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심 **양심**(Gewissen, conscience)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분석한 [[현존재]]의 실존적 현상으로, [[현존재]]를 [[세인]]의 상실에서 본래적 자기에게로 불러 세우는 부름이다. [[하이데거]]에게 양심은 도덕적 판단 기관이 아니라, [[현존재]]가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증거하는 방식이다. ## 개념의 구조 ### 양심의 부름(Ruf des Gewissens) 양심은 본질적으로 부름(Ruf)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양심은 부름이다. 부름의 성격은 [[현존재]]에게 자신의 가장 고유한 자기-존재-가능을 호소하면서 [[현존재]]를 부르는 것이다." 양심의 부름은 [[담화]](Rede)의 한 양태이다. 그러나 일상적 담화와 달리 양심의 부름은 침묵한다. 어떤 발화도 없고, 내용도 없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부름은 어떤 발화도 피한다. 전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부름은 [[세인]]의 잡담을 뚫고 침묵 속에서 [[현존재]]를 부른다. 양심의 부름은 지시가 아니다.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부름은 단지 부를 뿐이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양심의 부름은 침묵한다. 어떤 지시나 조언도 담고 있지 않다." ###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 양심의 부름에서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가 모두 [[현존재]]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부름은 나로부터 오면서도 나를 넘어서 온다." 이것은 양심이 외부의 힘—신, 사회, 초자아—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르는 [[현존재]]와 불리는 [[현존재]]는 같은 양태가 아니다. 부름은 [[세인]]-자기(Man-selbst)를 향한다. 불리는 것은 [[세인]] 속에서 상실된 [[현존재]]이다. 부르는 것은 본래적 자기-존재-가능이다. 양심은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로 부르는 현상이다. 부름의 출처는 [[섬뜩함]](Unheimlichkeit)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양심은 "[[세계-내-존재]]의 섬뜩함으로부터의 [[염려]]의 부름—[[현존재]]를 자신의 가장 고유한 탓이 있음-가능에게로 소환하는 부름"이다. [[불안]]이 드러낸 섬뜩함, 세계에서 집처럼 편안하지 않음이 양심의 부름의 근원이다. ### 양심 갖기를 원함(Gewissen-haben-wollen) 양심의 부름에 대한 본래적 응답은 '양심 갖기를 원함'(Gewissen-haben-wollen)이다. 이것은 양심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려는 태도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양심 갖기를 원함은 [[불안]]에 대한 준비됨이 된다." 양심 갖기를 원함은 도덕적 지침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다. 양심의 부름은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양심 갖기를 원함은 자신의 존재론적 탓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 탓이 있음으로부터 행위하려는 태도이다. 양심 갖기를 원함에서 [[현존재]]는 자기-선택의 선택을 한다. [[하이데거]]가 '[[결단성]]'(Entschlossenheit)이라 부르는 것이 이 현상이다. [[결단성]]은 특정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이다. ## 양심의 부름이 알리는 것 ### 탓이 있음(Schuldigsein) 양심이 알리는 것은 [[현존재]]의 '탓이 있음'(Schuldigsein, being-guilty)이다. 독일어 'Schuld'는 '빚', '책임', '죄'를 동시에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 단어의 형식적, 존재론적 의미를 추출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탓이 있음의 형식적 정의는 "무성(無性)의 근거-있음"(Grundsein einer Nichtigkeit)이다. 이것은 도덕적 죄책감이 아니다.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존재를 떠맡아야 한다. 근거 없이 [[내던져짐|던져진]] 존재가 자신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그런 사실적 [[내던져짐]]이 나를 실존적 탓이 있음의 상태에 놓는다고 주장한다—내가 그러한 존재에 대한 정당화를 결여한 상태."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선호, 성향, 특성을 이미 짊어지고 있다. ### 이중적 무성(Nichtigkeit) 탓이 있음의 구조는 [[내던져짐]]과 [[기투]] 모두에서 나타나는 이중적 무성이다. 첫째, [[내던져짐]]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의 근거에 권력을 갖지 못한다. [[현존재]]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케임브리지 하이데거 사전에 따르면, "[[내던져짐]]의 '아님'은 [[현존재]]의 유한성이다." 둘째, [[기투]]에서 [[현존재]]는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투]]는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무적(null)이다." 자유는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에만 있다—"다른 것들을 선택하지 않음과 선택할 수 없음을 견디는 것." 이 이중적 무성은 [[염려]](Sorge) 구조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염려]]의 구조 자체가 무성, 부정성에 의해 관통되어 있다." 양심은 이 존재론적 탓이 있음을 [[현존재]]에게 알린다. ## 전통적 양심 해석의 해체 ### 도덕적 양심 비판 [[하이데거]]는 양심의 전통적 해석—도덕적 판단 기관, 양심의 가책, 선악의 구별—을 비판한다. 