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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 서문: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니체 철학의 정수가 담긴 중요한 철학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 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만은 실은 것으로, 자유정신이라는 니체의 핵심 사상이 담겨있...
그래서 나는 일찍이 내게 필요했던 ‘자유정신들’을 창안해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의 이 우울하고 용감한 책은 바로 그 자유정신들에게 바친것이다 : 하지만 이 자유정신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언젠가는 이런 자유정신이 존재할 수 있고, 내일과 모레의 아들 중에서 이처럼 명랑하고 용감한 친구가 우리 유럽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과 내 경우에서처럼, 환영과 은둔자의 그림자 연극이 아니라 육체를 지니고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리라는 사실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 벌써 그들이 오는 모습이, 서서히, 서서히 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들이 어떤 운명들 속에서 탄생하고 어떤 길로 오는지를 통찰하여 미리 묘사한다면, 아마도 그들이 오는 시간을 앞당기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이 생각해낸 이른바 ‘자유정신’이 현재에도 없고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다. 단순히 존재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도 본인의 뜻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듯. 그래서 미래의 언젠가는 이런 자유정신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본인의 저작이 거기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 말로 바로 위 인용 직전에서 말한,

삶은 기만을 원한다. 삶은 기만을 통해 유지된다…

를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라는 느낌이다.

단계

니체가 서문에서 말한 자유정신에 눈을 뜨고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단계를 요약해 보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내가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기존의 모든 가치를 버린다.
  2. 자유를 만끽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3. 내가 있었던 자리(주변)으로 다시 돌아와 감사함을 느낀다.
  4. 비로소 미덕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미덕의 주인이 된다.

일단 나는 이런 프레임워크식 성장 스토리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무슨 소년만화 감성 같달까? 본인은 저 단계를 밟아보고 하는 말일까? 당연히 아니겠지, 본인이 아직 ‘자유정신’을 가진 사람이 육체를 가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설사 모든 단계를 밟아보고 하는 말이라고 쳐도, 각 단계를 묘사하는 내용은 철학적이라기 보다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로 유토피아를 찬미하는 시에 가까워,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뭐 그런가 보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있는게 없다.

그러다 보니, 극복이 불가능한 문제를 놓고 온갖 영웅적 수사를 떡칠해서 마치 우리(혹은 충분히 훌륭한 선별된 사람)가 닿을 수 있는 문제(혹은 경지)처럼 만들려고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 짜증이 난다. 성경을 쓰는 작업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니체가 자유정신을 기다리는 마음이 예수가 재림하길 바라는 신앙인들의 마음과 다를게 뭔지? 이게 당시 세상에서의 기독교가 가지는 위계를 내리고 대신 ‘나의 신’의 위계를 올리는 작업이라면 이해는 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모시는 신의 이름이 ‘자유’라고 해서 내가 ‘자유정신’을 얻었다고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