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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투자자가 하는 일 - 김수현
> 손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주식투자를 하는 이유는 돈이 쉽게 벌려서가 아니라, 이제는 일해서는 필요한 만큼, 원하는 만큼 버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 ㅋㅋㅋㅋ 격한 공감...
### 주식투자는 일인가?
-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글인데, 내용은 이거랑 별로 상관없음
- 전반적으로 너무 난잡한 느낌
- 시의성 띄는 사례들이 있어서 독자 후킹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전체 맥락과 잘 안 맞는 느낌
### 학교가 계급을 재생산 도구라는 것을 간파한 학생들이 반학교문화를 만드는데, 이것이 도리어 오히려 계급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이야기
> 체제 안의 행위자가 구조적 모순을 기민하게 간파하여 주체적으로 행동하지만, 본의와 다르게 계급이 재생산되는 아이러니는 오늘날 주식시장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 이런 주장을 하는데, 사례 매칭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
- 노동 수익이 별로라서 자본 수익을 기대하는 것이 어떤 '반기득권 문화'라고 할 수 있나? 오히려 아예 대놓고 자본주의와 계급이라는 기득권의 구조를 인정하는 행동인 것 같은데...
- 애초에 계급 재생산에 반할 생각도 없었던 사람들한테 "역으로 계급 재생산에 기여한다" 같은 말을 하는게 어색하다
- 저 이야기에 맞게 사례를 재구성 해보자면,
> 공부 열심히 해서 계급 이동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부 열심히하고 체제에 순응하라고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데, 알고보니 기부입학이라는 제도가 있네? ㅎㅎ 너네는 ㅈ빠지게 공부해라 나는 돈내고 단계 점프해서 자본가 되련다
- 정도가 아닐까?
### 핵심 주장
- 주식투자가 일이던 아니던 계급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기만 할 뿐 너희들이 기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이런 주장 자체는 유효할 수 있지만, 굳이 '계급 재생산'이라는 키워드와 연결할 만한 맥락은 글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
- '주식 투자도 결국 여러분의 기대만큼 돈을 벌기는 어렵다'라는게 계급 재생산의 근거라고 말한다면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전혀 새로울 것도 아니고 어떤 '아이러닉한 일'도 아니다.
- 마찬가지로 노동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실천도 계급 재상산의 근거가 된다.
### 차라리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 자본 소득이 노동 소득을 크게 앞질렀기 때문에 모두가 노동을 등한시하고 투자에 달려들고 있고,
- 그것이 오히려 자본과 노동의 소득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는 것을 가속화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 동학개미, 어떻게 볼 것인가 - 배세진
- 바로 위에서 했던 생각이 여기 있었네 ㅋㅋ
### 문제 의식
-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의 분리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 포스트케인즈주의 입장
- 별로 문제 없음
- 왜냐하면 화폐는 신용이고 서로를 믿을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만들어도 상관 없기 때문에
- 그런데 내 느낌에는, 포스트케인주의가 노동/자본소득 분리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기 보다는 해당 이슈에 별로 관심 자체가 없는거 같음
### 마르크스주의 입장
- 문제가 있음
- 왜냐하면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동시에 존재하는데,
- 노동 == 상품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물화로서의 물신숭배)
- 그 중에서도 상품의 교환가치에 집중하게 만든다. (허상으로서의 물신숭배)
- 이 때, 화폐와 노동의 관계는 사회가 노동자에게 부여하는 가치 매김이 된다. (화폐가 권력이 됨)
- 이런 과정은 상품과 노동의 사용가치는 점점 뒷전이 되고, 노동자는 힘을 잃는다.
- 노동자가 이미 힘을 잃어서 자본 수익에 집중할 수록 노동과 상품의 사용가치는 더욱 입지가 좁아지게 되고,
- 노동자는 다시 더 자본 수익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 그럴듯하네? 마르크스 읽어보고 싶다.
