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죽는 상상
이거 읽고 씀
나는 가끔씩 부모가 죽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런 역겨운 상상을 처음으로 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꽤나 오래전부터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 상상의 내용이란 이를테면 이따위였다.
나와 친한 사람들 혹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찾아온다, 상주가 된 내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엄숙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짧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나를 가엾게 여긴다, 어깨를 두드린다, 위로의 말도 건넨다, 나는 울음을 참는다, 정말 참기 어려울 때는 조금 삐져 나오기도 한다, 등등…
나는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 말투까지 구체적으로 그려보며, 천천히 음미한다. 물론 바로 다음 순간,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찾아온다. 나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행복했던 시절과 그걸 부러트려 얻는 비극을 음미하는 역겨운 인간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붕 떠 있는 스스로를 땅바닥에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연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버리는 교활하고 추잡한 인간이다. 늘상 이런 식이다.
만약 커다란 슬픔마저도 음미할 수 있다면, 그 말은 곧 행복을 멀리하고 싶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슬픔도 행복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이고, 그래서 모두가 가치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나에게 이 땅에 발 붙어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면에서는 행복과 같은 역할을 하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슬픔 덕분에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는 말도 가능하게 된다.
어쨌거나 우리에겐 비극이 필요하다. ‘신파’가 싫다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그 말은 촌스러운 연출이 지겹다는 말일 뿐,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조차도 자기가 연출하는 신파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아니면 ‘무모하고 멍청했던 어린 시절을 웃으면서 추억하는 것’ 같은 멋(?)도 여기서 말하는 ‘슬픔’이나 ‘신파’의 열화 버전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와닿을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가 "아니 나는 행복하고만 싶은데, 니가 이상한 새끼인게 아니냐?”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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