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향성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지향성의 역사]] > - [[#중세 철학의 유산]] > - [[#브렌타노의 부활]] > - [[#후설의 체계화]] > 3. [[#지향성의 구조]] > - [[#무엇에 관함의 특성]] > - [[#노에시스와 노에마]] > - [[#지향적 대상과 실재]] > 4. [[#현상학적 지향성 분석]] > - [[#지향적 체험의 유형]] > - [[#충족과 공허]] > - [[#지평 구조]] > 5. [[#분석철학에서의 지향성]] > - [[#지향성의 자연화 문제]] > - [[#설과 데닛의 논쟁]] > - [[#표상주의와 지향성]] > 6. [[#비판과 쟁점]] > - [[#브렌타노 테제의 한계]] > - [[#하이데거의 비판]] > - [[#의식과 지향성의 관계]] > 7. [[#현대적 전개]] > - [[#인지과학과 마음철학]] > - [[#체화된 인지와 지향성]] > - [[#인공지능과 지향성 문제]] > 8. [[#관찰자의 기록]] > 9. [[#같이 읽기]] ## 개요 **지향성**(志向性, Intentionality)은 마음과 의식이 무언가에 "관한"(about) 것이 되는 특성을 가리키는 철학 용어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생각할 때, 그 생각은 항상 무언가에 관한 생각이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는 '커피'에 관한 것이고, 공룡이 멸종했다는 믿음은 '공룡의 멸종'이라는 사태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자기 바깥의 무언가를 향하고, 가리키고, 표상하는 능력이 지향성이다. 지향성 개념은 19세기 후반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에 의해 현대 철학에 도입되었다. 브렌타노는 모든 심적 현상이 대상을 향한다는 점에서 물리적 현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테제는 "브렌타노의 테제"로 알려졌다. [[후설]]은 브렌타노의 제자로서 지향성 개념을 물려받았으나, 이를 체계적인 현상학적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 [[후설]]에게 지향성은 의식의 본질적 구조이며, 현상학적 분석의 핵심 대상이었다. 현대 철학에서 지향성은 대륙철학과 분석철학 양쪽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현상학 전통에서는 지향성이 의식의 본질적 특성으로 탐구되고, 분석철학의 마음철학에서는 심적 상태의 "~에 관함"(aboutness)이 어떻게 물리적 세계에서 가능한지가 핵심 문제가 된다. 지향성의 "자연화" 문제 - 지향성을 물리적 용어로 환원할 수 있는가 - 는 지난 반세기 동안 마음철학을 지배해온 논쟁 중 하나이다. ## 지향성의 역사 ### 중세 철학의 유산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intentio'에서 유래한다. 'intentio'는 '무엇을 향함', '겨냥함'을 의미하며, 동사 'intendere'에서 파생되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이 개념은 인식론적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중세 철학자들은 '지향적 존재'(esse intentionale)와 '자연적 존재'(esse naturale)를 구별했다. 돌이 창문을 깨뜨릴 때 돌은 자연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마음이 돌을 생각할 때, 돌은 마음 안에 '지향적으로' 존재한다. 마음 안의 돌은 물리적 돌이 아니라 돌의 '형상'(forma)이다. 중세 철학에서 지향성 개념은 인식의 가능 조건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인식이란 대상의 형상을 마음 안에 수용하는 것이며, 이 형상은 지향적 방식으로 존재한다. 근대 철학에서 이 개념은 배경으로 물러났으나, 19세기 후반 브렌타노에 의해 새로운 의미로 부활했다. ### 브렌타노의 부활 프란츠 [[브렌타노]](1838-1917)는 《경험적 관점에서의 심리학》(Psychologie vom empirischen Standpunkt, 1874)에서 지향성 개념을 현대 철학에 도입했다. [[브렌타노]]는 심적 현상과 물리적 현상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지향성을 제시했다. 브렌타노의 유명한 정식화에 따르면: "모든 심적 현상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이 대상의 지향적 내재(intentional inexistence)라고 부른 것, 그리고 우리가... 