## 젊은 플랫폼 노동자의 초상 - 조해언
### 핵심 주장
- "노동이 극단적으로 자유롭고 유연해 질수록 노동자의 선택권도 늘어나기 때문에 노동자에게도 좋다"는 유연한 노동을 옹호하는 주장은 일견 일리있고, 실제로 그게 더 좋은 노동자들도 존재한다.
- 하지만 한편으로, 다른 상황에 처한 노동자들에게는 사실상 선택권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 왜 은지에게는 선택권이 없을까?
- 쿠팡이 물류센터 운영에 극단적인 분업화를 적용해서? 그게 아니라 쿠팡 물류센터를 제외한 양질의 일자리가 없기 때문 아닐까?
- 은지가 불만을 이야기하면 다른 지훈들이 은지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 역시 쿠팡을 제외하면 다른 일자리가 마땅찮기 때문 아닐까?
### 분업화의 문제는 뭘까?
- 노동자가 노동에서 소외된다
- 상품-서비스를 생산하는 전 단계에서 노동자 내부에 축적되는 것이 없다. 노동자는 정확하게 시간을 주고 돈을 얻는다.
> 쿠팡 단기직은 경력도 되지 않는다
- 정교한 시스템에 의해 노동자는 언제나 대체 가능한 모듈이 되고 노동자의 협상력은 떨어진다.
> 앞으로 이런 일자리는 얼마나 늘어날까? 모두 로봇이 대체하게 될까? 그럼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 하지만 이 부분도 만약에 노동자가 다양한 기업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음
- 그러나 노동자가 노동으로 얻는게 돈 뿐이라면 어떻게 다양한 기업에 대한 선택권을 얻을 수 있을까?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능력이 내 안에 쌓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 플랫폼 노동에 대한 비판 역시 당연하게도 기존부터 있었던 분업화에 대한 비판과 결을 같이 한다.
- 기존에는 컨베이어 벨트만 있었다면 요즘에는 디지털화된 다양한 도구가 있어서 분업화가 더 세밀하고 극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음
### 근데 별로임
- 분업화의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해봤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 인상 비평에만 머무르는 글이라는 느낌이다.
> 물류 센터에 들어서면 인간의 정체성은 지워지고 바코드로 대체된다
>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에게 관심이 없고 일터에 소속감이 없다
> 성과 시스템이 철저히 상대 평가를 따르고, 세밀하게 실시간 모니터링 된다
- 전부 핵심 논조와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없이 산발적으로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들만 뭉탱이로 던져놓고 비판이라고 하는 꼴이다.
## 노동자의 밤에 일어나는 일 - 최의연
### 랑시에르 vs 알튀세르
- 둘은 열심히 키배를 뜨다가 도저히 서로 수렴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발견한다.
- 알튀세르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는 '지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데, 노동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어 여기서 스스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르크스 철학을 통해 계몽시켜야 한다"라고 했다.
- 랑시에르는 거기다 대고 "아니! 노동자는 충분히 똑똑하고 스스로도 잘 할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 그 때 부터 랑시에르는 키배를 그만두고 알튀세르를 손절한 다음 하루종일 구글을 뒤져가며 <프롤레타리아의 밤>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한다.
### 고역과 작업
- 랑시에르가 보기에는 노동에는 고역과 작업(예술)이라는 속성이 동시에 공존하는데,
- 즉, 노동자는 고역을 통해 착취당하기만 하는 평면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작업인(예술인)으로 정의하면서 가치 전복(착취-피착취 구도 깨기)을 꾀할 수 있다는 뜻이고, 이게 랑시에르가 말한 '정치적'인 행동인 것 같다
-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시(poem)가 없다는 것이라는데,
- 흠 근데 좀 전에 노동의 속성 중 작업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노동을 통한 예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도 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그리고 노동자를 이 지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착취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자신들이 착취와는 다른 것을 향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음을 드러내 주는 자아 인식"이다.
