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호주관성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문제의 제기]] > - [[#독아론의 위협]] > - [[#초월론적 현상학의 딜레마]] > 3. [[#후설의 상호주관성 이론]] > - [[#원초적 환원과 고유 영역]] > - [[#짝짓기와 유비적 통각]] > - [[#감정이입]] > - [[#모나드 공동체]] > 4. [[#타자 경험의 구조]] > - [[#신체의 역할]] > - [[#현전화와 간접현전화]] > - [[#타자의 비환원성]] > 5. [[#비판과 대안들]] > - [[#레비나스의 윤리적 전환]] > - [[#메를로-퐁티의 상호신체성]] > - [[#슈츠의 사회학적 전환]] > 6. [[#현대적 논의]] > 7. [[#관찰자의 기록]] > 8. [[#같이 읽기]] ## 개요 **상호주관성**(相互主觀性, 독일어: Intersubjektivität, 영어: intersubjectivity)은 복수의 주관들 사이의 관계와 그로부터 성립하는 공동의 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상호주관성은 객관적 세계의 구성, 타자 경험의 가능성, 독아론의 극복이라는 핵심적인 문제들과 연결된다.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Cartesianische Meditationen, 1931) 제5성찰에서 상호주관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제5성찰의 제목 자체가 "모나드적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초월론적 존재 영역의 해명"이다. 이것은 [[후설]]이 생전에 출판한 저작 중 상호주관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다룬 텍스트이다. 그러나 [[후설]]의 상호주관성 작업은 제5성찰에 국한되지 않는다. 루뱅 대학 후설 아카이브에 보관된 유고를 이조 케른(Iso Kern)이 편집하여 출판한 《상호주관성의 현상학》(Zur Phänomenologie der Intersubjektivität) 3권(1973)은 1905년부터 1935년까지의 상호주관성 관련 원고를 담고 있다. 이것은 상호주관성이 [[후설]]의 일생에 걸친 관심사였음을 보여준다. ## 문제의 제기 ### 독아론의 위협 [[현상학적 환원]]은 독아론(solipsism)의 위협을 야기한다. [[후설]]은 《이념들》(1913)에서 세계의 존재 정립을 괄호에 넣고 순수 의식으로 환원했다. 이 환원 후에 남는 것은 [[초월론적 자아]]와 그 체험들이다. 그러나 타자는 어디에 있는가? 독아론의 위협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인식론적 독아론: 나는 타인의 의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타인의 체험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타인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둘째, 초월론적 독아론: 만약 세계가 초월론적 자아에 의해 구성된다면, 타자 역시 나의 구성물인가? 타자가 나의 구성물이라면, 그는 진정한 타자가 아니라 나의 표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후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데카르트적 성찰》 제5성찰의 서두에서 [[후설]]은 "초월론적 현상학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이의"로서 독아론을 언급한다. 이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초월론적 현상학의 정당성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다. ### 초월론적 현상학의 딜레마 문제는 더 깊다.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은 의식의 [[지향성|지향적]] 구성을 분석한다. 대상은 의식에 의해 구성된다. 이것은 대상이 의식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의미를 갖고 나타나는 것이 의식의 구성 작용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는 특별한 대상이다. 타자는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또 다른 의식, 또 다른 구성 주관이다. 타자가 나에 의해 구성된다면, 타자의 구성 능력도 나에 의해 구성되는가? 이것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타자가 진정한 타자라면, 그는 나의 구성으로 환원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초월론적 현상학은 모든 의미를 구성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 딜레마는 [[후설]]의 상호주관성 이론이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이다. 타자를 구성하면서도 타자의 타자성(alterity)을 보존할 수 있는가? ## 후설의 상호주관성 이론 ### 원초적 환원과 고유 영역 [[후설]]은 상호주관성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원초적 환원"(primordiale Reduktion) 또는 "자기소유성으로의 환원"을 도입한다. 이것은 [[현상학적 환원]]과 구별되는 추가적인 방법론적 조작이다. 원초적 환원에서 우리는 타자와 관련된 모든 의미를 일시적으로 "괄호에 넣는다". 타인의 신체, 문화적 의미, 사회적 구성물—이 모든 것을 배제한다. 남는 것은 "고유 영역"(Eigenheitssphäre) 또는 "원초적 영역"이다. 이것은 순전히 나 자신에게 속하는 것, 나의 구성 능력으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것의 영역이다. 