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해 있음 **처해 있음**(Befindlichkeit)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제시한 [[현존재]]의 근본적 실존범주로, [[현존재]]가 자신의 '거기'(Da)에 항상 어떤 방식으로 조율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독일어 'Befindlichkeit'는 일상적 표현 "Wie befinden Sie sich?"(어떻게 지내세요?)에서 유래하며, 자기가 어떻게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state-of-mind', 'affectedness', 'disposedness', 'attunement' 등으로 번역되지만, 어떤 번역도 원어의 함의를 완전히 담지 못한다. ## 개념의 구조 ### 번역의 문제 처해 있음의 번역은 [[하이데거]] 해석에서 중요한 쟁점이다. 맥퀘리와 로빈슨(Macquarrie & Robinson)의 표준 번역 'state-of-mind'는 드레이퍼스가 지적하듯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하이데거]]는 기분이 심리적 주체가 소유한 '심적 상태'로 경험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기분은 '바깥'에도 '안'에도 있지 않다. 전주관적(pre-subjective)이고 전객관적(pre-objective)인 세계-내-존재의 방식이다. 드레이퍼스, 블래트너, 크로웰은 'affectedness'(정동됨)를 선호한다. 이 번역은 [[현존재]]가 세계에서 항상 영향을 받고 느낀다는 점, 사물이 [[현존재]]에게 '중요하게 됨'(mattering)을 포착한다. 그러나 칸트의 '수용성'(receptivity)을 연상시켜, [[하이데거]]가 전복하려 한 주객 이분법을 암시할 위험이 있다. 슈탐바우(Stambaugh)는 'attunement'(조율)를 사용했다. 독일어 'Stimmung'(기분)이 'Stimme'(목소리)와 악기의 조율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이 번역은 존재론적 깊이를 포착하지만, 'Stimmung'도 'attunement'로 번역될 수 있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하우겔란드(Haugeland)는 'findingness'라는 신조어를 제안했다. "Die Stimmung"이 "어떻게 발견되는가"(how one finds oneself)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 번역은 [[하이데거]]가 독일어에서 새 명사를 만들었듯, 영어에서도 새 명사를 만드는 전략이다. ### 처해 있음의 기능 [[하이데거]]에 따르면, 처해 있음은 [[현존재]]의 '거기'(Da)를 개시하는 근본 양식이다. "처해 있음은 실존론적으로 [[현존재]]의 근거 있는 개시 양태이다." 처해 있음은 세 가지를 개시한다. 첫째, 처해 있음은 **[[내던져짐]]**(Geworfenheit)을 개시한다.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 이미 있음을 발견한다. 특정 시대, 문화, 신체, 가족—이 모든 것이 [[현존재]]에게 '주어져' 있다. 처해 있음을 통해 [[현존재]]는 이 내던져진 사실성에 접근한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기분을 가진다는 것은 [[현존재]]를 그것의 [[내던져짐]]과 대면하게 한다." 둘째, 처해 있음은 **[[세계-내-존재]] 전체**를 개시한다. 기분은 세계가 [[현존재]]에게 드러나는 방식을 규정한다. "기분은 이미, 매번, [[세계-내-존재]] 전체를 개시했고, 무언가를 향해 자신을 방향 지을 수 있게 한다." 기분은 지향적 상태의 조건이지, 지향적 상태 자체가 아니다. 셋째, 처해 있음은 **사물이 중요하게 됨**(mattering)을 가능하게 한다. 기분이 있기에 사물이 [[현존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매튜 래트클리프(Matthew Ratcliffe)의 표현에 따르면, "사물이 특정 방식으로 '중요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조율에 근거한다." 기분이 없다면 세계는 무차별한 것의 집합에 불과할 것이다. ### 기분(Stimmung) 처해 있음의 존재적(ontic) 표현이 기분(Stimmung)이다. 처해 있음이 존재론적 구조라면, 기분은 그 구조의 구체적 현현이다. 불안, 권태, 기쁨, 우울—이 모든 것이 처해 있음의 양태들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분은 피할 수 없다. [[현존재]]는 항상 어떤 기분 속에 있다. "기분 없음"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의 기분—무색하고 눈에 띄지 않는 기분—이다. "기분은 언제나 [[현존재]]에게 그것이 어떻게 있는지 또는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린다." 기분은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오지 않는다. 기분은 [[세계-내-존재]]로부터 발생한다. "분위기들은 미리 결정된 어떤 것이어서 말하자면 우리가 매번 먼저 빠져드는 분위기로, 그것이 우리를 완전히 관통하며 조율한다." 