- 즉 착취/피착취의 단일 권력 구도에서 벗어나 자아를 인식해서(스스로의 삶과 우주에서 시를 발견) 기존의 권력이 더이상 권력이 아니도록 만들어야 한다.
- 나한테는 이 말이 예술/문화 권력을 쥔 히피가 되라(삶의 절반 정도는)는 뜻으로 들린다
### 지적 평등으로 노동자를 해방한다고
- 그리고 랑시에르는 구글을 엄청나게 뒤져서 노동자가 생산한 수많은 예술작품을 수집하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소유하는 지적인 역량이 곧 인간의 근원적인 평등을 입증한다는 ‘지적 평등’의 테제를 수립함으로써 노동자의 주체화 및 해방에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 모든 노동은 작업이 될 수 있으니 부르주아나 노동자나 '지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가?
- 그런데 어떻게 공통적인 지적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거지?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작업"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노동자라고 해서 모두 지적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있어도 "모든 노동자에게 공통적인 지적 능력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일 수는 없다.
### 헤테로토피아
- 아무튼 그렇게 노동자가 열심히 자아를 인식하고 예술을 생산해서 "헤테로토피아"를 이루면 좋은건가?
- 자본 권력에 착취-피착취가 있듯이 문화 권력에는 착취-피착취가 없을까?
- 자본가가 돈으로 스스로를 구별지으려고 하듯이 히피와 힙스터는 취향으로 스스로를 구별지으려고 하는데, 이거 그냥 돈에서 예술로 이름만 바뀌는거 같은데요
- 자본 권력 투쟁에서 부르주아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예술 권력 투쟁의 장으로 싸움판을 옮겨서 뉴-부르주아가 되려고 하는거 같은데요
- 그렇다면 나는 헤테로-부르주아가 되겠다
## 예술은 노동인가? - 홍태림
- 일반적인 임노동 현장에서 "열정페이 타파"나, 가사노동 같은 "임노동 외의 노동"의 존재 등이 주목을 받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예술계의 만연한 악습 역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현실에서,
- 단순히 "그럼 예술에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기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아주 재미있는 글
- 정당한 댓가를 받는 예술은 임노동과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곧 자본주의 혹은 국가(제도)에 자발적 노예가 되는 결과를 맞이할 수 있다는 주장
- 물론 대안은 없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 돌봄을 정당하게 대우하라 - 함선유
- "보람, 좋은 일" 같은 도덕적 가치는 돌봄 노동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속성이지만, 오히려 이 속성 때문에 돈을 정당하게 안 지급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열정페이와 비슷한 느낌), 좀 제대로 대우해 주자
- 좀 허무하다 내용이 없는 느낌?
- 돌봄 노동이 특별히 더 대우를 못 받는다는 사실 자체는 별로 새로운 일도 아니라 문제 제기 자체만으로는 인사이트가 없음
- 돌봄 노동이 아니더라도 감정적 보람 같은 무형의 대가로 응당 주어야 할 금전적 대가를 대충 퉁치려는 사례는 흔함
- 물론 문제 의식 자체가 새롭지 않더라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좀 더 해결책에 집중했으면 좋았을거 같음
## 일자리를 따라 이동하기 - 임안나
- 돌봄 노동이 외주화 되는 과정
- 근데 그 과정에서 한 필리핀 여성이 이주 결심을 하고 싱가폴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브로커로서 생활하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줌
- 근데 뭐 어쨌다는거지? 연구의 목적이 뭔지...? 뭔가 그냥 "이주 돌봄 노동자의 이모저모" 같은 느낌;;
## 과로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 강민정
- 한병철의 [<피로사회>](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712048&ref=qodot.me)를 읽으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 개인이 뭐든지 할 수 있고 그래서 무슨 결과든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은 끝없는 자책으로 이어짐
- 이런 '자기 경영과 성공 신화'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세우는 '자발적 노예' 상태가 된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