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
진리를 부수려는 겸손한 마음
니체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절대적 진리가 있고 그걸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부수고 '우리의 진리 중에 가치평가, 믿음이 들어가있지 않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책을 더 쉽게 읽기 위해서 먼저 '이 작가가 좋아하는게 뭐지?'를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런면에서 공감이 잘 됐다.
지금까지의 모든 위대한 철학의 정체가 내게는 차츰 명료해졌다. 즉 그것은 그 철학의 창시자가 말하는 자기 고백이며, 원하지 않은채 자기도 모르게 씌여진 일종의 수기인 것이다. (...) 그것은(그 철학자는) 어떤 도덕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가? 따라서 나는 '인식 충동'이 철학의 아버지라고 믿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충동이, 평상시처럼 여기에서 단지 도구처럼 인식에 종사해왔다고 믿는다. (...) 왜냐하면 모든 충동은 지배욕에 차 있고, 또 지배자로서 철학적 사유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6절
또 심지어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창조'의 실마리일 것이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싶어한다. 즉 가장 잘못된 판단이 우리에게는 가장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논리적 허구의 승인 없이는, 순수하게 고안된 절대자, 자기 동일자의 세계에 기준해서 현실을 측정하지 않고는, 수에 의해 세계를 부단히 위조하지 않고는 인간은 살 수 없을 것이다. 잘못된 판단을 포기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삶을 부정하는 것이리리라.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방식으로 습관화된 가치 감정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을 감행하는 철학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과 악의 저편에 서 있게 된다. 4절
니체는 '창조'를 '철학적 신념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라며 가슴이 웅장해지도록 말을 했지만, 나는 '그런 창조'에서 어떤 무력감을 느낀다. 내가 세계와 영원히 분리되어 있을 것이라는 절망 말이다. 어쩌면 니체도 처음에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는 이런식으로 자꾸만 쪼그라드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더욱 태양 앞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 아닐까? 하지만 이상하게 '영원회귀와 그에 따른 운명애'라는 말 조차도... 나는 자꾸만 슬플 정도로 겸손한 태도라는 느낌이 든다.
(...)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사로잡혀 매번 또다시 새롭게 동일한 순환 궤도를 달린다. 그들은 여전히 비판적이거나 체계적인 의지 때문에 서로 독립적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들 안에 있는 그 무엇이 그들을 이끌어가고, 그 무엇, 즉 바로 저 개념들의 생득적인 체계와 유사성이 그것을 일정한 질서 속으로 차례로 몰아간다. 사실 그들의 사유는 발견이 아니며, 오히려 재인식이고 재기억이며, 언젠가 저 개념들이 발생한 먼 태곳적 용혼의 총체적인 세대로 회귀하는 것이며 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일종의 최고 수준의 격세 유전이다. 20절
그래서 1장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똑똑하면서도 겸손한 모습이 멋졌다. 심지어는 1장을 읽는 동안은 '아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싫은거지 니체가 싫은게 아니었네?'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2장을 읽으면서 그 마음이 박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해체는 좋아하지만 초인은 싫어한다.
환상을 세우려는 건방진 마음
그런데 그의 진리에 대한 분석이 어떻게 힘에의 의지, 자유정신, 고귀함, 초인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질 수 있을까...?
(...) 아직 모든 유기적인 기능이 자기 조절, 동화, 영양 섭취, 배설, 신진대사 등과 종합적으로 상호 결합되어 있는 충동적 생을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생명의 초기 형태가 아닌가? 결국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이는 방법의 양심에서 주어진다. (...) 또 근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이란 단지 인과성 자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일 뿐이라면, 우리는 의지의 인과성을 유일한 인과성으로 가정하는 시도를 해야만 한다. 36절
여기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그 근거를 생각해서 감상적인 허약함을 배격해야만 한다. 생명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좀더 약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침해하고 제압하고 억압하는 것이며 냉혹한 것이고, 자기 자신의 형식을 강요하며 동화시키는 것이며,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 해도 적어도 착취이다. (...) '착취'란 부패된 사회나 불완전한 원시적인 사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기체의 근본 기능으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한다. 이것은 생명 의지이기도 한 본래의 힘에의 의지의 결과이다. 이것이 이론으로는 혁신이라 할지라도 현실로는 모든 역사의 근원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할 정도로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것이다! 259절
내 눈에 이것은... 그냥 논증할 가치가 없는 전형적인 자연주의 오류로 보인다. 물론 앞에서 실컷 "윤리 명제를 연역적으로 도출(발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도덕 역시 연역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안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귀함이 '왜 고귀한지' 설명이 지나치게 부족하다. 고귀함에 대한 설명은 자연주의 오류를 제외하면 그저 추상적인 단어들과 감수성들을 열거할(묘사) 뿐이다.