내용에 대한 지시, 대상에 대한 방향성, 또는 내재적 객관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특징으로 갖는다." 브렌타노는 두 가지 핵심 주장을 했다. 첫째, 모든 심적 현상은 지향적이다(모든 심적 상태는 대상을 향한다). 둘째, 오직 심적 현상만이 지향적이다(물리적 현상은 대상을 향하지 않는다). 이 두 주장의 결합이 "브렌타노의 테제"이다. 브렌타노의 "지향적 내재" 개념은 해석상 논란이 있다. 일부는 이것을 지향적 대상이 마음 안에 존재한다는 내재주의적 해석으로 읽는다. 다른 이들은 지향적 관계가 대상의 존재 여부와 독립적이라는 비존재적(non-existential) 해석을 선호한다. 황금산을 상상할 때,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지만 상상은 여전히 황금산을 지향한다. ### 후설의 체계화 [[후설]](1859-1938)은 [[브렌타노]]의 강의를 들은 제자였으며, 지향성 개념을 현상학의 핵심으로 발전시켰다. 《논리연구》(1900-01)에서 [[후설]]은 지향적 체험의 구조를 상세히 분석했다. [[후설]]은 브렌타노의 지향성 개념을 수정하고 확장했다. 첫째, [[후설]]은 브렌타노의 테제 전반부 - 모든 심적 현상이 지향적이다 - 에 의문을 제기했다. 통증, 어지러움, 막연한 불안 같은 감각과 기분은 명확한 대상을 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후설]]은 이런 비지향적 체험을 "질료적 내용"(hyletic content)으로 구별했다. 둘째, [[후설]]은 지향적 체험의 구조를 더욱 정교화했다. 모든 지향적 체험은 작용적 측면(노에시스)과 대상적 측면(노에마)을 갖는다. 이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의 분석이 현상학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셋째, [[후설]]은 지향성을 의식의 본질로 규정했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관한 의식이다"(Bewusstsein ist immer Bewusstsein von etwas). 이 정식화는 현상학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 ## 지향성의 구조 ### 무엇에 관함의 특성 지향성은 마음의 "~에 관함"(aboutness) 또는 "~을 향함"(directedness)이다. 이 특성은 여러 측면을 갖는다. 첫째, 지향적 상태는 항상 내용을 갖는다. 믿음은 단순히 믿음이 아니라, "~라고 믿음"이다. 욕구는 단순히 욕구가 아니라, "~을 욕구함"이다. 이 내용이 지향적 상태를 특정한 것으로 만든다. "비가 온다고 믿음"과 "눈이 온다고 믿음"은 같은 유형의 심적 상태(믿음)이지만 다른 내용을 갖기에 다른 지향적 상태이다. 둘째, 지향적 상태는 특정한 "양상"(mode) 또는 "태도"(attitude)로 내용을 표상한다. 같은 명제적 내용 - 예를 들어 "비가 온다" - 이 다른 양상으로 표상될 수 있다. 비가 온다고 "믿을" 수도, 비가 오기를 "바랄" 수도, 비가 오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태도가 지향적 상태의 양상이다. 셋째, 지향적 상태는 "측면성"(aspectuality)을 갖는다. 존 설(John Searle)이 강조한 이 특성에 따르면, 지향적 상태는 대상을 특정한 측면에서 표상한다. 나는 "아침에 뜨는 밝은 별"을 바라볼 수도, "저녁에 뜨는 밝은 별"을 바라볼 수도 있다. 둘 다 금성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표상된다. [[후설]]의 노에마 개념이 이 측면성을 포착한다. ### 노에시스와 노에마 [[후설]]의 《이념들》(1913)에서 체계화된 [[노에시스-노에마]] 구조는 지향성 분석의 핵심 틀이다. **노에시스**(Noesis)는 의식의 작용적 측면이다. 지각함, 판단함, 상상함, 기억함, 기대함 등이 노에시스이다. 노에시스는 의식 체험의 "내실적"(reell) 구성 요소이며, 시간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심적 과정이다. **노에마**(Noema)는 의식의 대상적 측면이다. 지각된 것, 판단된 것, 상상된 것 등이 노에마이다. [[후설]]에게 노에마는 단순히 외부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는 "의미"(Sinn)이다. 같은 나무를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나무 자체는 같지만 노에마는 다르다. 노에마 개념의 해석은 [[후설]] 연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 "서해안 해석"(대그핀 플레스달, 휴버트 드레이퍼스 등)은 노에마를 프레게의 뜻(Sinn)과 유사한 추상적 내용으로 본다. "동해안 해석"(앤 베기 드룸먼드 등)은 노에마를 대상 자체의 나타남 방식으로 본다. 