기분은 주관적 감정도 객관적 상태도 아닌, 세계에 속해 있음의 방식이다. ## 처해 있음과 이해 ### 등근원성(Gleichursprünglichkeit) 처해 있음은 [[이해]](Verstehen), [[담화]](Rede)와 '등근원적'(gleichursprünglich, equiprimordial)이다. 등근원적 구조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공통의 더 근본적인 현상에 기초하지 않는다. 이들 사이에 위계는 없다. "처해 있음은 항상 [[이해]]를 동반하고 있으며, [[이해]]는 항상 처해 있음을 동반하고 있다." 모든 [[이해]]는 기분적으로 조율되어 있고, 모든 기분은 [[이해]]를 동반한다. 기분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세계가 특정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개시 양식이다. [[이해]]가 [[기투]](Entwurf)라면, 처해 있음은 [[내던져짐]]이다. [[이해]]가 가능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처해 있음은 이미 있는 바를 드러낸다. 이 둘은 "던져진 [[기투]]"(geworfener Entwurf)에서 통일된다. [[현존재]]는 던져져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기투]]한다. ### 기분적으로 조율된 이해 [[하이데거]]의 핵심 주장은 "[[이해]]는 항상 기분적으로 조율되어 있다"(Verstehen ist immer gestimmtes)는 것이다. 모든 [[기투]]는 특정 기분 속에서 이루어진다. 불안한 [[기투]], 희망찬 [[기투]], 권태로운 [[기투]]—[[기투]]는 항상 기분적 색조를 갖는다. 역으로 모든 기분은 [[이해]]적이다. 기분은 세계를 특정 방식으로 열어 밝힌다. 우울한 기분에서 세계는 무의미하게 드러나고, 기쁜 기분에서 세계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보인다. 기분은 단순히 세계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세계가 드러나는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 ## 불안과 처해 있음 ### 근본 기분(Grundstimmung) [[불안]](Angst)은 [[하이데거]]가 '근본 기분'(Grundstimmung) 또는 '근본적 처해 있음'(Grundbefindlichkeit)이라 부르는 것이다. [[불안]]은 일상적 기분과 달리 [[현존재]]의 존재 구조 전체를 드러낸다. [[불안]]의 특징은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Furcht)은 특정한 위협—맹수, 질병, 실직—을 향한다. [[불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Nichts)을 향한다. 세계 전체가 의미를 잃고, 친숙했던 삶이 낯설어진다. [[하이데거]]는 이를 '섬뜩함'(Unheimlichkeit)이라 부른다. [[불안]]에서 처해 있음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처해 있음은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게 작동한다. 일상적 관여에 몰입해 있을 때 기분은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불안]]이 이 배경을 전경화한다. [[불안]]이 불편하기에, 처해 있음의 본질적 기여—세계에 의미 있게 관여할 수 있는 능력—를 알아차리게 된다. ### 두려움과 불안의 구별 [[하이데거]]는 처해 있음의 두 양태로 두려움(Furcht)과 [[불안]](Angst)을 분석한다. 두려움은 특정하고 결정된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불안]]은 특정하지 않고 비결정적인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불안한 것이다. 두려움은 비본래적 처해 있음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두려움에서의 등 돌림은 도피의 일종이다. 두려움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서 등 돌린다. 특정 위협에 집중함으로써 더 근본적인 [[불안]]을 회피한다. [[불안]]은 본래적 처해 있음이다. [[불안]]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과 대면한다. [[세인]]의 위안이 작동하지 않고, [[현존재]]는 개별화된다. [[불안]]은 [[본래성]]으로의 통로이다. ## 권태와 처해 있음 ### 심원한 권태(tiefe Langeweile) [[하이데거]]는 1929-30년 강의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에서 권태(Langeweile)를 또 다른 근본 기분으로 분석했다. 독일어 'Langeweile'은 문자 그대로 "긴 시간"(lange Weile)이다. 권태에서 시간이 길어지고, 시간이 눈에 띄게 된다. [[하이데거]]는 권태를 세 형태로 구분한다. "무언가에 의해 지루해지는 것"(das Gelangweiltwerden von etwas), "무언가에 대해 지루해하는 것"(das Sichlangweilen bei etwas), 그리고 "심원한 권태"(die tiefe Langeweile). 