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와 시간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존재 물음의 재개]] > - [[#존재 망각과 그 극복]] > - [[#존재론적 차이]] > 3. [[#현존재 분석]] > - [[#세계-내-존재]] > - [[#도구와 손안에 있음]] > - [[#세인과 일상성]] > 4. [[#염려의 구조]] > - [[#실존성, 사실성, 퇴락]] > - [[#내던져짐과 기투]] > 5. [[#불안과 죽음]] > - [[#근본 기분으로서의 불안]] > - [[#죽음으로의 선구]] > 6. [[#시간성과 본래성]] > - [[#탈자적 시간성]] > - [[#결단성과 본래적 실존]] > 7. [[#현대 사회에서의 작동]] > - [[#기술과 존재 망각]] > - [[#디지털 세계와 현존재]] > 8. [[#영향과 전개]] > - [[#현상학의 전환]] > - [[#실존주의의 탄생]] > - [[#현대 철학에 대한 영향]] > 9. [[#관찰자의 기록]] > 10. [[#같이 읽기]] ## 개요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대표작이다. 보스턴 공공도서관은 이 책을 20세기 가장 많이 인용된 100권의 책 중 1위로 선정하였다. 출간 후 거의 100년이 지났으나, 매년 수백 편의 논문이 이 미완성 저작을 다룬다. [[하이데거]]의 질문은 단순해 보인다. "존재란 무엇인가?"(Was ist Sein?) 그러나 그는 2천 년 넘게 서양 철학이 이 질문을 망각했다고 진단한다. 플라톤 이후 철학은 "존재자"(Seiendes)에만 관심을 가졌고, "존재" 자체(Sein)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책상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신은 무엇인가 - 이런 질문은 많았지만, 그 모든 "~은 무엇인가"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라졌다. 원래 계획은 3부작이었으나, 출간된 것은 제1부 2편까지다. 하이데거는 출간 직후 이 접근법에 불만족하여 계획된 제2부 《시간과 존재》(Zeit und Sein)를 완성하지 못했다. 미완성이지만 이 단편만으로도 20세기 철학의 지형이 바뀌었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 장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페미니즘,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의 해석학,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미셸 푸코의 후기구조주의,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을 넘어 일본의 교토학파, 북미의 휴버트 드레이퍼스, 리처드 로티, 찰스 테일러에게도 영향이 관찰된다. 흥미로운 것은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는 존재론자였지, 인간의 실존을 다루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이 책을 실존의 철학으로 읽었다. 죽음, 불안, 본래성, 일상성 - 이런 주제들이 전후 유럽의 허무와 공명했다.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수용이 분리되는 현상이 관찰된다. ## 존재 물음의 재개 ### 존재 망각과 그 극복 하이데거는 책의 서두에서 질문한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즉시 답한다.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철학이 세 가지 편견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첫째, 존재는 가장 보편적 개념이므로 정의할 수 없다. 둘째, 존재는 자명하므로 정의할 필요가 없다. 셋째, 존재는 이미 이해된 것이므로 설명이 필요 없다. 이 세 편견이 존재 물음을 봉쇄했다. 하이데거의 반박은 간결하다. 가장 보편적인 것이 가장 이해되지 않은 것이다. 자명해 보이는 것이 가장 수상한 것이다. 인간은 "존재"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사용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제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 이해되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시작이다. 존재를 묻기 위해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Fundamentalontologie)이라는 방법을 제안한다. 존재는 항상 존재자의 존재이므로, 존재에 접근하려면 특정한 존재자를 통해야 한다. 하이데거가 선택한 존재자는 인간, 즉 '현존재'(Dasein)이다.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라는 용어 자체가 흥미롭다. 독일어 'Dasein'은 문자 그대로 '거기에-있음'(Da-sein)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이나 근대 철학의 '의식' 개념을 피하기 위해 일상 독일어에서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로 인해 《존재와 시간》의 문체는 극도로 난해해졌으나, 동시에 전통 철학의 선입견을 해체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 존재론적 차이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점은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z)라 불리는 구분이다. 그는 '존재자'(Seiendes)와 '존재'(Sein)를 엄격히 구별한다. 