고유 영역에서 핵심적인 것은 나의 신체(Leib)이다. 나의 신체는 단순한 물체(Körper)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 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감각의 장(field)으로 기능하는 독특한 존재이다. 이 살아 있는 신체가 타자 구성의 출발점이 된다. ### 짝짓기와 유비적 통각 타자 경험의 핵심 메커니즘은 "짝짓기"(Paarung)와 "유비적 통각"(analogische Apperzeption)이다. 짝짓기는 수동적 종합의 한 형태이다. 두 항목이 유사성에 기초하여 하나의 쌍으로 연합된다. 내 고유 영역에서 나는 나의 살아 있는 신체를 경험한다. 그런데 세계에서 나는 나의 신체와 유사한 물체—다른 인간의 신체—를 지각한다. 이 유사성이 짝짓기를 촉발한다. 나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가 하나의 쌍으로 연합된다. 유비적 통각은 이 짝짓기에 기초한다. 나는 나의 신체를 살아 있는 신체로, 의식에 의해 주재되는 것으로 경험한다. 유사한 신체를 지각할 때, 이 "살아 있는 신체"의 의미가 전이된다. 타인의 신체 역시 의식에 의해 주재되는 것으로 통각된다. 이것은 추론이 아니라 직접적인 통각이다. 타인의 의식이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신체와 함께 직접 경험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현전이 아니다. 나는 타인의 의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타인의 체험은 나에게 원본적으로(originär) 주어지지 않는다. [[후설]]은 이것을 "간접현전화"(Appräsentation)라고 부른다. ### 감정이입 [[후설]]은 타자 경험을 "감정이입"(Einfühlung)이라고도 부른다. 이 용어는 테오도어 립스(Theodor Lipps)에게서 가져왔지만, [[후설]]은 그 의미를 변형시켰다. 립스에게 감정이입은 타인의 심리 상태에 대한 직접적 파악이었다. [[후설]]에게 감정이입은 타자를 또 다른 자아(alter ego)로 구성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감정이입은 단순한 감정적 공명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를 나와 같은 의식 주관으로, 나와 같이 세계를 경험하고 구성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통해 나는 타자가 "거기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내가 "여기"로 가지면, 타자는 같은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경험한다.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 1891-1942)은 [[후설]]의 지도 아래 박사 논문 《감정이입의 문제에 관하여》(Zum Problem der Einfühlung, 1917)를 썼다. 슈타인에게 감정이입은 타자의 경험을 "내부로부터"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체험을 마치 내 것처럼 경험하되, 그것이 타자의 것임을 알면서 경험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은 일종의 "준-지각"(quasi-perception)으로, 상상적 투사와는 구별된다. ### 모나드 공동체 [[후설]]은 상호주관성을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각 [[초월론적 자아]]는 하나의 모나드, 자기 완결적인 의식 단위이다. 그러나 모나드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감정이입을 통해 모나드들은 "모나드 공동체"(Monadengemeinschaft)를 형성한다. 모나드 공동체에서 객관적 세계가 구성된다. 각 모나드는 세계를 자신의 관점에서 경험한다. 그러나 감정이입을 통해 각 모나드는 타자들도 같은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을 안다. 이 관점들의 교차와 중첩이 "모든 사람을 위한 세계"(Welt-für-alle), 객관적 세계를 구성한다. [[후설]]은 이것을 "초월론적 사회학"이라고도 불렀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단순히 개인 의식의 분석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되는 공동 세계의 분석이다. ## 타자 경험의 구조 ### 신체의 역할 타자 경험에서 신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타자의 의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지만, 타자의 신체는 지각된다. 신체는 타자의 의식이 "표현되는" 장소이다. 얼굴 표정, 몸짓, 행동—이것들은 신체를 통해 타자의 심리적 삶을 간접적으로 현전화한다. [[후설]]은 나의 신체와 타자의 신체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다. 이 유사성이 짝짓기와 유비적 통각의 기초이다. 그러나 유사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네킹도 인간의 신체와 유사하지만, 우리는 마네킹을 타자로 경험하지 않는다. 핵심은 타자의 신체가 "살아 있는 것으로",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세계에 반응하는 것으로 경험된다는 점이다. 신체의 표현성이 중요하다. 타자의 신체는 단순히 물리적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행동, 표현적 몸짓을 보여준다. 