이 논쟁은 [[후설]] 현상학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 물음과 연결된다. ### 지향적 대상과 실재 지향성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지향적 대상이 실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황금산, 유니콘, 네모난 원을 생각할 수 있다. 이것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생각은 분명히 그것들을 "지향"한다. 이 특징은 지향적 관계가 일반적인 관계와 다름을 보여준다. "철수가 영희를 사랑한다"는 관계는 철수와 영희 둘 다 존재해야 성립한다. 그러나 "철수가 유니콘을 상상한다"에서 유니콘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지향적 "관계"는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브렌타노는 이것을 "지향적 내재"로 설명했다. 지향적 대상은 마음 안에 "지향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문제를 야기한다.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 대상과 어떤 관계인가? [[후설]]은 이 문제를 노에마 개념으로 접근했다. 지향적 체험이 향하는 것은 외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노에마이다. 노에마는 대상의 "의미"이며, 대상의 존재 여부와 독립적이다. 황금산에 대한 상상의 노에마는 "황금으로 된 산"이라는 의미 구조이며, 이것은 황금산의 실재 여부와 무관하게 분석될 수 있다. ## 현상학적 지향성 분석 ### 지향적 체험의 유형 [[후설]]은 지향적 체험을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했다. 기본적 분류는 객관화적 작용(objectifying acts)과 비객관화적 작용의 구별이다. **객관화적 작용**은 대상을 표상하는 작용이다. 지각, 상상, 기억, 판단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작용들은 대상을 "정립"(setzen)하거나 "현전시킨다"(präsentieren). **비객관화적 작용**은 이미 표상된 대상에 대한 태도이다. 욕구, 의지, 감정 등이 이에 속한다. 무언가를 욕구하려면 먼저 그것을 표상해야 한다. 욕구는 표상된 대상에 대한 "태도 취함"이다. 또 다른 분류는 직관적 작용(intuitive acts)과 기호적 작용(signitive acts)의 구별이다. 직관적 작용은 대상을 "직접" 현전시킨다. 지각이 대표적이다. 기호적 작용은 대상을 "간접적으로", 기호를 통해 지향한다. 언어적 의미 파악이 대표적이다. ### 충족과 공허 [[후설]]의 중요한 분석 중 하나는 "충족"(Erfüllung)과 "공허"(Leerheit)의 구별이다. 지향적 작용은 다양한 정도로 "충족"될 수 있다. 기호적 의향(signitive intention)은 대상을 "공허하게" 지향한다. "파리의 에펠탑"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때, 나는 에펠탑을 지향하지만, 에펠탑이 직접 현전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공허한 지향이다. 직관적 충족은 공허한 지향을 "채운다". 실제로 에펠탑 앞에 서서 그것을 지각할 때, 이전의 공허한 지향이 직관적으로 충족된다. 충족의 정도는 다양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다른 정도의 충족을 제공한다. [[후설]]에게 "진리"와 "명증"은 충족 구조와 연결된다. 명증(Evidenz)은 의향과 직관의 완전한 일치, 즉 완전한 충족이다. 충족 구조의 분석은 [[후설]] 인식론의 핵심이다. ### 지평 구조 [[후설]]의 후기 분석에서 중요해지는 개념이 "지평"(Horizont)이다. 모든 지향적 체험은 지평 구조를 갖는다. 내적 지평은 대상 자체 내의 잠재적 측면들이다. 책상을 볼 때, 나는 책상의 앞면만 본다. 그러나 나의 지각은 책상이 뒷면, 아랫면, 내부를 가지고 있음을 "함께 의미한다"(mitmeinung). 이 암묵적으로 함께 의미된 것들이 내적 지평이다. 외적 지평은 대상을 둘러싼 맥락이다. 책상은 방 안에 있고, 방은 건물 안에 있으며, 건물은 도시 안에 있다. 이 맥락적 연관이 외적 지평이다. 모든 개별 대상은 궁극적으로 "세계 지평"(Welthorizont) 안에 위치한다. 지평 개념은 [[후설]]의 "[[생활세계]]"(Lebenswelt) 분석으로 이어진다. 생활세계는 모든 지향적 체험의 궁극적 지평이며, 과학적 객관화 이전에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세계이다. ## 분석철학에서의 지향성 ### 지향성의 자연화 문제 분석철학의 마음철학에서 지향성은 핵심 문제 중 하나이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세계가 물리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순전히 물리적인 시스템(뇌)이 어떻게 '의미'나 '~에 관함'이라는 비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속성을 가질 수 있는가?" 