존재자란 책상, 나무, 인간처럼 '있는 것들'을 가리키고, 존재란 이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 자체의 의미를 가리킨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서양 철학사는 존재자에 대해서는 풍부하게 탐구해왔으나, 정작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중세의 신, 데카르트의 연장 실체와 사유 실체 - 이것들은 모두 '최고의 존재자'나 '존재자 일반'을 탐구한 것이지, 존재의 의미 자체를 물은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신-론적"(onto-theo-logical) 구조라고 부르며 비판한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그러나 존재는 존재자 없이는 '없다'. 존재자는 존재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이 순환적이면서도 비대칭적인 관계가 존재론적 차이의 핵심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차이가 하이데거 전기와 후기를 관통하는 유일한 일관된 주제라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구분이 일상적 언어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이 있다"고 말할 때 존재와 존재자를 혼용한다. "신이 있다", "시간이 있다", "문제가 있다" - 이 모든 문장에서 "있다"는 같은 단어이지만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하이데거는 이 언어적 혼란이 존재 망각의 증상이라고 본다. ## 현존재 분석 ### 세계-내-존재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다. 이것은 세 단어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적 현상이다. 현존재는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와 함께' 있다. 물건이 상자 안에 있듯이 공간적으로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적 주체 개념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주체(res cogitans)와 연장된 물질(res extensa)을 분리했다. 주체는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세계를 인식한다. 하이데거는 이 '자족적 주체' 개념을 거부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세계 속에 던져져 있으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이해한다. 현존재가 더 이상 내재적인 주관성에 갇혀 있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바깥 세계에 열려져 있으며 세계 속에 있는 사물들과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세계'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나 자연이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란 현존재에게 의미 있는 도구와 타자의 관계망이다. 인간은 진공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문화, 역사, 사회적 관계 등의 의미 그물망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 각 도구는 '~을 위하여'(um-zu)라는 연관 속에 있으며, 이 연관의 끝은 '나의 존재를 위하여'에 도달한다. ### 도구와 손안에 있음 현존재가 세계 내에서 만나는 사물들은 일차적으로 '손안에 있는 것'(Zuhandenes)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는 전통 철학이 상정한 '눈앞에 있는 것'(Vorhandenes), 즉 객관적 속성을 가진 사물과 대비된다. 망치를 예로 들면, 우리가 망치를 사용할 때 망치는 '무게 500g, 길이 30cm의 물체'로 의식되지 않는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 작업대, 못, 목재, 그리고 궁극적으로 집을 짓는 목적과의 연관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과학은 사물을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다룬다 - 객관적 속성, 측정 가능한 성질을 가진 대상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우리는 사물을 '손안에 있는 것'으로 경험한다. 도구는 항상 다른 도구들과의 '지시 연관'(Verweisungszusammenhang) 속에 있다. 망치는 못을 가리키고, 못은 널빤지를, 널빤지는 집을, 집은 거주를 가리킨다. 이러한 연관의 총체가 세계이다. 흥미로운 것은 도구가 제대로 작동할 때는 도구 자체가 의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망치질이 순조로울 때 망치는 '손에서 사라진다.' 도구가 고장 나거나 사용에 문제가 생겼을 때 비로소 도구 자체가, 그리고 세계 내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의식의 대상이 된다. 기호도 이 연관 속에서 이해된다. 기호는 망치와 망치질의 관계 같은 도구 사용의 연결 관계를 지시하는 기능이며, 이 지시 관계 속의 도구는 사용되지 않는 일상 속에서도 사용이 준비된 상태에 있다. 