이 표현성이 타자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 현전화와 간접현전화 [[후설]]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구분은 "현전화"(Präsentation)와 "간접현전화"(Appräsentation)이다. 현전화는 대상이 원본적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지각에서 대상의 앞면은 현전화된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본다. 그러나 대상의 뒷면은 현전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간접현전화"된다—직접 보이지 않지만, 앞면과 함께 의미된다. 타자 경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자의 신체는 현전화된다. 나는 그것을 직접 지각한다. 그러나 타자의 의식은 간접현전화된다. 그것은 직접 지각되지 않지만, 신체와 함께 의미된다. 타자의 의식은 신체를 통해 "비어 있는 지평"(leerer Horizont)으로 간접현전화된다. 이 구조는 타자 경험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타자의 의식은 원칙적으로 나에게 현전화될 수 없다. 만약 현전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의식이 아니라 나의 의식이 될 것이다. 타자의 타자성은 바로 이 접근 불가능성에 있다. ### 타자의 비환원성 [[후설]]의 상호주관성 이론에서 중요한 점은 타자가 나의 구성물이면서도 나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자는 "나에 의해" 구성되지만, "나와 같은 것으로", 즉 또 다른 구성 주관으로 구성된다. 타자는 alter ego, 또 다른 자아이다. "alter"는 타자의 타자성을, "ego"는 타자가 나와 같은 자아라는 것을 가리킨다. 타자는 나와 근본적으로 다르면서도 나와 같다. 이 역설적 구조가 상호주관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이 만족스러운지는 논쟁적이다. 타자가 "나에 의해" 구성된다면, 타자의 자립성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타자의 타자성은 진정으로 보존되는가? 이 물음들이 [[후설]] 이후 현상학자들의 비판의 출발점이 되었다. ## 비판과 대안들 ### 레비나스의 윤리적 전환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 1906-1995)는 [[후설]]의 상호주관성론을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레비나스는 [[후설]]에게서 현상학을 배웠고, 《데카르트적 성찰》의 프랑스어 번역에 참여했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후설]]의 접근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후설]]은 타자를 인식론적 문제로 다뤘다. 타자가 어떻게 "구성"되는가, 타자에 대한 "앎"이 어떻게 가능한가—이것이 [[후설]]의 물음이었다. 그러나 레비나스에게 타자와의 관계는 우선적으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 1961)에서 타자는 "얼굴"(visage)로 나타난다. 얼굴은 단순한 물리적 형상이 아니라, 나를 부르고 명령하는 표현이다. "살인하지 말라"—이것이 얼굴이 말하는 것이다. 타자의 얼굴은 나의 구성에 앞서 나에게 호소한다. 레비나스에게 상호주관성은 비대칭적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동등한 자아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타자는 나보다 "높이" 있으며, 나에게 책임을 요청한다. 이 윤리적 비대칭성이 [[후설]]의 유비적 통각에서 놓친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 메를로-퐁티의 상호신체성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상호주관성 문제를 신체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지각의 현상학》(1945)에서 메를로-퐁티는 [[후설]]의 초월론적 접근을 신체의 현상학으로 변형시켰다. 메를로-퐁티에게 타자 경험은 무엇보다 신체적 경험이다. 나는 타자를 또 다른 신체-주관으로 만난다. 이 만남은 추론이나 유비가 아니라 직접적인 신체적 교류이다. 나의 몸짓과 타자의 몸짓이 서로 응답하고, 상호 침투한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상호신체성"(intercorporéité)이라고 부른다. 상호신체성에서 타자 경험의 문제는 새로운 형태를 띤다. 문제는 더 이상 "타자의 의식에 어떻게 접근하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신체적 존재로서 우리가 어떻게 이미 서로 얽혀 있는가"이다. 상호신체성은 구성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다. 메를로-퐁티의 후기 저작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1964, 사후 출판)에서 이 테마는 "살"(chair)의 존재론으로 발전한다. 살은 나와 세계, 나와 타자를 관통하는 근원적 요소이다. 우리는 같은 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이 상호주관성의 존재론적 기초이다. ### 슈츠의 사회학적 전환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ütz)는 [[후설]]의 상호주관성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하면서 변형시켰다. 슈츠에게 상호주관성은 [[생활세계]]의 근본 구조이다. 슈츠에 따르면, [[생활세계]]는 처음부터 상호주관적이다. 