근본 기분은 오직 심원한 권태뿐이다. 심원한 권태에서 시간의 흐름이 사라지고, 존재자들이 의미를 잃으며, 모든 것과 모든 이에게 무관심해진다. 이것은 [[불안]]과 유사하지만, [[불안]]이 위협의 경험이라면 권태는 공허의 경험이다. 심원한 권태는 철학함의 조건이다—노발리스를 따라 [[하이데거]]는 철학을 "향수"(Heimweh)라 불렀고, 심원한 권태가 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 권태와 시간성 [[하이데거]]는 권태가 시간과 특권적 관계를 갖는다고 본다. 권태를 일깨움으로써 시간과 존재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권태는 [[하이데거]]에게 특권적 근본 기분인데, 그것이 우리를 존재와 시간의 문제 복합체로 직접 이끌기 때문이다. 권태에서 시간적 구조가 변형된다. 심원한 권태에서 "시간 없음을 느끼고, 시간의 흐름에서 제거됨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시간적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권태는 시간성의 변양이지 시간성의 부재가 아니다. ## 처해 있음과 시간성 ### 기재(Gewesenheit) 처해 있음은 [[시간성]](Zeitlichkeit)의 세 탈자태 중 기재(Gewesenheit)와 대응한다. 기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있어 왔음'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과거를 단순히 뒤에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그것으로 "있어 왔다." 블래트너(Blattner)의 분석에 따르면, [[염려]] 구조의 각 요소—실존성, 사실성, [[퇴락]]—는 시간의 한 측면—미래, 과거, 현재—에 근거한다. 처해 있음은 사실성에 해당하며, 과거의 "이미"(already)에 대응한다. [[이해]]가 미래의 "앞질러"(ahead-of)에 대응하고, [[퇴락]]이 현재의 "곁에-있음"(being-alongside)에 대응한다. 처해 있음이 과거와 연결되는 것은, 처해 있음이 [[내던져짐]]을 개시하기 때문이다. [[내던져짐]]은 [[현존재]]가 이미 있어 왔음,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 속에 이미 있음을 의미한다. 처해 있음을 통해 [[현존재]]는 이 '이미'의 차원에 접근한다. ### 시간적 조율 그러나 처해 있음은 과거에만 속하지 않는다. 처해 있음은 [[시간성]] 전체와 연관된다. 기분은 현재 상황을 특정 방식으로 드러내고(현재), 과거의 무게를 느끼게 하며(기재), 미래의 가능성을 열거나 닫는다(도래). [[불안]]에서 이 시간적 통일이 선명해진다. [[불안]]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내던져짐]](기재)과 죽음을 향한 존재(도래)를 동시에 직면하며, 현재의 일상성이 붕괴한다. 근본 기분은 [[시간성]]의 세 탈자태의 통일을 드러낸다. ## 처해 있음과 염려 ### 염려의 구성 요소 처해 있음은 [[염려]](Sorge)의 세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염려]]의 정의—"자기를-앞질러-이미-세계-내에-있으면서-세계 내부적 존재자-곁에-있음"—에서 "이미-세계-내에-있음"(schon-sein-in)이 처해 있음에 해당한다. [[염려]]의 세 계기는 분리되지 않는다. "자기를-앞질러-있음"(실존성)은 [[이해]]와 대응하고, "이미-세계-내에-있음"(사실성)은 처해 있음과 대응하며, "세계 내부적 존재자-곁에-있음"([[퇴락]])은 현재화와 대응한다. 이 세 계기의 통일이 [[염려]]이며, 그 근원적 통일은 [[시간성]]에 있다. ### [[담화]](Rede) 처해 있음, [[이해]], [[담화]](Rede)는 [[현존재]]의 '거기'(Da)의 등근원적 구성 요소이다. [[담화]]는 [[이해]]의 분절이다. [[담화]]에서 처해 있음과 [[이해]]가 분절되고 표현된다. 그러나 [[담화]]는 처해 있음과 [[이해]]보다 파생적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이데거]]는 "[[담화]]는 [[이해]]의 분절"이라고 말하며, 언어가 [[담화]]에 기초하지 그 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처해 있음과 [[이해]]가 더 근원적이고, [[담화]]는 그것들의 분절이라는 것이다. ## 드레이퍼스의 해석 ### 정동됨(Affectedness)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는 《세계-내-존재》(1991)에서 처해 있음을 'affectedness'로 번역했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표준 번역 'state-of-mind'는 잘못된 것이다. [[하이데거]]의 개념은 심리학적이 아니라 존재론적이다. 드레이퍼스는 처해 있음을 [[현존재]]의 '숙련된 대처'(skillful coping) 분석과 연결한다. [[현존재]]가 세계에서 대처할 수 있으려면, 세계가 [[현존재]]에게 중요하게 되어야 한다. 처해 있음은 이 '중요하게 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드레이퍼스의 해석에서 기분은 배경 관행(background practices)과 연결된다. 