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에세이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50998649 크게 기대하지 않고 펼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책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독서 모임이든 커뮤니티든 뭔가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하게되는 이런저런 생각들… ‘아 맞아 나도 이런 생각 했었지’하며 웃고 무릎도 치고 그랬다. 다만 챕터 제목이…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제목… 별다른 의미도 없고 내용과의 연관성도 없고 그냥 뭔가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소박하게 힙한 느낌을 만들려는 느낌이… 좀 짜증났다. 인상적이었던 주제들을 챕터 구분과 관계없이 내 맘대로 묶어서 첨언해 보았다. ##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을 미워하는 것 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를 미워하는 편이 더 낫다는 말에 대해 정말정말 동의한다. 정확히는 동의한다기 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할까? 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에는 사실 실체가 없다. 기껏해야 어떤 불특정 다수가 뭉게뭉게 모여있는 뭉텅이? 같다는 느낌 정도다. 작가가 말하는 ‘인류’라는 말도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작가가 개인과의 관계를 ‘체념’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실제 존재하는 개인을 만날 때는 상대방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특별히 좋은 배려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기대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악의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남 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인생이 재미 없으니 그러는 걸 어쩌겠냐는 느낌… 인생이 재미 없다는 걸 내가 모르는 입장도 아닌데 말이다. “자기 인생이 재미가 없다고 남을 그렇게 씹고 다니면 안 되지!” 맞는 말이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근데 그 사람이 성숙하겠어? 그런 말을 하는 본인도, 본인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 중에 성숙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물론 어떤 사람의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거나 피해를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고 그래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겠지. 근데 또 생각해보면… 어떤 사람이 성숙한 사람의 기준에 못 미친다고 욕을 하는 것 까지도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체념이 하나 더 늘었다. ## 말하기-듣기의 인간과 읽기-쓰기 인간에 대해 작가는 말하기-듣기 인간과 읽기-쓰기 인간을 구분하고 스스로를 읽고 쓰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말로는 말하기-듣기와 읽기-쓰기가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는 하지만, 속으로는 말하기-듣기가 세상을 점령해 나가는 사실에 크게 분노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나도 비슷하다. > 저널리즘에서도 글로 된 기사가 아니라 카드 뉴스나 동영상 뉴스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 욕망을 자극하고 다양한 감정을 건드릴줄 아는 사람이 점점 더 유리해진다. (ex 쓸모없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기업가, 선동과 음모가 필요한 정치인) ‘허세’, ‘씹선비’, ‘진지충’ 같은 단어들이 유행을 타는 것 만으로도 읽기-쓰기 인간의 입지가 얼마나 좁아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요새는 읽기-쓰기의 인간이 스스로를 자조하는데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 기질이 사회적으로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심지어 본인조차 그런 기질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많이 놀렸을 것 — 동족 혐오 —), 남에게 욕 먹기 전에 스스로 욕을 박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읽기-쓰기의 인간은 맘에 드는 인간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꽤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트레바리니 뭐니 하는 서비스들이 흥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 “그 사람 글은 잘 쓰는데 인성은 별로더라”는 말에는 위화감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은 그 사람 자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를 판단하려면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는 오랜 미신이 대표적이다. > 하지만 생각보다 말하기-듣기 커뮤니케이션에는 노이즈가 많다. 예를 들어 별 생각 없이 중간에 말을 멈추면 사람이 신중해 보인다. 목소리와 말투, 외모나 차림새 따위가 대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느껴본 적이 있다면 말하기-듣기 역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사람을 판단할 때 가급적 그 사람이 쓴 글로 판단하려고 한다. 그 편이 더 명확하다. 읽기-쓰기가 주는 정보와 노이즈가 있는 것 처럼, 말하기-듣기 역시 어떤 정보를 주고 어떤 노이즈를 준다. 사실 그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말하기-듣기에 대한 신뢰를 비판하는 것 까진 좋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읽기-쓰기에 대한 신뢰로 넘어가버리는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작가가 마냥 읽기-쓰기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긴 한데… > ‘읽고 쓰면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고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 <내 인생의 책> 부분에서 >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고) 이 소설은 글자로 된 야수다. 독자를 찢어발기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는다. 나는 <악령> 이후로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p65 크으으 진짜 좋다. 나에게 인상 깊게 다가왔던 책은, 그게 에세이던 소설이던 모두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주지 못했다. 