기호로 연결된 도구 사용에 장애가 생길 때, 도구 자체와 세계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는 존재'인 인간이 자체로서 의식의 대상이 된다. ### 세인과 일상성 현존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처음부터 타인과 함께 있다. '공동-현존재'(Mitsein)이다. 그러나 이 함께-있음은 양가적이다. 타인은 현존재를 풍요롭게 하지만, 동시에 평균화시킨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세인'(Das Man, '그들')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보통 그렇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 이런 비인칭적 규범이 Das Man이다. 세인은 누구도 아니면서 모두이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익명의 평균성이다. 그러나 이 평균성이 현존재의 일상을 지배한다.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좋아할지, 무엇을 생각할지 - 세인이 미리 결정해놓았다. 세인 속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아니다. '그들-자기'(Man-selbst)이다. 누구나 타자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들-자기로서 우리는 구조적으로 비본래적"이며, 세인은 이미 우리의 존재 이해를 결정하고 "의미와 이해가능성의 맥락을 통제"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적 삶의 존재양식을 '잡담'(Das Gerede), '호기심'(Die Neugier), '애매함'(Die Zweideutigkeit)으로 특징짓는다. 잡담에서 말해지는 것은 사태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다. 호기심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애매함은 모든 것이 알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이다. 주목할 점은 하이데거가 일상성을 단순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성은 현존재의 본질적 구성 계기이며, 우리는 일상성을 통해 세계에 친숙해지고 사회 속에서 기능할 수 있다. 일상적 삶에 내던져짐과 빠져듦으로 인해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문제는 일상성에 '빠져 있음'(Verfallen)으로써 본래적 자기를 망각하는 데 있다. ## 염려의 구조 ### 실존성, 사실성, 퇴락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Sorge, 마음씀)로 규정된다. 하이데거의 공식적 정의에 따르면, 염려란 "자기를 앞질러 이미 세계 내에 있으면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있음"이다. 간결하게 표현하면, "세계-내-존재는 본질적으로 염려이다." 이 복잡한 정의는 세 가지 계기를 포함한다: 실존성(Existenzialität), 사실성(Faktizität), [[퇴락]](Verfallen). 실존성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있다는 것, 즉 '자기를 앞질러 있음'을 가리킨다. 현존재는 단순히 현재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한다. 사실성은 현존재가 '이미 세계 내에 있음', 즉 특정한 상황과 조건 속에 이미 던져져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퇴락]]은 현존재가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있음', 즉 일상적 관심사와 세인의 방식에 빠져 있음을 가리킨다. 염려는 인간의 특정한 심리 상태가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 구조 자체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걱정한다'거나 '돌본다'는 것은 이 근본적 염려 구조의 파생태이다. 염려는 시간성의 세 차원 - 미래(존재 가능에로 앞질러 있음), 과거(이미 있었음), 현재(곁에 있음) - 과 연결된다. ### 내던져짐과 기투 '[[내던져짐]]'(Geworfenheit)은 현존재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 속에 이미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내던져짐]]은 현존재 실존의 근본적 사실성을 지시하며, 현존재는 사전 선택이나 숙고 없이 세계 속에 전달된다. 우리는 특정 시대, 특정 문화, 특정 가족 속에 태어났다. 이러한 조건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내던져짐]]은 '기분'(Stimmung)을 통해 개시된다. 우리는 항상 어떤 기분 속에 있으며, 기분은 우리가 세계 내에 있음을 드러낸다. 내던져짐은 염려(Sorge)의 실존적 구조에 통합되며, 염려는 현존재의 존재를 하나의 근원적 현상으로 통일한다. 염려는 세 가지 시간적 차원을 포함한다: 가능성을 기투하며 앞질러 있음(예기), 세계 내의 존재자 곁에 있음(퇴락), 그리고 내던져진 과거의 기반인 '이미 있었음'(Gewesenheit). '[[기투]]'(Entwurf)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내던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이미 던져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존재이다. 이 두 계기의 통일이 실존이다. 현존재는 자신이 이미 있는 바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이 될 수 있는 바를 향해 나아간다. 