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속초에 온지 2주차에 접어들었다. 1주차에는 맛있는 물회, 미역국, 국밥, 그에 비해 너무 그지같은 닭강정, 바다, 호수들, 시장 튀김을 먹고 얻은 배탈, 피곤해서 도진 헤르페스(1형임;;) 등이 있었다. 특히 영랑호는 정말 좋았다.


그동안 '거기서 쉬니까 어때?'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다.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음… 며칠 안 되어서 그런가 잘 모르겠네' 뿐이었다. 그렇다고 4주를 다 지내고 나서는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그래봤자 4주일 뿐일텐데 말이다. '거기 있으면 뭐해?'라는 질문도 비슷하다. '바다 보고 맛있는거 먹고 그냥 있는거지 뭐'외에는 어떤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물어보는 쪽도 특별히 인상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냥 '응 바다 앞에서 푹 쉬니까 상쾌하고 좋아'라고 가볍게 넘기질 못하고 늘 당황해 버린다. 스스로도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여기 오니까 어떻지? 그리고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서울이 답답하다고 느꼈다. 여기 와서 답답한 마음이 어느정도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커피 먹고, 책 보고, 좀 끄적거리다가, 쉬고, 자고… 그냥 그러고 있다. 그동안 여기 오기를 꽤나 기다렸다. 그런데 전과 다를게 없다면 나는 뭘 기대하고 멀리까지 왔나?
아니… 달라진게 있다. 여기는 아는 사람이 없다. 내게 익숙한 사무실이 없다. IT 커뮤니티도 없다. 젊은 사람도 별로 없다. 다양한 문화 컨텐츠를 접할 곳도 적다. 만원 지하철도 없고 바빠 보이는 사람들도 없다. 이걸 해야하는 사람도 없고 저걸 해야하는 사람도 없다. 서울이 주던, 내가 수행할 배역을 숨쉴 틈 없이 제공해주던, 촘촘하게 짜여진 무대 장치가 없다. 나는 서울을 벗어나 공장초기화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아무 눈속임이 없는 이곳이 더 행복하냐면? 그럴리가…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믿음과 그 믿음을 수행하게 해주는 배역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긴 바다 뿐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쩐지, 앞으로 어떤 배역도 맡을 수가 없을 것만 같다는 공포를 주는 바다. [[20210425 바다되기]]
그런데 왜 나는 왜 서울을 벗어난 장소에 내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하는가? 예를 들면, 왜 원격근무에 혹하는가? 한 때 원격근무가 나에게 안 맞는거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말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그럴듯한 일련의 라이프스타일을 꾸릴 수 있다는 유혹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 북적거리는 곳을 떠나 자극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 자극은 내가 원할 때만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 바램 때문일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으로 부터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일까? [[20210523 휴식 중 휴식]]
다 맞으면서도… 전부 아니다…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재충전도 리프레시도 비워내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힘들어서 쉰다고 대답한적은 많지만 내가 정말 힘들었나? 지금 내가 정말 쉬고 있나? 무엇하나 확실하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결국 지금 어떠냐고 묻는다면… 그냥 있다. 맥 빠진 대답이나 듣자고 "거긴 어때?"를 묻진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나로서는… 이 이상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