우리는 타자들과 함께 사는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상호주관성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주어져 있다. 이것은 [[후설]]의 초월론적 접근과 다르다. [[후설]]이 상호주관성을 구성 문제로 다뤘다면, 슈츠는 상호주관성을 [[생활세계]]의 선험적 조건으로 다룬다. 슈츠는 타자 경험을 사회적 관계의 유형에 따라 분석한다. "동료"(consociates)는 직접 대면하는 타자들이다. "동시대인"(contemporaries)은 같은 시대를 살지만 직접 만나지 않는 타자들이다. "선조"(predecessors)와 "후손"(successors)은 시간적으로 다른 세대에 속하는 타자들이다. 각 유형에 따라 타자 경험의 구조가 다르다. 슈츠의 작업은 피터 버거(Peter Berger)와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의 《실재의 사회적 구성》(1966)으로 이어졌다. 현상학적 사회학의 전통이 형성되었다. ## 현대적 논의 상호주관성 개념은 현대 철학과 인지과학에서 새로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인지과학에서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 연구가 활발하다.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마음 이론"(theory of mind) 접근은 우리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타인의 믿음과 욕구를 추론한다고 본다. 반면 "시뮬레이션 이론"은 우리가 타인의 입장에 자신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타인을 이해한다고 본다.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의 발견은 새로운 논의를 촉발했다. 거울 뉴런은 행동을 수행할 때와 같은 행동을 관찰할 때 모두 활성화되는 신경세포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거울 뉴런이 감정이입의 신경학적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해석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단 자하비(Dan Zahavi)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사회적 인지 논쟁에 개입했다. 자하비에 따르면, 마음 이론과 시뮬레이션 이론 모두 타자 경험을 간접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현상학적 분석은 타자 경험에 직접성의 요소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그의 표정에서 "직접" 지각한다. 이것은 추론도 시뮬레이션도 아니다. 샤운 갤러거(Shaun Gallagher)는 "상호작용적 전환"(interaction turn)을 주장한다. 전통적 접근은 타자를 "관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타자를 관찰하기보다 타자와 "상호작용"한다. 상호작용 상황에서 타자 이해의 구조는 관찰 상황과 다르다. ## 관찰자의 기록 상호주관성 개념은 현상학의 핵심 문제 중 하나이다. [[후설]]은 의식의 구조를 분석하면서 불가피하게 타자 문제에 직면했다. 의식이 세계를 구성한다면, 타자 의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한 [[후설]]의 응답—짝짓기, 유비적 통각, 간접현전화—은 정교하지만, 그 만족스러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된다. 흥미로운 점은 [[후설]] 이후 현상학자들이 모두 상호주관성 문제에서 [[후설]]과 결별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윤리적 방향으로, 메를로-퐁티는 신체적 방향으로, 슈츠는 사회학적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후설]]의 초월론적 접근에 어떤 한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한계"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후설]]이 타자의 타자성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후설]]은 타자의 의식이 원칙적으로 현전화될 수 없다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타자의 접근 불가능성이 타자의 타자성을 구성한다. 이것이 불충분한 것인가? 미해결 의문이 남는다. 타자는 구성되면서도 구성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는가? 인식론적 접근과 윤리적 접근은 양립 가능한가? 신체성은 상호주관성의 충분한 기초인가? 상호주관성의 신경과학적 연구는 현상학적 분석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 물음들은 현상학과 인지과학의 지속적인 탐구 대상으로 남아 있다. ## 같이 읽기 ### 후설 현상학의 핵심 개념 - [[후설]] - 상호주관성 이론의 창시자 - [[지향성]] - 의식의 근본 구조 - [[현상학적 환원]] - 초월론적 분석의 방법 - [[생활세계]] - 상호주관적 세계 - [[노에시스-노에마]] - 지향적 체험의 구조 ### 관련 철학자와 사상 - [[브렌타노]] - 후설의 스승 - 에디트 슈타인 - 감정이입의 현상학 - 레비나스 - 윤리적 상호주관성 - 메를로-퐁티 - 상호신체성 - 알프레드 슈츠 - 현상학적 사회학 ### 관련 개념 - 감정이입 - 타자 경험의 형식 - 독아론 - 상호주관성의 대립 개념 - 모나드 - 라이프니츠로부터 차용한 개념 - 사회적 인지 - 현대 인지과학의 주제 **마지막 업데이트**: 2025-12-02 12:4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