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20241231 쓰지 않는 날들]] 최고의 글감은 우울이다. 우울은 사람을 쓰게 만든다. 감정을 증폭시키고 뚜렷하게 만들어 나와 나 바깥을 보는 해상도를 비약적으로 높여준다. 이 때 쓰는 글에는 세상에서 발견한 나를 주워 담는다. 자기 연민은 세상에 대한 연민이, 자기 혐오는 세상을 향한 혐오가 된다. 우울한 사람은 이 연민과 혐오를 오가면서, 또 세상에서 발견한 나를 모으면서, 어떤 염세적 주초 위에 따듯하면서 동시에 차가운 글집을 짓게 된다. 이렇게 만든 글집은 허름하나마 곧 나 자체, 자아와 정체성이다. 그러나 최근의 심리학 혹은 스스로의 마음을 초월적(메타적)으로 바라보려는 많은 시도들, 특히 '정신건강 관리하기', '어제의 나보다 더 나아지기',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같은 일련의 시도들은, 이 글집으로부터 나를 꺼낸다. 나와 세상에 대한 연민과 혐오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왜냐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무언가를 이루는데 그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실용적 태도들을 아주 잘 차용했다. 심리학이나 초월하려는 마음은 어떤 '깨달음'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이 필요한 사람은, 본인이 멀리하려는 역동경의 대상으로의 '깨닫지 못함'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처할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서의 우울과 불안을 반대편에 두게 된다. 우울과 불안은 해상도를 높여주지만 동시에 세상을 왜곡한다. 지나치게 예민해진 마음은 자기가 왜곡한 세상을 보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평화가 있다. 평화란 내 글집을 무너트리고 세상과 나를 구분짓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수련하는 사람은 글을 쓸 수 없다. 글집을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신 다른 것을 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수련일기를 쓴다. 오늘은 뭘 했다. 결과가 어땠다. 더 잘하려면 내일은 이렇게 해야 한다. 깨달은 사람은 복음을 전파한다. 이렇게 하면 할 수 있다. 네가 지금 정체된 이유는 이것이다. 마음을 이렇게 먹어야 한다. 아무도 우울 연민 혐오 불안 슬픔에 대해 쓰지 않는다. 그것들은 도움이 안된다. '필요하지' 않다. 다만 극복해야할 대상으로서의 메타적 연구를 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우울을 '바라본다'. 우리가 자신의 우울의 원인을 규명하는 순간 우리는 그 우울로부터 해방된다([[20240317 밤양갱 뜯지 않기]]). 그만큼은 구원이고 행복으로 가는 한 걸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와 관련된 모든 감상 역시 사라지게 된다. 과거에 "나는 병신이야", "사람들은 병신이야"라고 썼더라도 지금 그 마음을 극복하고 건강한 정신을 갖게 되었다면, 당시의 글을 다시 읽어도, 그래서 떠다니는 느낌을 붙잡아 보려고 해도, 손을 펴면 내가 썼던 글자만 보게 된다. 긴장과 슬픔, 동요와 무력감은 전부 흩어지고 이제는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이를 먹을 수록 많은 것들에 점점 무뎌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래살수록, 그만큼 생각하고 느끼고 깨닫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알아내고, 느끼고, 규명하게 된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에 따라 평화와 행복도 같이 얻었지만, 버린 번뇌와 함께 다른 것도 같이 잃어왔다. 남은 것은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는 것,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통제의 대상으로서의 마음 뿐이다. 내가 행복하고 싶은 한, 목표를 이루고 싶은 한은 내 글집은 서서히 무너진다. 쓰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https://youtu.be/ryMMzYp07Zs?si=EAxXGGBVU1dEirrw) 내 집의 벽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