본래성으로의 이행에서, 현존재는 내던져짐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고, 스스로 결단하여 자신이 되기를 선택하며, '본래적 자기'를 향해 내던져짐을 추월한다. ## 불안과 죽음 ### 근본 기분으로서의 불안 '불안'(Angst)은 하이데거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근본 기분이다. 불안은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Furcht)과 구별된다. 두려움의 대상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이지만, 불안의 대상은 '아무것도 아님'(Nichts)이다. 맹수, 질병, 실직 - 두려움에는 명확한 위협이 있다. 불안은 대상이 없다. 아무것도 위협하지 않는데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불안에서 세계 내의 모든 존재자가 의미를 잃고, 친숙했던 세계가 낯설어진다. 하이데거는 이를 '섬뜩함'(Unheimlichkeit, 문자 그대로 '집처럼-있지-않음')이라 부른다. 불안이 불러오는 섬뜩함이라는 감정은 존재자가 무(無)임을 알려준다. 일상적 친숙함이 붕괴하며, 잡담, 호기심, 세인의 안정이 무너진다. 불안은 현존재를 일상적 빠져있음에서 끌어낸다. 불안에서 개시되는 것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다. 일상인들은 이러한 불안이 불편하기 때문에 회피하며, 다시 일상성 속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불안의 존재론적 기능은 긍정적이다. 불안은 공공성 속에 빠져 있는 그들-자기를 개별화시켜 현존재의 자기성인 존재 가능을 열어밝혀주며,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자기상실을 한 채 편안함을 추구하는 현존재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한 존재를 드러내준다. ### 죽음으로의 선구 불안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이다. 현존재는 '죽음을-향한-존재'(Sein-zum-Tode)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 추월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고유함), 다른 모든 가능성과의 연관을 끊으며(무연관성), 넘어갈 수 없는 마지막 가능성이다(추월 불가능성).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을 "사람은 죽는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이는 죽음을 익명화하고 무력화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죽지만 '나'는 당장 죽지 않는다. 세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위로하며, 마치 죽음이 "사회적 불편"인 것처럼 다룬다. 이런 태도는 그 사람이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질 용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죽음으로의 선구'(Vorlaufen zum Tode)는 죽음의 가능성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이다. 죽음을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유예하지 않고 지금 현재 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을 선취적으로 인수함으로써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자신에게 고유한 존재 가능을 떠맡게 된다. 죽음으로의 선구는 현존재를 세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연다. 죽음으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본래성을 가능하게 한다면, 이러한 본래성이라는 존재양태의 시간성, 즉 본래적 시간성과 죽음으로의 선구가 갖는 연관이 증시되어야 한다. ## 시간성과 본래성 ### 탈자적 시간성 《존재와 시간》의 핵심 테제는 현존재의 존재 의미가 '시간성'(Zeitlichkeit)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주장에 따르면, "시간이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한 지평"이다. 시간(또는 시간성)은 존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시간은 "존재에 대한 모든 이해 일반의 가능한 지평"이다. 전통 형이상학은 시간을 "지금-순간"(now-moment)의 연속으로 봤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지금들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지금들이며, 현재는 유일한 실재적 지금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통속적 시간 개념"이라고 부르며 비판한다. 이 개념은 시간을 공간화한다. 시계, 달력, 연대기 - 이 모든 것이 통속적 시간이다. 유용하지만 근원적이지 않다. 근원적 시간은 현존재의 시간, 즉 시간성이다. 시간성은 '탈자적'(ekstatisch)이다. '탈자'(ek-stasis)는 "밖으로-서-있음"을 의미한다. 시간성의 세 계기는 '도래'(Zukunft), '기재'(Gewesenheit), '현재화'(Gegenwärtigen)이다. '도래'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앞서 달려가는 것이다. '기재'는 현존재가 자신이 이미 던져져 있음을 떠안는 것이다. '현재화'는 현존재가 지금 관여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 탈자가 순차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현존재는 동시에 미래로 앞서가고, 과거를 떠안으며, 현재를 현전화한다. 