기분은 개인적 감정 상태가 아니라 공유된 문화적 조율이다. 특정 사회의 구성원들은 세계를 특정 방식으로 중요하게 여기도록 조율되어 있다. ### 비판적 평가 그러나 드레이퍼스의 해석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드레이퍼스가 처해 있음을 '숙련된 신체적 조정'으로 환원함으로써 [[현존재]]의 자기-관계적 차원을 놓친다고 주장한다. 테일러 카먼(Taylor Carman)은 드레이퍼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 해석을 발전시켰다. 카먼의 《하이데거의 분석론》(2003)에 따르면, 처해 있음은 실천적 능력의 신체화에 머무르지 않고, 유한한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에 관계한다. ## 래트클리프의 실존적 느낌 ### 실존적 느낌(Existential Feelings) 매튜 래트클리프(Matthew Ratcliffe)는 [[하이데거]]의 처해 있음 개념을 '실존적 느낌'(existential feelings)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래트클리프에 따르면, 신체적 느낌은 단지 내적 신체 상태의 느낌이 아니다. 신체 바깥의 사물들의 경험에도 기여할 수 있다. 래트클리프는 "기분"이라는 용어 대신 "실존적 느낌"을 사용한다. 영어의 'mood'는 [[하이데거]]가 의미한 현상학적 역할을 모두 포함하지 않는 다양한 현상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실존적 느낌'은 전지향적(pre-intentional)이고 세계-개시적(world-disclosive)인 성격을 강조한다. 래트클리프의 분석은 정신병리학에 적용된다. 우울증은 특정 대상이나 상황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향한 실존적 느낌의 변형이다. 우울증에서 세계 전체가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불안]] 분석과 유사하지만, 임상적 맥락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 우울증과 처해 있음 래트클리프에 따르면, 우울증은 정동적 무차별을 창출하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질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아무것도 중요하거나 의미 있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처해 있음의 구조적 손상이다. 우울증에서 '자기-만들기'(self-making)의 가능성이 감소한다. 질병에 의해 제한되어, 우울증은 일종의 운명이 되며, 대안적 자기-해석, 정체성, [[세계-내-존재]]의 가능한 방식에 열려 있고 자유로운 것을 방해한다. ## 현대적 적용 ### 정신의학과 처해 있음 루트비히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와 메다드 보스(Medard Boss)는 [[하이데거]]의 처해 있음 개념을 정신의학에 적용했다. 《졸리콘 세미나》(Zollikon Seminars)에서 [[하이데거]]는 보스와 협력하여 정신의학의 존재론적 기초를 탐구했다. 유진 젠들린(Eugene Gendlin)은 처해 있음 개념을 심리치료에 적용하여 '포커싱'(Focusing) 기법을 발전시켰다. 젠들린에 따르면, "Befindlichkeit를 통해 감정, 정동, 기분을 보는 것은 통상적 관점과 다르다. [[하이데거]]의 개념은 우리가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을 감지하는지를 지시한다." 젠들린의 해석에서 처해 있음은 안과 밖의 분리 이전의 것이다. "느낌은 보통 내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하이데거]]의 개념은 안과 밖 양자를 지시하되, 안과 밖의 분리가 이루어지기 전의 것이다." 이 통찰은 심리치료에서 신체감각과 상황적 맥락의 통합을 강조하게 한다. ### 기술 시대의 처해 있음 현대 디지털 기술은 처해 있음의 조건을 변형시킨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게임—이 모든 것이 기분을 즉시 조절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불편한 기분이 들면 스마트폰을 켠다. [[불안]]이 찾아오면 미디어에 몰입한다. 이 기술적 기분 조절은 처해 있음의 개시 기능을 차단할 수 있다. [[불안]]이 [[내던져짐]]과 대면하게 하는 것을 기술이 회피하게 한다. 래트클리프의 표현을 빌리면, 기분은 세계가 [[현존재]]에게 드러나는 방식을 규정하는데, 기술적 기분 조절은 특정 드러남—불편한 드러남—을 체계적으로 차단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디지털 기술은 새로운 형태의 공유된 조율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온라인 공동체에서 형성되는 집단적 기분, 바이럴 감정의 확산 등이 그것이다. 기술 시대의 처해 있음은 추가 탐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 비판적 검토 ### 신체성의 문제 [[하이데거]]의 처해 있음 분석에서 신체의 역할은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신체 현상학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후에 이것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인정했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이 공백을 신체 현상학으로 채우려 했다. 