왜 그랬을까? 물론 다른 모든 도덕이 전부 그렇듯, 니체의 도덕 역시 믿음과 가치 부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건 니체 뿐 아니라 해체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어려움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세상의 기둥을 다 부숴놨으니, 이제 자기 집을 지으려고 할 때 남아있는 기둥이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근거 있는 믿음의 근거에는 근거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니체는 '근거 없는 믿음'에 대해 처음으로(맞나?) 이야기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입장에서 '근거 있는 믿음'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최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게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근데 비트겐슈타인 같은 사람은 니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동질감 느꼈으려나?)
또, 니체는 고귀함에 대해서 '대중적 편견'을 꽤나 많이 차용한 것 같다. 본인이 다른 철학자들을 공격했듯이 말이다. 니체는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이 대중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반복해서 말하는 정직, 용기, 대담함, 대인배스러움, 강직함 같은 고귀함의 속성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높은 가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혹은 본인이 좋아하는 카이사르나 나폴레옹 같은 인물에 대해 대중들이 실제로 박한 평가를 내렸을지? (혹시 당시에는 아니었을까? 역사에 대해 아는바는 없지만 왠지 그때도 그랬을거 같은 느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왜 천박함을 버리고 고귀함을, 노예도덕을 버리고 주인도덕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설득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결국 아주 통속적인 "내가 봤을 때 적당히 말이 되면서도 끌리는 쪽으로 믿자"라는 생각 외에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을 두고 "나는 그저 힘에의 의지를 따라 주인도덕이라는 세계관을 창조하고 지배욕을 채우기 위해 이용할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할말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버리는 순간 반대편(기존 도덕)의 사람들을 그렇게 가열차게 비난했던 것도 힘을 잃게 된다. 그들도 그저 힘에의 의지를 따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선악 너머'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이 환상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여러가지 환상 중에서 내 정동이 이끄는 것을 골라잡을 수 밖에 없는거라면, '선악의 저편'을 알고 모르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차이를 만들어주는지 전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철학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겨서 지배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면 말이다. 결국 니체가 말하는 천민들도 그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연민의 도덕', '무리의 도덕'을 골라잡았고, 그에 따라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몇천년에 걸쳐 꾸준히 승리해온 강자다...
그리고 니체는 이 점(그들이 강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나는 니체 본인의 방법론에 따라, 그의 정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아마 '멍청한 놈들이 자기에게 훈계하는게 같잖고, 자기를 우러러 봐주지 않는 것이 억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좀 더 막 말해보자면 "좆밥새끼가 1:1로 싸우면 내가 걍 바를거 같은데 비겁하게 몰려와서 다구리치네" 같은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을 찬양하고 무리를 싫어하는 것은 사실상 1:1 대결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고양되고 높은 수준의 정신'이란 1:1 대결에서 이길 수 있는 상태를 포함한다. 1:1에서 이기지 못하는 약자가 무리를 지어서 이기는 것은 비겁한 것,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마음 말이다. 그러나 권력 투쟁은 스포츠가 아니다. 이기면 장땡이고 아무리 짱쎈 사람도 다굴 앞엔 장사없다.