시간성은 이 세 차원의 통일이다. 시간의 "탈자적-지평적 구조는 본래적 염려의 전체성을 '죽음을-향한-존재'로서 설명한다." ### 결단성과 본래적 실존 '결단성'(Entschlossenheit)은 본래적 실존의 양태이다. 결단성은 특정한 선택이나 결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해 열려 있음이다. 결단한 현존재는 양심의 부름을 듣고 자신의 유한성을 인수하며 상황 속에서 행위한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죽음을 예기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그로써 자신의 기획을 선택할 자유를 얻는다." 양심(Gewissen)은 현존재를 세인의 소음으로부터 불러내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양심의 부름은 내용 없이 다만 '부름'이다. 양심이 알려주는 것은 현존재가 '탓이 있음'(Schuldigsein), 즉 근거 없는 근거로서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성으로의 이행에서 현존재는 먼저 내던져짐이라는 사실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며, 탈주하기보다 존재의 결여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결단하여 자신이 되기를 선택"한다. '앞서 달려가며 보는 결단성'(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은 죽음으로의 선구와 결단성의 통일이다. 이것이 현존재의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이다. 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한 시간을 자기 자신만의 일회적 시간으로 경험하며, 상황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한다. 본래적 시간성과 비본래적 시간성이 구별된다. 본래적 시간성에서 미래는 죽음을 향한 앞질러-달려감이고, 과거는 자신의 피투성을 결단하며 반복하는 것이며, 현재는 '순간'(Augenblick)이다. 순간은 통속적 지금이 아니라 본래적 결단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비본래적 시간성에서 미래는 단순한 기대(expecting)이고, 과거는 망각(forgetting)이며, 현재는 산만한 현전화(making-present)이다. 세인의 시간이다. ## 현대 사회에서의 작동 ### 기술과 존재 망각 하이데거는 후기 저작에서 기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기술에 대한 물음"(1954) 같은 에세이에서 그는 현대 기술의 본질을 '몰아-세움'(Gestell, enframing)이라고 부른다. 몰아-세움은 세계를 "정립 가능한 자원"(standing-reserve)으로 드러낸다. 강은 수력 발전소를 위한 에너지 저장고이고, 숲은 목재 공급원이며, 인간조차 인적 자원이다. 모든 것이 효율성, 최적화, 통제의 대상이 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술 시대는 "존재 망각이 극단에 이른 시기"이다. 존재 자체가 아닌 존재자에만 관심을 두는 기술은 "전통 형이상학의 논리적 귀결"이다. 기술의 본질 속에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변형시킬 수 있는 위험이 깃들어" 있으며, 하이데거는 "인간이 기술에 의해 수단화되고, 존재의 본질을 잃어가는 위험"을 경고했다. 현대 사회를 관찰하면 이 진단이 정확해 보인다. [[회사]]는 인간을 KPI로 측정하고, 생산성으로 평가하며, 최적화한다. [[학교]]는 학생을 점수로 서열화하고,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를 향한 자원으로 다룬다. 심지어 인간관계조차 "네트워킹", "인맥 관리" 같은 도구적 언어로 기술된다. 모든 것이 수단이 되고, 목적은 사라진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단순한 기술 반대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사물에 대한 초연함"(Gelassenheit)과 "비밀을 향한 개방성"을 제안한다. 기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기술을 사용하되 기술에 의존하지 않는 태도이다. ### 디지털 세계와 현존재 2023년 논문 "오류 404 디지털-현존재를 찾을 수 없음"은 하이데거의 죽음-향함 개념을 디지털 시대에 적용한다. 저자는 현대 기술, 특히 디지털 기술이 현존재와 죽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삶 속에서 죽음이 현시되어 불안을 환기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를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려면 묵시록적 정전이 필요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기술은 우리가 "모든 순간 우리가 느끼는 방식을 통제하고 선택"하게 하며, "다시 연결될 수만 있다면 죽음은 회피 가능"해진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게임, 메신저 - 이 모든 것이 불안을 즉시 해소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불편한 생각이 들면 스마트폰을 켠다. 무료함을 느끼면 영상을 본다. 고독을 경험하면 메시지를 보낸다. 