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안 밟는 삶
행복과 진리는 삶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다. 누구는 행복을 위해 누구는 진리를 위해 살겠지만, 그리고 각자의 행복과 각자의 진리가 있겠지만, 행복과 진리라는 두 기둥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행복은 고통의 제거와 욕망의 충족으로 이루어진다. 욕망의 충족이라는 것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소위 1세계에서는 주로 자기 삶에 관련한 시를 쓰는 것으로, 이미 쓰여있는 시를 삶에 적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진리는 뭘까?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다. 어떤 면에서는 욕망 충족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원하는 대상 속에 ‘나’가 없다. 내가 느끼는 감각, 내가 출현하는 이야기를 꿈꾸는 욕망과는 차이가 있다.
둘다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삶의 의미와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행복이 가치있다면 진리도 가치있는 것이고, 행복이 가치없다면 진리 역시 마찬가지로 가치가 없게 된다.
물론 진리 중에 어떤 것은 ‘삶의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 같은, ‘삶의 의미’를 깊숙하게 다루는 명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명제 자체가 다시 삶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어떻게 ‘삶의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 만약, 이 둘 사이에 어떤 논리적 연관성이 있는것처럼 말하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청자를 속이는 것이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속이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염세적인 태도는 어딘가 도움이 될까? 확실하지는 않아도 아마 아닐 것이다. 긍정적인 태도가 여기저기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에 비하면 염세적인 태도는 참 쓸모가 없다. 물론 ‘도움’이나 ‘쓸모’ 같은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염세주의긴 하다. 다행히 내적 완결성은 있다고 해야하나?
어쨌거나 나는 왜 쓸모도 없는 염세적인 태도를 계속해서 견지하려고 하는가? 그것이 진실이라서? 맞다. 나는 염세적인 세계관이 진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진리를 좋아한다. 가능한 진리를 모른 척 하고 싶지 않고 진리와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우리가 아는대로 행동해야 하는가? 정직해야 한다(삶과 진리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윤리는 어디서 왔는가? 왜 나는 그 윤리를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진리를 추종하고 진리대로 살고 싶다는 내 의지는 사실, 당위라기 보다는 단순한 미학적 판단에 불과하다.
진리 그 자체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과학이 그동안 수많은 우주의 비밀을 밝혀냈지만, 그 비밀들을 삶의 의미와 연관 지을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즉, 내 염세주의라는 것은, 기껏해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것과 별로 다를것도 없는 맥락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음악을 취향껏 듣는 것은 당연하게도 아무 문제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가치가 있는 일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보도블럭이 깔린 길을 걷다가, 묘하게 블럭 사이의 금을 안 밟고 걷고 싶은 욕망을 느껴본적이 있을까? 흥미있는 일이지만 그 뿐이다. 내 삶을 어떤 신념이나 철학의 틀 안에서 실현하겠다는 마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