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성
**역사성**(Geschichtlichkeit, Historicity)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 제2편 5장에서 전개한 개념으로,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역사적 존재임을 해명한다. 이것은 [[현존재]]가 시간 "속에서"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역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존재론적 주장이다. 역사성은 [[시간성]]에 근거하며, [[결단성]]에서 자신의 본래적 형태를 드러낸다.
## 역사성의 존재론적 구조
### Geschichtlichkeit와 Historie의 구분
[[하이데거]]는 Geschichte(역사)와 Historie(역사학/역사기술)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Historie는 과거 사건들에 대한 학문적 탐구이고, Geschichte는 [[현존재]]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사건 자체다. 역사성(Geschichtlichkeit)은 Geschichte의 존재론적 근거다.
일상 언어에서 '역사적'이라는 말은 과거의 것, 지나간 것을 가리킨다. 역사 박물관의 유물들, 역사책에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파생적 의미에 불과하다. 근원적 의미에서 역사적인 것은 [[현존재]] 자체다. [[현존재]]가 역사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의 사물들도 '역사적'일 수 있다.
### 탄생과 죽음 사이의 뻗쳐 있음
[[현존재]]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zwischen)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사이'는 두 점 사이의 빈 공간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뻗쳐 있음'(Erstreckung)이라 부른다. [[현존재]]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수동적으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 양 극단을 향해 능동적으로 뻗친다.
이 뻗쳐 있음은 [[시간성]]의 탈자적 구조에 근거한다. [[현존재]]는 도래를 향해 앞질러 가면서 동시에 기재로 되돌아온다. 이 운동 속에서 [[현존재]]의 삶 전체가 통일된다. [[하이데거]]는 이 통일을 '사건/발생'(Geschehen)이라 부르며, 이 발생의 구조가 역사성이다.
### 역사성과 시간성의 관계
역사성은 [[시간성]]의 구체적 양태다. [[시간성]]이 [[현존재]]의 존재 의미라면, 역사성은 [[시간성]]의 발생 방식이다. 특히 역사성은 [[시간성]]의 세 탈자태 중 기재(Gewesenheit)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역사성의 근거가 시간성이라면, 역사성은 무엇보다도 본래적이든 비본래적이든 기재에서 시간화해야 한다." 그러나 기재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도래와 현재와의 탈자적 통일 속에 있다. 따라서 역사성도 세 시간적 차원의 통일이다.
## 운명과 공동운명
### 운명(Schicksal)
**운명**(Schicksal, fate)은 본래적 역사성의 개인적 차원이다. [[하이데거]]의 정의에 따르면, 운명은 "선구적 [[결단성]] 속에 놓여 있는, 자기 자신에게 전해주면서 죽음에 대한 자유 속에서 자기를 물려받은 가능성으로 넘겨줌"이다.
이 복잡한 정의를 풀어보면: 결단한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을 직면하면서(죽음에 대한 자유), 자신에게 전승된 실존 가능성을 인수한다(물려받은 가능성으로 넘겨줌). 운명은 이 인수의 구조다.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던져져 있지만, 이 던져진 상황을 자기 것으로 인수할 때 운명이 성립한다.
운명은 맹목적 숙명이 아니다. 숙명론(fatalism)은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어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운명은 [[결단성]]을 전제한다. 결단 없이는 운명도 없다. 운명은 던져진 상황을 자유롭게 인수하는 것이다.
### 공동운명(Geschick)
**공동운명**(Geschick, destiny)은 본래적 역사성의 공동체적 차원이다. [[현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 함께 존재한다(Mitsein). 따라서 [[현존재]]의 역사성도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가 공동운명이라 지칭하는 것은 공동체의, 민족의 발생이다." 여기서 '민족'(Volk) 개념이 등장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세대와 함께, 자신의 민족과 함께 역사 속에 던져져 있다.
공동운명은 개인적 운명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운명들이 함께 묶여서 공동운명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운명 속에서 운명들이 미리 인도된다. 개인은 항상 이미 공동체의 역사 속에 있으며, 공동운명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갖는다.