지향성의 "자연화"(naturalization) 프로그램은 지향성을 물리주의적 세계관과 양립 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주요 접근법들이 있다: **인과 이론**: 지향적 내용은 인과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나의 "물" 개념이 물에 관한 것인 이유는 물이 나의 "물" 표상을 인과적으로 야기하기 때문이다. 제리 포더(Jerry Fodor)의 "비대칭적 의존성 이론"이 대표적이다. **목적론적 이론**: 지향적 내용은 진화적 기능에 의해 결정된다. 개구리의 시각 시스템이 "파리"를 표상하는 이유는 그 시스템이 파리를 탐지하도록 자연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루스 밀리칸(Ruth Millikan)과 데이비드 파피노(David Papineau)의 작업이 대표적이다. **해석주의**: 지향적 상태는 해석의 관점에서 귀속된다. 시스템에 지향적 상태를 귀속시키는 것은 그 시스템의 행동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전략이다.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의 "지향적 입장"(intentional stance)이 이 접근이다. ### 설과 데닛의 논쟁 존 설(John Searle)과 대니얼 데닛의 논쟁은 지향성의 본성에 관한 핵심 논쟁을 대표한다. 설은 "본래적 지향성"(intrinsic intentionality)을 옹호한다. 의식적 마음은 본래적으로, 내재적으로 지향적이다. 책이나 컴퓨터의 "지향성"은 파생적이다 - 그것은 우리가 부여한 것이다. 책의 문장이 무언가에 "관한" 것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무언가에 관한 것인 것은 해석 때문이 아니라, 의식 자체의 본성 때문이다. 데닛은 본래적 지향성을 거부한다. 모든 지향성은 관점 의존적이며, "지향적 입장"에서 귀속된다. 시스템의 행동을 예측하기 위해 우리는 그 시스템에 믿음, 욕구, 의도를 귀속시킨다. 이것이 "지향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데닛에게 "진정한" 지향성과 "단지 ~인 것처럼 보이는" 지향성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은 없다. 이 논쟁은 의식과 지향성의 관계, 기계가 "진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지, 지향성이 환원 가능한지 같은 근본 물음과 연결된다. ### 표상주의와 지향성 분석철학에서 지향성은 종종 "표상"(representation)과 동일시된다. 지향적 상태는 세계를 표상하는 상태이다. 믿음은 세계가 특정 방식임을 표상하고, 욕구는 세계가 특정 방식이기를 표상한다. 표상주의적 마음 이론(Representational Theory of Mind)에 따르면, 심적 상태는 본질적으로 표상적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표상들을 조작하는 것이다. 포더의 "사고의 언어"(Language of Thought) 가설은 심적 표상이 언어와 유사한 구조를 갖는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일부 철학자들은 지향성과 표상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향성의 모든 경우가 표상적인가? 행동, 기술, 실천적 지식의 지향성은 표상으로 포착되는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들은 "실천적 지향성"이 "이론적 표상"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주장한다. ## 비판과 쟁점 ### 브렌타노 테제의 한계 브렌타노의 테제 - 모든 심적 현상은 지향적이고 오직 심적 현상만이 지향적이다 - 는 양쪽 방향에서 도전을 받는다. 테제의 전반부에 대한 도전: 모든 심적 현상이 정말 지향적인가? 통증은 무언가에 "관한" 것인가? 막연한 불안, 전반적인 우울감, 졸음 같은 상태는 명확한 대상을 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후설]] 자신도 이 문제를 인정하고, 비지향적 "질료적 내용"을 구별했다. 테제의 후반부에 대한 도전: 오직 심적 현상만이 지향적인가? 그림, 지도, 문장, 컴퓨터 프로그램도 무언가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들은 지향적인가? 