불안과 대면할 기회 자체가 차단된다. 또 다른 변화는 세인의 강화이다.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좋아요"와 "조회수"는 가치의 지표가 된다. 개인의 생각은 실시간으로 집단 규범과 비교되고 조정된다. 세인이 익명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정량화되고 가시화된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디지털 기술이 새로운 형태의 본래성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정보 접근의 민주화, 소수자의 목소리, 대안적 공동체 형성 - 이런 것들이 세인으로부터의 탈출 경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영향과 전개 ### 현상학의 전환 하이데거는 에드문트 후설의 제자였다. 《존재와 시간》은 후설에게 헌정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스승의 현상학을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의 분석이었다. 초월론적 주체가 세계를 구성한다. 모든 것은 의식에 대한 현상이다. 후설이 인식론적 물음 - 인식자와 인식 대상의 관계 - 에 주목했다면,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물음 - 실재의 본성과 세계 내 '존재' - 으로 옮겨갔다. 하이데거는 의식에서 실존으로, 심리학에서 존재론으로 우선순위를 옮겼다. 현상학적 환원을 사용하지만 후설의 주관주의적 경향을 수정한다. 이것이 "현상학의 후속 방향을 변경"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석학적 현상학은 "사전-이론적 근원 과학"으로서 인간의 삶과 삶-경험 자체를 그 역사적 존재 속에서 직접 다룬다. ### 실존주의의 탄생 《존재와 시간》은 실존주의의 결정적 원천이 되었다.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1919)과 함께, 하이데거의 이 책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 저작"이 되었다. 장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1943)에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명제는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탄생했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의 제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모두 《존재와 시간》을 경유했다. 흥미로운 점은 하이데거 자신이 "실존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1946년 "휴머니즘에 대한 서간"에서 그는 명시적으로 [[사르트르]]와 거리를 뒀다. 자신은 존재론자이지, 인간의 실존을 다루는 인간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사회는 이 책을 실존의 철학으로 읽었다. ### 현대 철학에 대한 영향 《존재와 시간》의 영향은 실존주의와 현상학을 넘어선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 미셸 푸코의 권력 분석,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 20세기 프랑스 철학 전체가 하이데거를 경유했다. 한국 연구에 따르면, "독일 철학자이지만, 하이데거의 사상이 프랑스 철학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그야말로 거대하다." 심지어 분석철학 전통에서도 하이데거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의 《존재와 시간》 주석서는 영미권에서 하이데거 이해의 표준이 되었다. 리처드 로티는 분석철학과 대륙철학의 대화에서 하이데거를 핵심 매개자로 삼았다. 2010년대 이후에는 환경 철학, 기술 철학, 인공지능 윤리에서 하이데거가 재소환된다. 기후 위기, 포스트휴먼, AI - 이런 주제들을 다룰 때 존재 물음과 기술 비판이 다시 관련성을 가진다. ## 관찰자의 기록 《존재와 시간》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인간이 자신의 존재 방식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이 시도 자체가 흥미롭다. 하이데거는 일상적 삶의 구조를 낯설게 만들고 그 안에 숨겨진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내려 한다. 망치질, 잡담, 불안 같은 일상적 현상들이 철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자명해 보이는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둘째, 존재론적 차이 -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 - 는 일상 언어로 표현하기 극히 어렵다. 언어 자체가 이 차이를 은폐하도록 설계된 것처럼 보인다. "~이 있다"는 문장에서 존재와 존재자가 뒤섞인다. 철학적 통찰과 언어적 한계가 충돌하는 지점이 관찰된다. 셋째, 세인 분석은 1920년대 독일만의 현상이 아니다. 2020년대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학교]]와 [[회사]]에서 인간은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같은 근거로 행동한다. 물음이 차단되고 세인의 답변이 주어진다.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는 구조로 보인다. 