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그동안 (이 책을 포함해서)실존주의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자주 수학자 힐베르트와 괴델의 이야기를 생각했었다. 수학에 완전한 형식과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힐베르트 프로그램'과 그 바램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버린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말이다. 메타수학 명제 문제를 풀지 못해 수학에서 완전성이나 무모순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수학자들의 모습이, 인간의 본질을 알고 싶다는 메타인간(이런말은 없겠지만ㅋㅋㅋ) 문제를 풀지 못하고 결국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결론을 내려버린 실존주의st 철학자들의 모습과 (비유적으로)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사르트르와 나빌의 토론이 나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마치 힐베르트-괴델(사르트르)이 현실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공대생(나빌)을 붙잡고 싸우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는 둘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말이다.
힐베르트와 괴델은 수학의 확고한 토대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싸웠고, 그 싸움은 결국 괴델의 승리로 끝났다. 이제 수학은 더 이상 확실한 무언가가 아니게 됐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수학을 이용한 현실의 문제 해결도 같이 의미 없는 일이 되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수학이 확고한 토대 위에 있던지 말던지, 그 수학 위에서 만들어낸 자동차는 잘만 굴러가고 스마트폰도 잘 작동한다. 우리는 끝도 없이 건물을 짓고 하늘로 비행기를 날린다. 만약 괴델이 “내가 수학은 ‘확실한 무언가’가 아님을 밝혀냈으니, 이제부터 다른 모든 공학적 응용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우스꽝스럽기가 짝이없다. 인류는 늘 그랬던 것 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 어떤 "목적"이 존재한다고 계속 외쳐가면서, 근본없는 수학 위에 새로운 정리를 쌓고, 동시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다. 사실상 수학의 근본 유무와 수학의 응용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본질이 있던지 말던지, 존재가 앞서던지 말던지, 인간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이상 현실 공동체의 문제는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해결할 수 밖에 없다. 누가 막으려고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세계가 아무리 우주와 유리되어 있다 한들, 그 사실이 인간들끼리 만들어놓은 문명을 위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개인은 죽음 앞에 무력하지만, 공동체는 계속 살아서 나아간다는 말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정적주의니 신자유주의니 급진사회주의를(그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유도한다는 말은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인간의 무상성은 그 어떤 현실의 ‘OO주의'로도 유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규칙을 먼저 어긴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실존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존주의는 아마도 인간의 무상성을 현실의 ‘OO주의’로 연결시키려는 최초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빌이 실존주의자들을 두고 차라리 자연주의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꽤나 정확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지향’이나 ‘책임’ 같은 개념은 인간의 무인과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인간에게 지향이 있다면 그리고 그 지향이 인간에게 너무나 중요한 개념이라면, 오히려 인간에게 우주가 부여한 본질 따윈 없다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 역시 그만큼 사라지게 된다. 본질이 있거나 말거나 나는 ‘지향’할텐데 굳이 왜? ‘책임’도 마찬가지다. 실존이라는 척박한 토양 위에서 ‘책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자라날 수 있을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유 속에 던져졌다는 말은 세계에 윤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뜻과 같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책임’이라는 윤리적 개념을 꺼낼 수가 있을까? 사르트르는 중간에 이런 말도 하는데,
"자기기만적으로 스스로를 선택해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는 그런 사람을 도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으나 그들의 자기 기만을 오류로 규정한다고 답변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진리에 대한 평가를 모면할 수는 없다. 자기기만은 앙가주망이라는 전적인 자유를 은폐하기 때문에 허위적인 것은 분명하다.
본인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도덕적 평가로 읽힌다. '그것은 오류이다'와 '인간의 삶에서 오류를 일으켜서는 안된다'를 구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사르트르가 알아낸 것은 그저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는 것 하나 뿐이다. 수학의 기초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밝혔던 괴델처럼 말이다. 그 밖의 나머지는 사르트르로서는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관심도 없는 일이다(없어야 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무인과는 우주와 인간 사이의 무인과를 뜻한다. 나빌이 말하는 인과율은 문명이라는 무대 위에서 인간들 사이의 인과를 뜻한다. 둘은 공존할 수 있다. 정확히는 커버하는 영역이 다르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나빌이 사르트르에게 자꾸만 입장을 밝히라고 하는 것도 답답했다. 우주와 인간 사이에 무인과를 알아냈다고 해서, 인간들 사이의 인과율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관조적으로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없어야 한다). 비겁하게 느껴져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럼 그냥 아예 인간의 무상성이라는 개념과 연결짓지 말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시민 1의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사르트르의 주장은 아주 평이해 보인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은 없으며 무상 속에 던져진 인간은 그저 선택할 뿐이라는 말, 스스로를 선택함으로써 보편적인 인간을 선택한다는 말은 그냥 민주주의, 다원주의 원칙 그 자체 아닌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다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보자면, 현실 차원에서 실존주의를 그냥 자유주의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크게 들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현실 경험에 비추어볼때,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자주 구조의 문제를 은폐한다. 나빌이 듣기에 맘에 안 들만도 하겠다 싶은 생각이다. 실제로 ‘모든 책임은 전부 개인에게 있고 거기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같은 말은 현대의 감수성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것은 또한 사실이기도 하다. 윽 헷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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