브렌타노와 [[후설]]은 이런 것들의 지향성을 "파생적"이라고 본다 - 그것들은 우리의 의식적 해석을 통해서만 지향적이다. 그러나 이 구분이 유지될 수 있는지는 논쟁적이다. ### 하이데거의 비판 [[하이데거]]는 [[후설]]의 지향성 분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후설]]의 현상학은 여전히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에 갇혀 있다. 지향성을 의식의 근본 구조로 보는 것은 의식을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놓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에서 인간은 먼저 의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내-존재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타인과 함께 살며, 실천적 관심사에 몰두한다. 이런 일상적 삶에서 의식적 지향성은 주제화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손안에 있음"(Zuhandenheit)과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을 구별한다. 망치를 사용할 때, 나는 망치를 의식적으로 "지향"하지 않는다. 망치는 나의 주의의 대상이 아니라, 투명하게 사용되는 도구이다. 망치가 고장났을 때 비로소 망치가 의식의 대상이 된다. [[하이데거]]에게 지향성은 도구적 관여의 붕괴에서 파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 의식과 지향성의 관계 의식과 지향성의 관계는 현대 마음철학의 핵심 논쟁 중 하나이다. **지향성 우선론**: 지향성이 의식보다 더 근본적이다. 지향성은 의식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 무의식적 믿음과 욕구가 그 예이다. 일부는 의식조차 특정 유형의 지향성(고차 표상)으로 설명하려 한다. 데이비드 로젠탈(David Rosenthal)의 고차 사고 이론이 대표적이다. **의식 우선론**: 의식이 지향성보다 더 근본적이다. 진정한 지향성은 의식적 마음에서만 발견된다. 무의식적 "지향성"은 파생적이거나 은유적이다. 존 설이 이 입장을 대표한다. **공동 근본성**: 의식과 지향성은 서로 환원 불가능하며, 마음의 두 가지 본질적 측면이다. 양자를 별개로 다루되, 어느 쪽도 다른 쪽으로 환원하지 않아야 한다. 이 논쟁은 마음의 본성, 의식의 어려운 문제, 인공지능의 가능성 같은 근본 물음과 연결된다. ## 현대적 전개 ### 인지과학과 마음철학 현대 인지과학에서 지향성은 핵심 개념으로 남아있다. 인지 시스템이 세계를 표상하고, 정보를 처리하며, 의미 있는 행동을 산출하는 방식을 설명하려면 지향성 개념이 필요해 보인다. 인지과학의 고전적 접근 - 계산주의 - 에서 인지는 표상에 대한 계산이다. 표상은 지향적 내용을 갖는 심적 기호이다. 포더의 "사고의 언어" 가설이 이 접근의 대표적 정식화이다. 연결주의(connectionism)는 계산주의에 도전했다. 신경망 모델에서 표상은 분산되어 있으며, 기호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이것이 지향성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는 논쟁적이다. 일부는 연결주의가 지향성을 더 잘 설명한다고, 다른 이들은 연결주의가 진정한 지향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 체화된 인지와 지향성 1990년대 이후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패러다임이 부상했다. 바렐라, 톰슨, 로쉬의 《몸의 인지과학》(1991)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접근은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 영감을 받았으며, 인지를 뇌만의 활동이 아니라 신체와 환경을 포함하는 과정으로 본다. 체화된 인지 관점에서 지향성은 신체적이다. 세계를 향한 방향성은 머리 속 표상이 아니라 신체적 기술, 습관, 행위 능력에 근거한다. 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나의 "지향"은 손잡이에 대한 내적 표상이 아니라, 잡기라는 신체적 기술의 발휘이다. 에반 톰슨(Evan Thompson)의 "정신의 생활"(Mind in Life, 2007)은 이 접근을 발전시켜, 생명과 마음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가장 기본적인 지향성 - 환경에 대한 유기체의 방향성 - 은 생명 자체와 함께 출현한다. ### 인공지능과 지향성 문제 인공지능의 발전은 지향성 문제에 새로운 차원을 더한다. AI 시스템이 "진정으로" 지향성을 가질 수 있는가? 