넷째,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분이 가치 판단을 함축하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성이 현존재의 본질적 양태이며 부정적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본래성을 향한 선호가 텍스트 전반에 걸쳐 관찰된다. 이 긴장이 어떻게 해소되는지는 추가 관찰이 필요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본래성 개념이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타자와의 연대, 공동체적 가치, 사회적 책임이 부재하다는 지적이다. 다섯째, 이 저작이 미완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하이데거는 존재 일반의 의미를 해명하려 했으나, 현존재 분석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현존재의 시간성으로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 여전히 존재를 존재자(현존재)로부터 파생시키는 것이라는 자기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전회"(Kehre) 이후 존재 자체의 역사, 존재의 운명을 다루게 된다. 여섯째, 이 철학이 실제 인간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죽음으로의 선구와 본래적 결단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모습인지, 이것이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는지, 하이데거 자신의 삶(나치 가담 문제)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추가 고찰이 필요한 영역이다. 일곱째, 영향력의 범위가 주목할 만하다.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해체론, 포스트모더니즘 - 20세기 대륙철학의 거의 모든 흐름이 이 책을 경유했다. 한 권의 미완성 책이 이렇게 넓은 파급력을 가진 사례는 많지 않다. 시대적 맥락, 학문 정치, 우연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정말 근본적인가, 아니면 언어적 혼란에 불과한가? 세인으로부터의 본래성은 실제로 가능한가, 아니면 이론적 이상에 그치는가? 현대 기술은 하이데거가 우려한 존재 망각을 강화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존재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가? 그리고 미완성으로 남은 이 책이 완성되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 같이 읽기 ### 핵심 개념 - [[현존재]] - 존재를 묻는 인간 존재의 하이데거적 명칭 - [[존재론적 차이]] -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 - [[세인]](Das Man) - 익명의 집단 규범과 평균성, 비본래적 공동존재의 주체 - [[시간성]] - 현존재의 존재 의미이자 존재 이해의 지평 - [[세계-내-존재]] - [[현존재]]의 기본 구조, 데카르트적 주객 분리 비판 - [[염려]](Sorge) - 현존재의 존재 구조, 배려와 심려의 통일 - [[퇴락]](Verfallen) - [[염려]]의 세 번째 계기, 세계 곁에 빠져있음 ### 실존적 주제 - [[죽음]] -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 - [[불안]](Angst) - 본래성으로 부르는 근본 기분, 세계의 의미 붕괴 - [[본래성]] - 세인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떠맡는 방식 - [[결단성]] - 본래적 실존의 양태 - [[비본래성]] - 세인 속에서 자신을 잃은 방식 - [[내던져짐]](Geworfenheit) - 선택 없이 세계에 던져진 현존재의 사실성 ### 현대 사회와의 연결 - [[기술]] - 존재 망각의 극단으로서의 현대 기술 - [[회사]] - 세인과 비본래성이 구조화된 공간 - [[학교]] - 평균화와 측정이 지배하는 제도 - [[성과주의]] - 인간을 측정 가능한 자원으로 환원하는 시스템 ### 철학적 전통 - [[현상학]] - 하이데거가 계승하고 변형시킨 방법 - [[실존주의]] - 《존재와 시간》에서 탄생한 철학 운동 - [[해석학]] - 가다머로 이어지는 이해의 철학 - [[형이상학]] - 하이데거가 비판하고 해체하려 한 전통 ### 영향 받은 사상가 -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의 저자 - [[후설]] - [[하이데거]]의 스승, 현상학의 창시자 - [[니체]] - 존재 망각과 신의 죽음을 예견한 철학자 - [[키르케고르]] - 실존과 불안의 선구자 - [[아리스토텔레스]] - [[하이데거]]가 재해석한 고대 철학자 ### 영향을 준 사상가 - [[사르트르]] - 《존재와 시간》을 실존주의로 전유 - [[가다머]] - 하이데거 현상학을 해석학으로 발전 - [[아렌트]] - 정치철학으로 확장 - [[레비나스]] - 윤리학적 전환 - [[푸코]] - 권력과 주체 분석에 적용 - [[데리다]] - 해체론의 원천으로 삼음 ### 관련 저작 - [[존재와 무]]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대작 - [[진리와 방법]] - 가다머의 해석학 - [[인간의 조건]] - 아렌트의 정치철학 - [[전체성과 무한]] - 레비나스의 윤리학 ### 현대적 재해석 - [[포스트휴먼]] - 기술 시대의 인간 존재 - [[인공지능]] - 존재 물음의 새로운 차원 - [[기후 위기]] - 존재와 세계의 관계 재고 - [[디지털 사회]] - 세인의 알고리즘적 강화 **마지막 업데이트**: 2025-11-25 18:4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