그게 위로던 힐링이던 뭐시깽이던… 오히려 혼란스러운 것, 기분 나쁜 것, 허망한 것을 주었을 뿐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문학을 멀리하는 것이 낫다. > ‘소설가로서 롤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조지 오웰이라고 답한다. p68 그 전에도 장강명이 조지 오웰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저널리스트 경력도 그렇고 (그 경력에서 영향을 받았는지)글의 저널리즘적 성격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조지 오웰의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에세이는 즐겁게 읽었다[[20211001 책 대 담배 - 조지 오웰]]. 장강명의 소설 <표백>은 좋았지만, <한국이 싫어서> 같은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저널리즘의 냄새 때문에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재밌게 잘 읽었다. 확실히 둘에게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책에 관한 에세이를 썼다는 점, 그걸 읽으니까 묘하게 내 친구가 된거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점이 그랬다. ## 전자책과 종이책의 장단점에 대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 종이책을 선호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를 공감하지 못한다. 책의 물성이 주는 특별한 감각을 자기는 못 느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책이 주는 다양한 편의기능에도 시큰둥한 모습을 보인다. 본인은 오로지 책의 본질적인 의미인 ‘독서’에만 집중하려고 하는 모습과, 그 ‘독서’를 위한 편리함, 좋은 접근성 등등의 ‘실용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실용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을 이렇게나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전혀 본질-실용적이지 않다. 책 애호가들이 종이책의 물성에 알수없는 감정이나 묘한 애착을 갖고 종이책을 찬양하듯이, 본인은 본인의 본질에 집중하려는 모습, 잡다한 것을 걷어내려는 드라이하고 미니멀한 안목에 취해있는 것 뿐이다. ## 문화 비평의 죽음에 대해 작가는 영화, 대중음악, 미술, 문학을 걸쳐 대부분의 문화 비평은 이제 설 자리를 잃었다고 말한다. 작품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거 진짜 재미 없음. 완전 구림’이라는 한 줄짜리 감상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중략) 하지만 ‘완전 구림’이라는 한 줄 감상은 절대로 비평은 아니다. 거기에는 작품을 읽어내겠다는 의지가 없다. ‘눈물 나도록 좋아요’, ‘누구누구는 너무 낡았다’ 같은 것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평이 아니라 소비자 반응에 가깝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라는 질문을 던질 수는 있겠지만 “몰라요, 그냥요”라고 대답하면 거기서 끝이다. (중략) 나는 자세한 해설을 원한다. 읽고 쓰는 사람들 간의, 글자를 통한 대화를 원한다. 악평도 좋다. 문화 컨텐츠를 소비하고 나서 친한 사람들과 가벼운 감상을 나누는 것은 정말 즐겁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정리되거나 배설되지 못한 말들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내가 그 장면에서 왜 거부감을 느꼈는지, 갑자기 거기서 왜 온몸에 전율이 돋는걸 느꼈는지, 이 작품이 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허접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자세히 알길 원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마음도 자세히 알기를 원한다. 물론 내 감정에 대한 정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리된 내 생각을 공유하는 것, 그러면서 남의 정리된 생각을 들을 기회를 얻기란 매우 어렵다. 한두번의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정도의 질문으로는 피상적인 대답이나 겨우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꼬리를 무는 질문을 반복했다간 상대방은 공격받는다는 느낌에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아마 생각해본적이 없었거나, 당장 생각해본다고 해서 흩어진 감정과 생각의 편린들이 잘 정리되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어버버하는 자기 모습이 창피할 수도 있고, 자기를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는 상대방이 짜증날수도 있다. 나도 예전에는 여러 대화를 시도하고는 했지만, 비슷한 경험을 몇번 겪고 나서는 상대방이 먼저 묻기 전에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쓸데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거슬리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굳이 얻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좋은 비평을 쓴다는 것은 컨텐츠를 진지하게 소비했다는 뜻이고, 많은 에너지를 들여 자기 감정과 생각을 정리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 일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심신도 상당히 지치는 일이니 별로 하고싶지 않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 오히려, 진지한 비평을 남겨주는 사람에게는 그게 설사 악평이라고 할지라도 고마운 감정을 느끼게 될 것 같다. ## 독서 팟캐스트의 역할에 대해 > 독서 팟캐스트는 무엇일까? 긴 글 읽기를 버거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요약 서비스인가? (중략) 교양 있는 사람들의 점잖은 토크쇼일까, 책은 그저 거들 뿐인? (중략) 신간을 알려서 구매로 이어지게 하는 홍보용 매체일까? >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는 듣기 전이든 후든 청취자가 책을 읽을 것을 전제로 하는가, 아니면 읽지 않아도 괜찮은가? (중략) (팟캐스트에서 나누는)이 대화가 그 자체로 완결된다면 왜 굳이 책이 필요한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는다면 많은 청취자들이 방송에서 소개하는 책을 읽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 의미를 묻고 따지는 것은 나의 고약한 버릇이고, 읽고 쓰는 세계 거주자들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은 힘이고 은총이며 고통이자 저주다. 작가는 독서 팟캐스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독서 모임에 (길게 혹은 짧게)참가해 보기도 했고 운영해 보려고 했던 적도 있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많이 됐다. ‘이거(독서 모임) 왜 하는거지? 여기서 나 혹은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게 뭐지?’ 같은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사람이 모이고 나면 읽기-쓰기 인간이 하는 이런식의 고민은 대체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목표를 정하고 그에 충실하게 매 모임을 구성하는 생산적인 활동은 절박한 사람들이 하는 스터디이지 취미 모임이 아니다. 내가 운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독서 모임은 결국 커뮤니티를 만드는데 초점을 맞췄다. 