### 정치적 함의와 논쟁
'민족'과 '공동운명' 개념은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과 관련하여 논쟁의 대상이다. 비판자들은 이 개념들이 나치 이데올로기와 친화성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1933년 총장 취임 연설에서 [[하이데거]]는 "독일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언급하며 학생들에게 나치 운동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하이데거]]의 옹호자들은 《[[존재와 시간]]》의 개념들이 나치즘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반론한다. 민족 개념은 생물학적 인종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공동운명도 정치적 복종이 아니라 존재론적 구조를 서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2014년 출간)에서 드러난 반유대주의적 발언들은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역사성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 유산과 전통
### 유산(Erbe)
**유산**(Erbe, heritage)은 [[현존재]]에게 전승된 실존 가능성들이다. [[현존재]]는 빈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된 가능성들의 영역 속으로 던져진다. 언어, 문화, 제도, 가치—이 모든 것이 유산이다.
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가능성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유산은 "자신을 스스로에게 전해줌"의 대상이다. 결단한 [[현존재]]는 수동적으로 유산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유산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 전통(Tradition)과 전승(Überlieferung)
[[하이데거]]는 '전통'(Tradition)을 비판적으로 사용한다. 전통은 유산이 경직되어 본래적 가능성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전통은 "사람들은 그렇게 해왔다", "원래 그런 것이다"라는 형태로 과거를 절대화한다.
'전승'(Überlieferung, handing-down)은 다르다. 전승은 유산을 살아있는 가능성으로 넘겨받는 것이다. 결단한 [[현존재]]는 전통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전승된 가능성 중에서 자신의 상황에 맞는 것을 선택한다.
이 구분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방법론과도 연결된다. 《[[존재와 시간]]》 서론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의 역사를 "파괴"(Destruktion)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통이 덮어버린 근원적 물음을 되살리는 것이다. 전통의 파괴는 전승의 회복이다.
## 반복
### 반복(Wiederholung)의 의미
**반복**(Wiederholung, repetition/retrieval)은 본래적 역사성의 핵심 구조다. 반복은 과거를 단순히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했던 가능성"을 되찾아(wieder-holen)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반복은 지나간 것을 되돌리는 것도 아니고, 현재를 이미 사라져버린 것에 결박하는 것도 아니다." 반복은 과거의 영웅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현존재]]가 직면했던 가능성에 응답하여,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그 가능성을 새롭게 기투하는 것이다.
### 반복과 응답
반복은 과거에 대한 "응답"(Erwiderung)이다. 결단한 [[현존재]]는 과거의 [[현존재]]가 남긴 가능성에 응답한다. 이 응답은 동의도 거부도 아닌, 대화적 관계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 자신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게 반복적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고대인의 사유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기했던 물음—존재란 무엇인가?—을 자신의 상황에서 새롭게 물음으로써 응답하는 것이다.
### 반복과 니체의 영원회귀
반복 개념은 니체의 '영원회귀'(ewige Wiederkehr) 사상과 비교된다.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무한한 반복이다. 이 사상은 삶을 긍정할 것을 요구한다: 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이데거]]의 반복은 이와 다르다. 동일한 것의 회귀가 아니라, 가능성의 되찾음이다. 반복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반복 속에서 변형된다. 과거의 [[현존재]]가 직면했던 가능성이 지금 나의 상황에서 새롭게 기투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같은 가능성이 아니다.
## 딜타이와 역사적 이해
### 딜타이의 생철학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는 [[하이데거]]의 역사성 개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딜타이는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의 방법론적 토대를 "생"(Leben)과 "체험"(Erlebnis)에서 찾았다.
딜타이에 따르면, 역사적 [[이해]]는 자연과학적 설명과 다르다. 자연과학은 인과법칙을 통해 설명하지만, 정신과학은 삶의 표현을 [[이해]]한다. [[이해]](Verstehen)는 삶에서 삶으로의 전이다.
### 하이데거의 딜타이 수용과 비판
[[하이데거]]는 딜타이의 문제 설정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전유한다. 딜타이는 "삶 자체"를 파악하려 했으나, 삶의 존재론적 의미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특히 [[하이데거]]는 딜타이가 시간성 문제를 근원적으로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딜타이에게 시간은 여전히 외적 틀이다. 반면 [[하이데거]]에게 시간성은 [[현존재]]의 존재 자체다. 역사성은 [[현존재]]가 시간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시간적 존재 방식이다.
### 역사주의 비판
[[하이데거]]의 역사성 개념은 19세기 역사주의(Historismus)에 대한 비판적 응답이기도 하다. 역사주의는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상대화한다: 진리도, 가치도, 규범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이것은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역사성은 다른 방향을 취한다. 역사성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현존재]]가 역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현존재]]가 진리와 근원적으로 관계함을 의미한다. 결단한 [[현존재]]는 자신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진리를 열어밝힌다.
