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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id it my way

‘나 답다’는건 뭘까? 나름의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소위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대로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정의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을만 할 것 같다. 하지만 또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런저런 질문들이 떠오르게 된다. 과연 ‘내 안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내 안의 목소리’는 정말 내 안에서 나오는 걸까? 또 심지어는, 그 ‘내 안의 목소리’가 진짜 내 안에서 나온다고 쳐도, 그 목소리를 만드는 최초의 원천 역시 내 안에 있는 걸까?

나에겐 저런 질문 중 어떤 것에도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게 없다. 아니, 실은 누구도 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단순히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을 넘어서, 내 지식, 생각들, 소비하는 취향,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심지어는 삶의 목표까지… 모든 것이 남들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대학가서 취업하고 결혼해서 애 낳는게 남들의 삶이라고, 그런 규격에 맞춘 삶은 거부하겠다는 사람들은 정말 많지만, 그런 애들은 꼭 힙합을 하겠다고 한다.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겠다며 이런저런 패션, 인테리어 제품, 서비스들을 열심히 모으고 소비하는 사람도 정말 많은데, 사실 그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이라는것도 잡지에서, 인테리어 쇼핑몰에서, 패션 룩북에서 다 봤던 것들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 취향을 발전시켜 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세본적은 없어도 음악 장르의 수가 (당연히)인구 수보다는 적을 것이다. 마이너한 장르를 좋아해도 나랑 비슷한 사람들은 정말 많을 것이고, 꼭 장르 리스너가 아니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작곡한 음악 중에 내 맘에 드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철저히 소비자의 입장인 것이다. 또, 사람들이 자기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룹별로 집계해 본다면 몇 가지가 나올까? 얼마나 다양할까?

‘나만의 것’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구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위한다기 보다는 기존 대다수를 차지하고, 기성품처럼 찍혀 나오는 주류 라이프스타일을 거부하겠다는 반항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주류에서 이탈하고 나서 혼자가 되는게 아니라, 주류보다 조금 더 작은 ‘마이너 그룹’에 속하게 되고 그 사실에 안도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지오다노를 사는 사람이 되기는 싫지만 칼하트를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은 괜찮은 것이다.

결국 ‘내 목소리’라는 것 자체가 원래부터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있는 수 많은 ‘목소리’들 중 맘에드는 것을 고르는 꼴라주인 셈이 된다. 보통 그런걸 ‘목소리 듣기’라고 하지는 않는다. 나를 가슴 벅차오르게 하는 꿈이라는 것도, 이미 누군가 예전부터 연출해 왔고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먹혔던 시나리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참 재미있다.


한 번 더, ‘나 답다’는게 뭘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지음으로서 스스로 개성을 얻는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전에 말했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유일할 수 없고, 대신 가슴에 특정 집단의 이름표을 붙이고 다니게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수는 전체 인구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수 집단으로 한정한다면, 어쩌면 나도 유니크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나랑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은 전 세계에 엄청나게 많지만,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나 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은 일반적인 ‘개성’이라는 말의 실체는 대부분 이런식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정보의 불균형이 있고, 각자가 아는 세계의 영역과 넓이는 모두 다르다. 내 라이프스타일이 내 친구의 ‘세계’ 안에 없던 라이프스타일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내가 엄청나게 새롭고 개성있는 사람처럼 비춰질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사실 나는 대기업 A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을 뿐인데, 여기서는 그게 개성이 되고 나를 유일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물론 내심 알고 있다. 내 친구는 모르겠지만 밖에 나가면 나 같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고 심지어는 나보다 더 나 같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들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개성은 그래서 배역, 롤플레잉이다. 마치 연극 ‘햄릿’이 전 세계에서 공연중이고 ‘햄릿’을 연기하는 수많은 배우가 있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햄릿’ 배우 김땡땡씨는 지금 공연을 보러온 100명의 관중 앞에서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 100명 중에서 다른 나라의 더 뛰어난 햄릿을 보고 온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초조한 마음을 가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