책은 그저 커뮤니티의 소재가 될 뿐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심지어 이런 못 박기도 소용없게 된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깊게 파길 원하는 때도 있고, 시의성 있는 주제 여러개를 빠르게 훑고 지나가길 원할 수도 있다. 결국 지치지 않고 모임을 유지하려면, 무형식-무일관성이 될 수 밖에 없다는게 내 결론이다. 일하고 있으면 쉬고 싶고, 쉬고 있으면 일하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 아마 앞으로도, 어떤 원칙에 의해 모임을 운영하겠다는 당찬 포부(?)는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 같다. 의미를 좇으려고 하는 읽고-쓰는 인간으로서 쉽지 않겠지만… ## 고전이 주는 교훈에 대해 > 고전은 독자에게 얌전하게 교훈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들은 독자들이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비를 건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맞혀보라고 묻는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오이디푸스는 뭘 잘못한 걸까? 햄릿은 미친 걸까? 덴비는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 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평했다. > 그 책들은 그런 야수성 때문에 고전이 되었다. 동시에 당대에는 격렬한 비난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고 불태워지거나 고발당하거나 판매 금지되었다. 악평을 받는 작품이 모두 길이 남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는 소설은 절대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쓸데없는 야수성 찬양이 거슬린다. 자지 작은 남자가 열등감 때문에 몸을 엄청나게 키우고 싶어하는 느낌… 하지만 동감하는 부분은 많다. 사람들 중에는 책을 많이 읽으면,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을 읽으면 성공한 삶을 살 수 있거나, 혹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꽤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때의 ‘나은 사람’이라는 말은 대개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경험상 외려 반대의 효과가 더 크게 나는 것 같다. 성공에 가까이 가기 보다 성공을 회의하게 된다. 착한 사람이 되기 보다 구성된 윤리를 의심하게 된다. 삶을 긍정하고 행복을 좇기 보다 세계에 던져진 개인의 비참함에 주목하게 된다. 현대의 윤리 기준으로 보면 잔뜩 욕을 먹어도 싼 고전은 발애 채인다. 단순히 고전이 과거의 작품이기 때문에, 시대 차이가 만드는 다른 윤리 기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예 핵심적인 메세지나 지향하는 바, 그래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현대의 취향이나 관점과는 잘 맞지 않거나 심지어는 정면 충돌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책을 많이 읽고도 가치관에 충격을 받지 않고 넘길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더 나쁜 점은 사람을 이따구로 흔들어 놓고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고전 같은건 안 읽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 대중 교양서가 말하는 행복에 대해 > 성공, 독설, 치유, 자존감 등의 키워드가 지나고 이제 사람들은 보다 근본적인 걸 궁금해 한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지? 삶의 목표가 행복이라고 하던데, 행복이 뭐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지? > 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략) 그러나 이런 결론은 어딘가 모자라다. 사랑하는 이와의 식사는 물론 좋지만,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바를 그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 최인철 교수는 행복은 ‘좋은 삶’의 한 구성 요소이며, 행복 외에도 의미, 품격 같은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중략) 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행복’이라는 말에서 ‘좋은 삶’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그게 뭐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 김정운 작가는 여수의 한 섬으로 내려가 화실과 서재를 짓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지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라고 적는다. (중략) “아침에 샤워할 때 나오면 너무 행복해요, 특히 겨울에 추울 때 뜨거운 물이 팍, 나오면,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이게 사는 거지 싶죠.” >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식사나 수압이 쎈 뜨거운 물줄기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을 희생시켜가면서 구하려는게 있다. 그걸 품위라고 부르기는 어렵고, 의미?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물리학자의 우주적 진리도 아니고,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삶의 중심도 아니다. 사실 이 챕터에 별달리 덧붙일 말은 없다. 그냥 비슷한 생각을 하던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꼈던 부분들을 옮겨봤다. 다만 개인적으로 김정운을 싫어하는데 역시나 여기서 인용된 대사만 들어도 존나 꼴보기 싫다. 으 쿨한척 하는 나르시스트 아재 냄새 그건 그렇고 자존감 다음으로 요즘에 유행하는 건 뭐지? 퇴사? 우울증? 내면의 평화? ## 현실과 멀어지는 문학에 대해 > 내게 진짜 두렵고 걱정스러운 일은 사람들이 문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문학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나는 2000년대 2010년대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비정규직으로 인한 노동시장 이원화라고 생각한다. (중략) 하지만 2010년대 중반까지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다른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미생>, <송곳> 같은 웹툰이 떠오른다. > 선물 시장이나 투자은행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문인이 몇 명이나 될까? 금융시장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현대자본주의의 탐욕을 지적할 때 그 목소리에 과연 얼마나 힘이 실릴까? 문학은 인간과 골목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선물 시장이나 투자은행을 몰라도 볼 수 있고 비출 수 있는 인간과 골목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빠른 속도로 복잡해진다. 복잡한 사람들의 생각, 골목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연하게도 제대로 비추는 거울을 만들 수 없다. 편미분하고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보이는 부분을 본거고, 필요한 부분을 취한 거지만, 거울에 비추는 모습은 납작한 생각, 납작한 풍경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