## 가다머의 발전
### 효과사적 의식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하이데거]]의 제자로서 역사성 개념을 해석학적으로 발전시켰다. 가다머의 핵심 개념은 '효과사적 의식'(wirkungsgeschichtliches Bewußtsein, historically-effected consciousness)이다.
효과사적 의식은 우리의 이해가 역사의 영향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 밖에서 역사를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 자체가 역사에 의해 형성된다. 선입견(Vorurteil)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이해의 조건이다.
### 지평융합
가다머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다. 과거 텍스트를 이해할 때, 해석자의 지평과 텍스트의 지평이 만나 새로운 지평을 형성한다. 이해는 과거의 의미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두 지평의 생산적 융합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반복 개념과 통한다. 반복이 과거의 가능성을 현재의 상황에서 새롭게 기투하는 것이듯, 지평융합도 과거와 현재의 생산적 만남이다. 역사적 이해는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생성이다.
##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
### 시간과 이야기
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는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 1983-1985)에서 역사성과 서사의 관계를 탐구했다. 리쾨르에 따르면, 인간의 시간 경험은 서사를 통해 구성된다.
리쾨르는 [[하이데거]]의 시간성 분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하이데거]]가 서사의 차원을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고 본다. 시간성은 이야기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시간적 존재가 된다.
### 서사적 정체성
리쾨르의 '서사적 정체성'(identité narrative) 개념은 역사성의 구체적 실현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통해 구성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통해 주어진다.
서사적 정체성은 역사성과 개인성을 연결한다. 나의 이야기는 나만의 것이지만, 동시에 더 큰 이야기들—가족의 이야기, 공동체의 이야기, 민족의 이야기—속에 위치한다. 역사성은 이 중첩된 서사들의 구조다.
## 코젤렉의 개념사
### 개념사(Begriffsgeschichte)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2006)은 역사성 문제를 '개념사'(Begriffsgeschichte)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개념사는 핵심 개념들의 의미 변화를 추적함으로써 역사적 변동을 파악한다.
코젤렉의 핵심 주장은 근대(Sattelzeit, 1750-1850)에 역사적 시간 경험 자체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 역사는 교훈의 저장고(historia magistra vitae)였다. 과거의 사례에서 현재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역사는 단일한 집합명사(Geschichte)가 되고, 진보의 방향을 갖게 된다.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코젤렉의 메타역사적 범주인 '경험공간'(Erfahrungsraum)과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은 역사성의 구조를 해명한다. 경험공간은 현재 속에 축적된 과거이고, 기대지평은 현재로부터 투사되는 미래다.
근대 이전에는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 대체로 일치했다. 과거의 경험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유효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이 둘 사이의 간극이 벌어진다. 과거의 경험은 더 이상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 간극이 '진보'의 시간, 열린 미래의 시간을 낳는다.
## 현대적 적용
### 집단 기억과 정체성
현대 사회에서 역사성 문제는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 연구와 연결된다.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 피에르 노라(Pierre Nora), 얀 아스만(Jan Assmann) 등은 기억의 사회적 구성을 탐구했다.
집단 기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다. 국경일, 기념관, 역사 교과서—이 모든 것이 집단 기억을 형성하고 전승한다. 집단 기억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며, 정치적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 기억의 문제는 특히 첨예하다. 식민 지배, 분단, 민주화 운동—이 역사적 사건들의 기억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역사성 개념은 이러한 기억 투쟁의 존재론적 배경을 해명한다.
### 세계화와 역사성
세계화는 역사성의 조건을 변화시킨다. 전통적으로 역사성은 특정 공동체—민족, 문화권—의 틀 안에서 이해되었다. 그러나 세계화는 이 틀을 흔든다. 다양한 역사적 전통들이 교차하고 충돌한다.
일부 학자들은 '세계사적 의식'(world-historical consciousness)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인류 전체를 단위로 하는 역사성이 가능한가? 기후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위기는 이런 의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동시에 민족주의와 지역주의의 부활도 관찰된다. 역사성의 미래는 열려 있다.