못 이기니까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패배를 인정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패잔병의 열등감을 내제화 했다. 남을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질투하지 말고, 분노하지 말라고 하지만, 본인의 글은 누구보다 화가 나있고, 천한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바쁘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실에 못마땅해 한다. 스스로를 반기독교, 반플라톤으로 정의하면서도 성경을 패러디하거나, 철인 통치 느낌의 제도('철학자에 의한 통치'는 꼭 플라톤이 말한 것 같다)를 만들고 싶어하는 부분을 보면 이런 류의 열등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을 어디에서 붙잡아야만 할까? 그것은 새로운 철학자들을 향해 희망을 거는 것이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인간에게 인간의 미래를 자신의 의지로 만들 것을,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며, 훈육과 육성이라는 위대한 모험과 총체적인 시도를 준비하는 것, (...) 이를 위해 언젠가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자와 명령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며 그 모습에서 보면, 일찍이 지상에서 감추어진 무섭고 호의적인 정신으로 있었던 모든 것은 창백하고 왜소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떠다니는 것은 그러한 지도자의 모습이다. 203절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지배하는 도덕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즉 힘에의 의지를 공동체 차원에서 발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볼 때 니체에게 주인도덕이나 힘에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면, 그는 민주주의를 좋아해야 한다. 실제로 그는 역량과 생각이 비슷한 귀족들이 뭉쳐 조직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침해, 폭력, 착취를 서로 억제하고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것, 이것은 만일 그 조건이 주어진다면(말하자면 각 개인의 역량과 가치 척도가 실제로 유사하고, 그들이 같은 조직체에 소속되어 있다면), 어떤 개략적인 의미에서 각 개인 간의 선량한 풍습이 될 수 있다. 25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멍청한 사람들이 어떤 권한도 갖게 놔두기 싫은 것이다. '거리의 파토스'라는 말에는 이런 마음이 노골적으로 들어가 있다. 세상이 진리가 아니라 정동들의 투쟁일 뿐이라면 멍청한 사람에게 권한을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의 정동은 '인류가 자기 극복을 할 수 있게 되는 세상, 초인들의 사회를 만들기'가 아니라, '구별짓기를 위한 구별짓기'를 향해 노골적으로 달려간다. 내가 볼 때 니체는 구별만 지을 수 있으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나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의 '가치가 높은 이유는 단순히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바로 그 목적이 소수와 다수를 구별짓는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 '악'이라는 속성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내 맘에는 안들지만). 하지만 어쨌거나 '고귀함'의 구체적 모습과 존재 근거, '자기 극복'의 대상과 당위에 대해 설명해야 그에 따른 '구별짓기'의 당위도 설득할 수 있다. 구별짓는 것(승자가 되어 지배하는 것)을 제외하면 고귀함과 자기 극복으로 뭘 하겠다는 걸까? 이에 대해,
모험심, 만용, 복수욕, 교활함, 약탈욕, 지배욕 같은 어떤 강력하고 위험한 충동들은, 그것이 지금까지는 공공에 유용하다는 의미에서 존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육성되고 배양되어야만 했는데(왜냐하면 사회 전체가 위험에 빠져 있을 때, 전체의 적에 대해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 충동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위험성은 두 배로 강하게 느끼게 되고, 점차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 찍혀 비난의 대상이 된다. 201절
이라는데...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부적으로 노예도덕을 수용한 국가가 전쟁시 적국에게 돌변하여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내가 틈만 나면 전쟁을 강조하며 "X, Y, Z 같은 것들은 전시 상황에서는 하등 쓸모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외는 알파메일 호소인 집단을 떠올렸다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전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탁월하고 고고한 정신'의 소유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물리적 폭력에 대해 집단의 보호 없이, 스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니체의 맹수 찬양은 마치 전교 1등이면서 동시에 학교짱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정신적, 철학적 탁월함의 발전은 도덕과 문명의 역사와 함께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실제로 역대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 예술가들은 도덕적으로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기 작업에 집중해 왔다. 이걸 원하는 건가? 구별짓기에 성공한 지배 계급이 물리적 안전과 번영을 착취하는 제도 말이다(나는 여기서도 기독교의 십일조나 플라톤의 죽기 직전까지 공부만 하는 철학자가 떠오른다).