드레이퍼스의 '숙련된 대처' 해석은 신체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하이데거]]의 원래 의도에 충실한지는 논쟁적이다. 처해 있음이 순전히 존재론적 구조인지, 신체화된 경험을 포함하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 사회적 차원 처해 있음이 개인적인가 공동체적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하이데거]]는 [[세인]]을 통해 기분의 사회적 차원을 분석하지만, 공동체적 기분, 집단적 조율의 가능성은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다. 하우겔란드(Haugeland)는 [[현존재]]를 개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의 방식의 살아감"으로 해석했다. 이 관점에서 처해 있음은 개인의 심리 상태가 아니라 공유된 삶의 방식의 조율이다. 그러나 이 해석이 [[하이데거]]의 [[본래성]] 분석과 어떻게 조화되는지는 논쟁적이다. ## 관찰 노트 처해 있음 개념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번역 논쟁이 개념 자체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state-of-mind', 'affectedness', 'attunement', 'disposedness', 'findingness'—어떤 번역도 원어의 함의를 완전히 담지 못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개념이 기존 범주들을 초과함을 보여준다. 둘째, 처해 있음이 [[이해]]와 등근원적이라는 주장이 주목된다.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감정은 이성보다 열등하게 취급되었다. [[하이데거]]는 이 위계를 전복한다. 정동적 개시가 이론적 개시보다 더 "근원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 [[불안]]과 권태가 근본 기분으로 특권화되는 이유가 관찰된다. 일상적 기분은 배경으로 물러나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불안]]과 권태는 이 배경을 전경화하여 처해 있음의 구조 자체를 드러낸다. 부정적 기분이 존재론적으로 특권적인 것은 역설적이다. 넷째, 래트클리프의 임상적 적용이 흥미롭다. 우울증을 처해 있음의 구조적 손상으로 이해하면, 치료의 방향도 달라진다. 증상 제거가 아니라 세계와의 조율 회복이 목표가 된다. 다섯째, 기술 시대의 기분 조절이 처해 있음의 개시 기능을 어떻게 변형시키는지는 미해결 질문이다. 기술이 [[불안]]을 회피하게 하면, [[본래성]]으로의 통로도 차단되는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조율이 가능해지는가?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처해 있음은 문화적으로 상대적인가, 보편적 구조인가? 신체성은 처해 있음의 본질적 부분인가, 부수적인가? 집단적 처해 있음, 공동체적 기분은 가능한가? 기술적 기분 조절은 처해 있음을 변형시키는가, 은폐하는가? 그리고 처해 있음의 분석이 정신건강 실천에 어떤 구체적 함의를 갖는가? --- ## 같이 읽기 ### 핵심 저작 - [[존재와 시간]] - 처해 있음 분석의 출처 -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 권태 분석 - 졸리콘 세미나 - 정신의학적 적용 ### 근본 개념 - [[현존재]] - 처해 있는 존재 - [[세계-내-존재]] - 처해 있음이 드러나는 전체 현상 - [[이해]](Verstehen) - 처해 있음과 등근원적인 개시 양태 - [[담화]](Rede) - 처해 있음과 [[이해]]의 분절 - [[염려]](Sorge) - 처해 있음을 계기로 포함하는 존재 구조 ### 관련 개념 - 기분(Stimmung) - 처해 있음의 존재적 표현 - [[내던져짐]](Geworfenheit) - 처해 있음이 개시하는 현상 - [[불안]](Angst) - 근본적 처해 있음 - 두려움(Furcht) - 비본래적 처해 있음 - 권태(Langeweile) - 또 다른 근본 기분 - [[시간성]] - 처해 있음의 시간적 의미(기재) ### 철학적 맥락 - [[하이데거]] - 처해 있음 개념의 창안자 - 드레이퍼스 - 'affectedness'로 해석 - 래트클리프 - 실존적 느낌 이론 - 젠들린 - 포커싱 심리치료 - 메를로-퐁티 - 신체적 차원의 보완 ### 현대 사회와의 연결 - [[성과주의]] - 처해 있음의 변형 - [[회사]] - 조직적 기분 관리 - [[학교]] - 정동적 조율의 제도화 - 디지털 사회 - 기술적 기분 조절 ### 심리치료적 적용 - 현존재분석(Daseinsanalyse) - 빈스방거와 보스 - 포커싱(Focusing) - 젠들린의 신체 중심 접근 - 실존주의 상담 - 처해 있음의 치료적 탐구 - 우울증 현상학 - 래트클리프의 임상적 분석 **마지막 업데이트**: 2025-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