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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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비판부터

일단 맘에 안 들었던 이야기부터 하려고 한다.

​철학자와 물리학자의 공통점은 욕심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하나의 이론으로 (그리고 기왕이면 내 이론으로) 모든 우주를 설명하려고 한다. 뭐, 너무 똑똑해서 인류를 대표하는 천재 자리에까지 앉는 사람들이니 넘치는 자신감도 이해할 수 있고 실제로도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대의 인간(혹은 인류 자체)을 뛰어넘는 작업을 하려다 보니 종종 무리수를 두는 것도 사실이다.

가치 전도의 일반화

“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제우스는 아이기스토스가 한 일을 두고 ‘어리석은 짓’이라 말한다. 그것은 왜 어리석은가? 아이기스토스는 그저 강자의 본능대로 건강한 공격성을 보이고 지배자의 행동을 취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행동을 어리석다고 말한다면, 어떤 공격성은 ‘좋음’이고 어떤 공격성은 ‘나쁨’이라는 말인데, 그 둘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만약 그 기준이 결국 ‘도덕’이 될 수밖에 없다면, 선악의 구분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원한의 도덕에 길든 사람들이라며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기준이 어떤 탁월한 ’이기심’이라고 한다면, 이 주장에는 최소한 자기 일관성은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현대의 모든 지배 사상을 잊고 차분히 생각해보자. 만약 원한의 도덕이 없었다면 과연 강자들의 공격적, 폭력적 행동에 지금처럼 ‘악’이 라는 딱지가 붙지 않았을까? 우리가 고통을 받는 약자를 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왜일까? 우리 자신도 그 약자와 같은 무능력자이기 때문일까? 내가 강자였다면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을까? 내가 강자였다면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적 행동을 막아서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막으려고 했다면, 그것도 역시 내가 원한에 도덕에게 길들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이기심 만큼이나 이타심도 인간의 본래적 감정이라고 확신한다. 아무리 냉철하게 나를 살펴보아도, 나보다 약한 자에 대한 연민, 내가 아닌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알 수 없는 반발심(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폭력인데!)이 세뇌, 최면, 길들여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강자들은 약자에 무관심하고 감정이입 능력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오히려 이타심과 공감 능력 또한 강자의 조건이라고 말한다면, 강자를 타락시킨다며 대노한 니체에게 귀싸대기를 맞을까? 아무튼, 선악 개념과 가치 전도가 모두 약자의 원한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지나친 일반화이다.

금욕적 이상의 일반화

니체는 금욕적 이상을 두고 '삶을 긍정할 능력(탁월함)이 없는 자가 삶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모순적 상태'라고 했다. 즉, 밖으로 발산해야 할 힘에의 의지를 내부로 돌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욕적 이상은 언제나 ‘탁월하지 못함’만을 나타낼까? 니체가 말하길, 철학자들은 금욕적 이상을 탁월함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서만(선악에 얽매이지 않고)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니체가 생각하는 힘에의 의지의 발산과 동물적 생존 본능을 긍정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금욕적인 존재보다 약자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참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식사 시간이 짜증 났던 적은 없는가? 내 하루의 스케줄은 그날에도 몇 번씩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계속해서 조정된다. 심지어 맛없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불쾌함이 당분간의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또 어떠한가?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사람을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돌아가는 눈을 느끼면서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탄식이 나오지는 않았는가? 아 그리고, 혹시 오늘도 잠 때문에 하루를 망치지는 않았는지?

​본능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고약한 운명이다. 도대체가 그놈은 때와 장소도 없이 사사건건 내 삶에 훼방을 놓는다. 떨쳐낼 방법도 없다. 그런데 내 목적의 '장애물'로서의 본능보다 더욱 싫은 것은, 바로 그때마다 내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기분과, 삶이 주는 맛있는 음식, 육감적인 몸매, 따듯한 이불 속에 굴종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달콤한 열매를 받아먹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따라서 본능으로부터 내 삶을 되찾기 위하여, 내가 다시 나의 주인으로 군림하기 위하여 금욕을 실천하는 것은 약자의 그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이유로서의 금욕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살기 위한 삶을 사는, 그 생존 본능의 탁월함만을 찾는 인간을 더 이상 강자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금욕적 이상에 관한) 여전히 중요한 이야기

이것저것 별로였던 이야기들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사실 니체가 말하려는 핵심과는 거리가 먼 부수적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지나치게 하나의 현상으로만 환원하려고 하는 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그 부분을 뺀다면 솔직히 좋은 부분이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금욕적 이상에 관한 이야기가 좋았는데, 읽으면서 지금의 시대는 많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2017년에도 금욕적 이상에 관한 니체의 탄식과 분노가 여전히 유효할까?

