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중에 휴식을 기다리며
3주 전 쯤 퇴사했다. 지쳤다는 느낌 때문이다. 아마 작년 9월 즈음, 사무실이 판교로 바뀌었을 때부터였을까? 다래끼가 반복적으로 나고 입술과 코 주변이 헐었다. 순조롭게 치료중이던 불안장애의 증상이 다시 나타났다(심하지는 않았다). 피로가 쌓이고 한숨이 나왔다.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잘한 일은 자축하고 못한 일은 반성했지만, 모름지기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면 칭찬도 마음 편히 들을 수가 없는 법이다. 자책만 남았다.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자책은 필수다. 나도 나의 성장을 위해 이 회사를 선택했었다. 아니 이제까지의 나의 커리어가 대부분 그랬다. 그동안 조금씩 다음 단계를 밟아왔지만 이 회사를 나가면서 8년차에 접어들었던 전진도 같이 멈췄다.
아무튼 3주가 지났다. 잘 쉬고 있었나? 다행히 지금은 어디가 헐지는 않는다. 목과 어깨는 여전히 찌부둥하다. 가끔 잠을 잘 못자고 한 낮에도 불안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마음이 이완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즐겁지도 않다.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인들을 놀리기 위해서 즐거운 척은 많이 했다.
참 이상한 게, 그동안의 스케쥴이라고 해봤자
- 일주일에 2-3번 운동
- 월요일에 글 발행
- 화요일에 영어 스터디 (딱히 준비할 거 없음)
뿐인데… 나머지 시간은 이사 준비와 함께 전혀 할 필요도 없고 생산적이지도 않은 일들로 채우고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다는 느낌이다.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 할 일이 없어도 늦게 일어나면 자책을 하게 되는건 마찬가지다. 매일 점심 저녁을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내일을 생각하며 잘 시간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게임도 유튜브도 책 읽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며칠 여행도 귀찮고 평일 낮에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도 귀찮다. 어차피 들어가 앉고나서 잠시 뿐, 곧 그냥 집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하게 된다. 주말이 늘어났지만 기쁨은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퇴사하면서 막연히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일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요새의 좋은 날씨와 5월 부터 속초에 가서 산다는 것 뿐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자발적 노예라는 <피로사회>식 해석이 내 안에도 깊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까? 최근에 경과가 좋아 항불안제를 줄인 탓일까? 서울이 너무 정신 없기 때문일까? 회사 다닐 때와 같은 집에 살기 때문일까?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운동을 게을리해서?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했나? 다음 취직이 걱정되나? 내 커리어가 여전히 불투명해서? 결국 돈이 없어서 그런가? 뭐 하나 와닿지가 않으니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유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버리고 대신 두려움이 싹을 틔운다. 내가 어떤 목표를 이뤄 좋은일이 생겼다고 해도 그게 내 삶과 마음을 크게 바꾸지 못하는 것 처럼,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해 나쁜일을 없앴다고 해도 역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두렵다… 텅 빈 마음과 거기에 따라오는 불안들… 당장이라도 모래처럼 부숴지고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내가 만들어왔던 모든 것, 내 주변 사람들,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이런 마음이 해소되지 못하고 이렇게 켜켜이 쌓이기만 하는 거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작하자마자 주전자를 올려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는데 왠지 울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