념

우선 절망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만 최대한 개념을 이해해보려고 한다.

인간은 어떤 대립하는 두 개념(유한/무한, 자유/필연 등)과 나, 그리고 이 셋을 이어주는 관계인 ‘자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셋을 이어주는 관계인 ‘자기’는 타자(신? 세계?)에 의해서 설정된 것이다. 다시 읽어봐도 이해가 어려워 그림을 그려봤다.

이 중 자기와 타자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엇갈림’이 바로 절망이다. 그럼 엇갈림은 또 무엇인가? 책에서는 “엇갈림은 바로 이것이다!” 하고 정의를 내려주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우선 나는 이 엇갈림을, 사르트르나 까뮈 등이 말한 ‘부조리’의 개념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절망이 부조리라면, 자기라는 개념도 ‘자의식’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사회 속에서 남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비치는지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자의식(이런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무대장치를, 우리가 연기하는 이 배역을, 그리고 그 순간 무너지는 세계를, 그 엇갈림을 인식하는 자의식을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전체적인 느낌을 비슷하게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몇 가지 구절 때문이기도 하다.

엇갈림이 계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엇갈림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자기에게 관계하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29p
절망의 현실적인 순간은 모두가 가능성으로 환원되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 절망하는 모든 순간에 있어서 스스로 절망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29-30p
인생이라는 극장의 온갖 효과를 위해서 그들을 효과 있게 쓰면서도, 결코 군중에게 이 축복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있는 이 비참, ... 52p
아아, 그러나 어느 날엔가 시계가, 인간세계의 시계가 다 돌아버리는 때가 오면, ... 이런 온갖 것들이 어떤 것이었던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53-54p

즉, 세계가 나에게 주는 의미라고는 죽음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 속에서, 있지도 않은 세계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를(내가 존재하는 목적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바로 엇갈림이고 절망이라고 이해했다.

조금이라도 더 익숙한 단어로 치환하고 나니 그나마 이해가 쉬워지는(혹은 오해가 쌓여가는 ㅜ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더 정확한 개념을 잡아주기 위해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 ㅜㅜ

절망의 양상(과 그에 따른 반성)

절망의 보편성과 형태를 설명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감탄스러웠던 점은, 스스로도 극히 드물다고 하는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절망’과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의 심리 상태를 매우 자세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관찰력이 좋은 것인지 추론 능력이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자세하고 잘된 설명 때문에 코너에 몰린 기분을 느꼈는데, 마치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넓게 펼쳐놓고, 걸리면 사정없이 뚜드려 패는 무자비한 인간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부끄럽지만 지금부터 내가 뚜드려 맞았던 장면들을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절망

읽을 땐 몰랐는데 책을 덮고 나니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항목이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내 삶의 제1 목표가 ‘행복(쾌)’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되뇌어 왔으나, 그 와중에도 이끌리듯 행복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자리를 깔고 앉아버렸다. 사실 내가 의식적으로나마 부정하던 쾌는 일부에 불과했다. 나는 내 일을, 내 사랑을, 거기서 오는 쾌를, 의심해본 적은 있으나 탈출하려는 시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내 삶이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 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한성의 절망’이나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곳 저곳 밑줄을 그으며 낄낄대는 내 모습은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밖에서 공공연히 부조리와 자유를 외칠 때, 정작 나 자신은 그 외침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

앞이 나와 같은 대중에 대한 쓴소리였다면, 이 항목은 철학자들 간의 대결처럼 느껴졌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후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하게 될 주장을 수십 년 전에 어떻게 미리 알고 반박을 달다니,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내 경우에는, 그 후배들에게 많은 부분 마음을 뺏긴 입장에서도, 한때 추구했거나(수동적) 현재 추구하고 있는(능동적) 태도가 이 절망의 태도였다는 입장에서도 흥미진진했다.

… 이런 자기 지배, 이런 견고성, 믿음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인 이런 안심입명 따위는 대게 거의 동화와 종이 한 장의 간격을 두고 경계선을 접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동화나 다름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서, 그런 전체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곧 무다. 이 자기는 자신을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자신의 자기로, 발전시키고 자기 자신으로 있는 그 사실에 절망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향락하려고 하고, 또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자기를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명장으로서의 소질과, 시인으로서의 소질을 명예로 삼으려고 한다. 147-148p
“싫다. 나는 삭제되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반박하는 증인으로서, 네가 극히 졸렬한 저술가라는 증인으로서 머물러 있겠다.” 158p

WOW... 자유 의지만으로 본인의 삶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미학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든지, 고통을 끝까지 짊어지려는 태도가 악마적인 반항심일 뿐이라든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아닌가?! 내가 조심스럽게나마 삶의 목표로 정했던 원칙들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키에르케고어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항목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부분에서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례들이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마 내 명치 깊은 곳을 때리는 키에르케고어에게 나도 모르게 반발했던 것 같다. 그래서 좀 변호를 하고 싶어졌으나, 자기 삶을 근심하지도 못하면서 ‘냉담하고 고상한체 하는’ 의견으로 반박하는 것은 키에르케고어가 말한 ‘건덕적’인 것에 위배되는 일이기도 하다. 많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책을 읽은 김에 다음 항목에서 내 의견을 써보려고 한다.

절망의 해소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자 모든 문제의 마지막 귀결인 하느님이라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은 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신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책의 반쪽만 이야기하는 꼴 일지도 모르겠으나, 종교인이 아닌 내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부조리라는 답 없는 운명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살하거나, 운명에 반항하여 인간적인 의지로 인간적인 삶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물론 이 반항이라는 개념이 사상누각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사상누각 그 이상이 될 수는 없다. 만일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탄탄한 기초위에 확고하게 세울 수 있는 무엇이라면, 애초에 부조리라는 개념의 존재 자체가 성립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기에 키에르케고어는 부조리라는 말 대신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고, 신앙을 통한 구원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내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정말로 신이 절망에서 우리를 꺼내줄까? 역시 나에게는 의미 없는 질문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만 가지고는 부조리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즉, 적어도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선 안에서는, 인간의 절망은 해소 불가능하다.

까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것이요 따라서 초인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 ‘따라서’라는 말은 지나친 것이다. 여기에는 논리적 확실성은 조금도 없다. 실험적 개연성 또한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실제로 나의 척도를 초월한다는 한 가지 사실 뿐이다.
의식적인 인간의 형이상학적 상태인 부조리는 신에게로 인도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부조리란 신 없이 존재하는 죄다’라는 굉장한 말을 감히 해본다면 아마도 이 개념은 보다 명백해질 것이다.

후기

한 페이지 넘기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 책도 없었던 거 같다. 그러나 이번 독서는 어려운 책도 충분히 사람을 빨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신선한 경험이었다. 속부터 배배 꼬인 이 아저씨는, 비록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모두 맘에 든 건 아니었지만, (글만 보면)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비록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살면서 문득문득 느껴지는 엇갈림에 절망해본 사람이라면 이 음습하고 시니컬한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발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분 중에, 절망의 상황에서 신앙을 통한 구원을 경험해 본 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 경험으로 삶이(혹은 삶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도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