요즘엔 어떨까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사실상 무신론이 승리해가고 있다고 봐도 보일 정도로 신의 권위는 약해졌(지고있)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현대에 가까워질 수록 사람들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심지어 이제는 종교인들이 본인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조심스러워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런 경향을 따라서, 종교적 '원죄'의 의미도 대체로 공감받기 어려운 주제가 되지 않았나 한다.

​종교 밖에서는 어떨까? 영화 <굿 윌 헌팅>의 중요한 장면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It's not your fault.

게다가 요즘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도 불과 몇 년 전의 자계서 열풍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결론: 응 괜찮아)>,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걸까?(결론: 응 정상이야)> 같은 제목을 가진 책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려고 하고 있다. 모든 것이 금욕적 이상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그럼 다 잘된건가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대로, 이제 드디어 무신론의 시대가 왔고, 현대의 인류는 금욕적 이상을 버리고 삶을 긍정하기 시작한 걸까? 그래서 ‘좋음’을 추구하고 ‘나쁨’을 버리는 시대로 진입한 것일까?

​금욕적 이상에 관해서라면, 그렇다. 물론 아직도 순결이나 조신한 행동거지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만, 그들은 새 세대에 의해 순식간에 촌스럽거나 순진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대체로 우리는 욕구나 본능을 긍정하고 그것을 마냥 절제하기만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좋음', 즉 '탁월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관해서라면, 아니다. 니체가 지적한 가치 전도된 도덕이나 금욕적 이상의 문제점은 인간이 '탁월함' 대신 뒤틀린 위로를 선택했다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 현대는 어떤가? 사실 지금의 사람들은 지긋지긋하고 엄격하기만 한 금욕적 이상이 주는 위로 대신 '다 괜찮아'라는 위로를 선택했을 따름이다. 니체는 금욕적 이상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지금의 것이 150년 전의 금욕적 이상에 비해 훨씬 더 탁월한(묘한 곳에서 탁월하다) 발명이다. 이 위로는 금욕적 이상이 그랬듯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기는커녕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냥 지금 그대로도 괜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위로’가 엄청난 발전을 한 것에 비해 진실, 앎, 좋은 것, 탁월한 것의 발전 양상은 여전히 초라하기 짝이 없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위로는 진실을 덮으려는 의지 때문에 발전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둘의 관계는, 언제나 기울기가 음수인 함수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는 자기부정과 원한 속에서 위로를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 나름의 발전이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탁월함보다는 위로를 더 원한다. 나를 포함한 꽤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의 복지 국가들을 지상낙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니체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어쩌라고

사실... 비슷한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한 적이 있지만, 정말 단 한 번도 좋은 반응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그냥 잘살고 있는 사람한테 갑자기 너는 나약하다느니, 거짓 속에서 살고 있다느니 (물론 이렇게 심한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ㅜㅜ) 이딴 소리를 해대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아마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속으로는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연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 걸까? 우리는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산처럼 쌓인 위로의 더미를 헤치고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모르겠다”. 마지막을 이렇게 맥빠지는 소리로 맺고 싶지는 않은데 어쩔 수가 없다. ‘요즘 같은 자유주의 시대에 다른 사람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게 말이 되냐’라는 논점의 고민은 아니다. 우리가 왜 탁월함을 쫓아야 하고 왜 인류의 진보에 기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이다. 주인의 도덕에 의한 창조적 삶이라는 게 참 멋있어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도대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간 존재의 무의미를 진정으로 의식하게 되었을 때, 거짓된 도덕이 무너진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탁월함을 쫓을 이유도, 고독한 주인으로서 나를 지배할 이유도 잃게 된다.

​다만 여전히, 반작용의 삶이 아닌 작용의 삶에 묘하게 끌리는 것도 사실이다. 위로의 말도 묘하게 와닿지 않는다. 왜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게 더 멋있어 보여서? 반작용의 삶은 자존심 상하니까?

후기

주절주절 참 길게도 썼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아무 결론이 없다. 결론만 없는 게 아니라, 생각과 마음이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확신이 있는 듯이 얘기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것에도 딱히 자신이 없다. 아니, 이런 책을 보면서 한 쪽으로 확신이 선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이런 급진적인 이야기를 150년 전에 책으로 내버린 니체는 최소한 나보다 강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선악의 저편과 도덕의 계보는, 현대 사상·역사·종교·정치 등에 대해 풍부한 이해와 비판의식이 담긴 니체 후기 철학의 주요한 저서로, 인류의 새로운 미래철학과 미래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적 대안이 제시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