(...) 그러나 훌륭하고 건강한 귀족 체제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귀족체제가 스스로 그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왕권이나 공동체의 의미나 최고의 변명으로 느낀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스스로를 위해 불완전한 인간이나 노예, 도구로까지 억압당하고 약해져야만 하는 무수히 많은 인간의 희생을 양심의 가책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 제도의 근본 신념은 사회가 사회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선택된 종류의 인간 존재를 좀더 차원이 높은 과제로, 대체로 보다 높은 존재로 고양될 수 있는 토대나 발판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258절
맞는거 같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홍상수 영화의 단골인 '본인이 가진 예술적 감수성으로 이쁜 여자에게 어떻게든 섹스어필하려드는 예술가들'이 떠올랐다. 경건한 마음을 강조하며 속세를 멀리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결국의 기존의 속세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니 누구보다 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내 삶으로 가져오기
그러나, 내 글을 이렇게나 길게 쓴 것 자체가 이미 니체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의할 때는 동료로서, 반대할 때는 적으로서 그를 곁에 두고 내 생각을 다듬어 나가니까 말이다. 혹시 일부러 이렇게 열받게 썼나? 충분히 의심해볼만 하다... 열받게 만들어서 내면의 공격성을 끄집어 낼 기획이었다면... 어쨌거나 '점점 고양되어가는 정신'이란 아마도 이런걸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이런식의 대화가 좋다. 그렇다는 것은, '자기 경멸'이나 '자기 극복'도, '고귀함' 어쩌구 혹은 '거리의 파토스'도 내 안의 정동으로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도 그 정동 만큼은 초인이 되고 싶은 셈이다. 그의 주장을 (많이...)깎아서 보자면 나는 이런 것들을 선호한다.
- 내 연인이 주체적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 내 직장 동료가 일을 잘했으면 좋겠고, 더 잘하고 싶어했으면 좋겠다.
- 물고기를 주는 것 보다 물고기를 잡는법을 알려주는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 예술이 도덕에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현상을 이야기하는데 앵무새처럼 당위에만 집착하는 사고방식(혹은 그 반대)를 선호하지 않는다.
-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내 의견을 평가받고 싶다.
- 내가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만 인정받고 싶다.
내 눈에는 이런 것들이 그럭저럭 현대에서도 인정 받을 수 있는 위버맨쉬적인 감수성이라고 느껴진다. 다만 도덕과 공동체를 부수려들지만 않는다면, 노골적으로 약자를 천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이게 너무 중요해 보여서 문제지만). 그러나... 왜? 왜 저런 탁월함을 추구하지? 왜 탁월한 것이 더 좋은 것이지? 현대의 감수성으로도 답변하기는 여전히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인류의 진보'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별개로 2023년에 와서 신과 도덕을 때리는 것은 나에게 별로 흥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해왔고(변하고 있고), 우리가 스스로 합의한 것이 곧 도덕이고 법이라는 사실에 동의 안 할 사람이 있을지? 이제는 한 물 가서 이미 다 죽은 '꼰대'를 또 패겠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 이런 면에서 니체를 자기계발적인 느낌으로 소비하는 사람이 아주 많은 것도 내게는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자극적인 것, 이미 지난 이야기를 다 빼면 남는건,
- 내 의미 창조하기 (보통은 '진짜 나 찾기' 같은 느낌의 사회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나는 쪽으로 해석됨)
- 탁월함 추구 (보통은 직업적인 탁월함으로 해석됨)
- 목표(의미)를 위한 자기 규율 (보통은 직업이나 사업 등으로 공동체에 기여도 하고 나도 꽤나 많은 돈이나 명예를 얻는 쪽으로 해석됨)
정도이지 않을까? 상당히 자본주의 친화적인 느낌이 나는데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겠다고는 하지만, 개인이 사회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푸코도 읽은 마당에), 니체의 경쟁적 투쟁적인 가치관은 자유시장과 잘 어울린다. 아마 니체는 부자는 싫어했을지는 몰라도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은 좋아했을 듯.
후 모르겠다... 하여간에... 책 한권 읽는데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게 만드는 것도 니체가 유일한 것 같다. 그래서 할말도 많아지는 것 같고... 내 업다운의 증거를 첨부하면서 엄청나게 길어진 글도 고만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