### 디지털 시대의 역사
디지털 기술은 역사 경험을 변화시킨다. 인터넷 아카이브, 디지털 박물관, 소셜 미디어—이 기술들은 과거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꾼다. 과거는 클릭 한 번으로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더 깊은 역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반복—과거의 가능성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는 것—이 자동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보의 과잉은 피상적 지식과 역사적 망각을 초래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본래적 역사성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물음이다.
## 비판적 검토
### 정치적 위험
역사성 개념의 정치적 오용 가능성은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하이데거]]가 공동운명과 민족 개념을 통해 나치즘에 합류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 개념들의 내재적 위험을 보여준다. 공동체의 역사적 운명을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비판적 사고를 억압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하이데거]]의 죽음 중심 사유를 비판하고, '탄생성'(natality)을 강조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 행위의 조건은 죽음이 아니라 탄생이다. 새로운 인간이 세상에 올 때마다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이 주어진다. 이 탄생성의 관점은 역사성에 대한 다른 접근을 제시한다.
### 윤리적 공백
[[하이데거]]의 역사성 개념은 [[결단성]] 개념과 마찬가지로 윤리적 내용을 결여한다. 유산을 선택한다고 할 때, 어떤 유산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 형식적 구조만 제시되고 내용은 비어 있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타자의 차원을 무시했다고 비판한다. 역사성이 근원적으로 자기-관계라면, 타자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서 오는가?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존재론에 선행한다.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이 모든 역사적 기투에 앞선다.
### 구체성의 문제
[[하이데거]]의 역사성 분석은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역사성이 [[현존재]]의 구조라면,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경제, 정치, 계급, 젠더—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적" 문제들을 존재론과 구분하지만, 이 구분 자체가 탈역사화의 위험을 갖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역사성은 역사의 물질적 토대를 간과한다. 역사는 관념이나 존재론적 구조가 아니라, 생산양식과 계급투쟁에 의해 움직인다. [[하이데거]]의 추상적 역사성은 구체적 역사 분석을 대체할 수 없다.
## 관찰 노트
역사성 개념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점이 발견된다.
첫째, 역사성의 이중적 성격이 주목된다. 한편으로 역사성은 [[현존재]]를 과거에 얽매이게 한다.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유산 속에 던져져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성은 자유의 조건이기도 하다. 유산은 가능성들의 저장고이며, [[결단성]]을 통해 이 가능성들을 전유할 수 있다. 이 이중성이 역사성의 역설이다.
둘째, 반복 개념의 창조적 성격이 중요하다. 반복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가능성에 대한 응답이다. 이 응답은 언제나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반복은 역설적으로 새로움을 낳는다. 진정한 혁신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억눌린 가능성을 회복하는 것일 수 있다.
셋째, 집단적 역사성의 문제가 미해결로 남는다. [[하이데거]]는 공동운명을 통해 집단적 차원을 다루지만, 이 개념은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다. 공동체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복수의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역사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이런 물음들이 열려 있다.
넷째, 현대 사회의 역사성 위기가 관찰된다. 가속화된 사회 변동은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의 간극을 극대화한다. 과거는 빠르게 낡은 것이 되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비본래적 역사성—전통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거나, 역사를 완전히 망각하거나—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본래적 역사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추가 탐구가 필요하다.
다섯째, [[하이데거]]의 정치적 실패와 그의 철학의 관계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역사성 개념 자체가 정치적 오용을 허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이데거]] 개인의 실패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물음은 단순히 [[하이데거]]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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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읽기
-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 [[현존재]]
- [[시간성]]
- [[결단성]]
- [[본래성]]
- [[세인]]
## 참고 문헌
### 1차 문헌
-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Verlag, 1927. (특히 제2편 5장)
- Heidegger, Martin. "Der Begriff der Zeit." (1924) GA 64.
### 2차 문헌
- Gadamer, Hans-Georg. *Wahrheit und Methode*. Tübingen: J.C.B. Mohr, 1960.
- Ricœur, Paul. *Temps et récit*. 3 vols. Paris: Seuil, 1983-1985.
- Koselleck, Reinhart. *Vergangene Zukunft: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79.
- Dilthey, Wilhelm. *Der Aufbau der geschichtlichen Welt in den Geisteswissenschaften*. GS VII.
### 비판적 연구
- Habermas, Jürgen.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5.
- Levinas, Emmanuel. *Totalité et infini*.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61.
- Arendt, Hannah. *The Human Condi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 국내 연구
- 박찬국. 『하이데거와 나치즘』. 서울: 문예출판사, 2001.
-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서울: 서광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