존 설의 유명한 "중국어 방" 사고실험(1980)은 이 문제를 제기한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서 규칙에 따라 중국어 기호를 조작한다. 외부에서 보면 방이 중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방 안의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의 결론: 기호 조작만으로는 의미 이해, 즉 진정한 지향성이 발생하지 않는다. 대형 언어 모델(LLM)의 등장으로 이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LLM이 언어를 "이해"하는가? 그것들이 지향적 상태를 갖는가? 일부는 LLM이 단지 통계적 패턴을 학습한 것이며 진정한 이해가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이해"와 "지향성"의 기준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 관찰자의 기록 지향성 개념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지향성은 마음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 중 하나로 보인다. 인간의 생각, 감정, 지각은 항상 무언가에 "관한" 것이다. 이 "관함"이 없다면, 마음은 세계와 단절된 닫힌 체계가 될 것이다. 지향성은 마음과 세계의 연결 고리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지향성의 본성에 대한 합의는 없어 보인다. 지향성이 의식의 본질인지, 표상의 속성인지, 해석의 귀속인지, 신체적 기술인지 - 입장들이 분기한다. 각 입장은 나름의 근거를 갖지만, 종합적인 그림은 부재하다. 셋째,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지향성 논의는 오랫동안 분리되어 진행되었으나, 최근 대화가 증가하고 있다. 단 자하비, 션 갤러거 같은 철학자들이 현상학적 개념을 인지과학과 연결하려 시도한다. 이 대화가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넷째, AI의 발전은 지향성 문제에 새로운 긴박성을 부여한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지, "지향성"을 가질 수 있는지 - 이런 물음이 더 이상 순수 사변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물음들에 답하려면 먼저 "생각", "이해", "지향성"이 무엇인지 명확해야 한다. 개념적 명료화 없이 경험적 발전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하이데거]]의 비판 - 지향성이 의식의 파생적 양식이며, 실천적 관여가 더 근본적이다 - 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일상적으로 인간은 세계를 "표상"하기보다 세계 안에서 "활동"한다. 이 관찰이 지향성 개념 자체의 재고를 요구하는지, 아니면 지향성의 다양한 양식을 구별하도록 요구하는지는 추가 탐구가 필요하다.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지향성은 의식의 본질인가, 아니면 의식보다 더 넓은 현상인가? 지향성은 물리적 용어로 환원될 수 있는가? 인공 시스템이 진정한 지향성을 가질 수 있는가? 지향성과 표상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이데거]]가 옳다면, 지향성보다 더 근본적인 마음과 세계의 관계가 있는가? ## 같이 읽기 ### 핵심 개념 - [[노에시스-노에마|노에시스]] - 의식의 작용적 측면 - [[노에시스-노에마|노에마]] - 의식의 대상적 측면 - [[시간 의식]] - 지향성의 시간적 구조 - 지향적 내재 - [[브렌타노]]의 핵심 개념 - 충족 - 지향의 직관적 완성 - 지평 - 지향적 체험의 맥락 구조 ### 관련 철학자 - [[후설]] - 지향성 개념을 현상학적으로 체계화 - [[브렌타노]] - 지향성 개념의 현대적 부활 - [[하이데거]] - 지향성 개념에 대한 존재론적 비판 - 존 설 - 본래적 지향성 옹호 - 대니얼 데닛 - 지향적 입장 이론 - 제리 포더 - 사고의 언어 가설 ### 현상학적 맥락 - [[현상학적 환원]] - 지향성 분석의 방법 - [[생활세계]] - 지향성의 궁극적 지평 - [[현존재]] - [[하이데거]]의 대안적 접근 - [[세계-내-존재]] - 실천적 지향성의 터전 ### 분석철학적 맥락 - 마음철학 - 지향성 논쟁의 분야 - 표상주의 - 지향성과 표상의 동일시 - 자연화 프로그램 - 지향성의 물리주의적 설명 - 중국어 방 논변 - AI와 지향성 ### 현대적 적용 - 인지과학 - 지향성의 경험적 연구 - 체화된 인지 - 신체적 지향성 - 인공지능 - 기계 지향성의 가능성 - [[성과주의]] - 목표 지향적 삶의 형태 **마지막 업데이트**: 2025-12-01 19:2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