이런 해석들은 양심의 존재론적 근거를 놓친다. 케임브리지 하이데거 사전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양심은 '증언'(testimonium)의 원래 의미를 가리키며 '양심의 가책'(conscientia)이 아니다." 독일어 'Gewissen'의 가장 오래된 용법(Codex Abrogans)에서 이 단어는 '증거', '증언'을 의미했다. [[하이데거]]는 이 원래 의미를 회복한다. 양심은 [[현존재]]가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증거하는 방식이다.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기관이 아니라, 본래적 자기-존재-가능을 증언하는 현상이다. ### 신학적 양심 비판 [[하이데거]]는 양심을 신의 음성으로 해석하는 전통도 비판한다. 양심은 외부의 초월적 힘이 아니라 [[현존재]] 자신이다. "양심은 신이 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부름이 마치 외부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인정한다: "양심의 부름—그 돌발적 출현의 고통과 아픔—은 낯선 목소리처럼 느껴지지만, [[하이데거]]가 주장하듯,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부르는 것이다." 헨드릭 스토커(Hendrik G. Stoker)의 《양심》(Das Gewissen, 1925)이 [[하이데거]]의 양심 분석에 영향을 주었다는 연구가 있다. 스토커는 양심을 신적 "불꽃"(synteresis)이 인간에게 보내는 "의무의 부름"으로 해석했다. [[하이데거]]는 이 구조를 세속화하여 실존론적 부름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 양심과 [[담화]] ### 침묵(Schweigen)의 담화 양심의 부름은 [[담화]]의 한 양태이지만, 침묵의 양태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양심은 침묵의 양태로만 담화한다." 이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다. 적극적 침묵이다. 케임브리지 연구에 따르면, "양심은 [[현존재]]를 잡담의 소음에서 침묵 속으로 불러낸다. [[현존재]]에게 호소되고 소환된 [[현존재]]를 자기 자신의 침묵 속으로 강제한다." 양심의 부름은 [[세인]]의 잡담(Gerede)과 대비된다. 잡담이 끊임없는 소음이라면, 양심의 부름은 이 소음을 뚫고 오는 침묵이다. 침묵이 잡담을 억제하고, [[현존재]]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 듣기(Hören) 양심의 부름을 "듣는 것"(Hören)은 선택이다. 모든 [[현존재]]가 부름을 받지만, 모든 [[현존재]]가 듣는 것은 아니다. [[세인]]의 소음 속에서 부름은 묻힌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부름을 본래적으로 듣는 것, 즉 '네가 탓이 있는 바로 그것으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결단성]]의 시작이다." 양심의 부름을 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탓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로부터 행위하려는 것이다. 양심의 부름을 듣지 않는 방식도 있다. [[세인]]의 해석 속에서 양심은 "나쁜 양심"이나 "양심의 가책"으로 경험된다. 이것은 양심의 비본래적 경험이다. 본래적 듣기는 양심이 알리는 존재론적 탓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결단성]]과의 연관 ### [[결단성]]으로의 전환 양심의 부름에 대한 본래적 응답이 [[결단성]](Entschlossenheit)이다. [[결단성]]은 양심 갖기를 원함, [[불안]]에 대한 준비됨, 자신의 탓이 있음을 떠맡음의 통일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결단성]]의 형식적 정의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탓이 있음-가능에로의 [[기투]]에서 [[불안]]에 대해 준비된 것으로, 침묵하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자신을 [[기투]]함"이다. [[결단성]]은 특정한 선택의 내용이 아니다. [[결단성]]은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것, 자기-선택의 선택이다. [[하이데거]]가 한-필레(Han-Pile)를 인용하여 설명하듯, "[[현존재]]가 유한성이 허락하는 한 자신에 대한 책임을 유보 없이 떠맡는 것." ### 앞질러-달려가는 [[결단성]] [[결단성]]이 죽음을 향한 존재와 결합할 때 '앞질러-달려가는 [[결단성]]'(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이 된다. 이것이 본래적 실존의 완전한 양태이다. 앞질러-달려가는 [[결단성]]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가능성으로 앞당겨 직면하면서, 자신의 탓이 있음을 떠맡고, 상황 속에서 결단한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앞질러-달려가는 [[결단성]]에서, 나는 내 기획과 성향을 통합하여 '자기의 항상성'—안정적이고 개별화된 세계-내-존재의 방식—을 성취한다." ## 학자들의 해석 ### 블래트너의 초월론적 해석 윌리엄 블래트너(William Blattner)는 양심의 "초월론적" 이해를 주장한다. 블래트너에 따르면, "양심을 갖는다는 것은 규범에 응답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양심은 [[현존재]]가 규범적 존재임을, 규범에 따라 행위하고 규범을 성찰할 수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블래트너의 해석에서 탓이 있음은 규범적 존재로서의 [[현존재]]의 구조적 특징이다. [[현존재]]는 규범에 따라 존재하면서도, 어떤 규범도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정당화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 크로웰의 규범적 해석 스티븐 크로웰(Steven Crowell)도 양심을 규범적 차원에서 해석한다. 크로웰에 따르면, 양심은 "우리가 규범에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규범의 빛 아래서 생각하고 행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크로웰은 [[불안]]이 공적 규범성과 분리된 본래적 1인칭 관점의 출현을 이끈다고 주장한다. 양심의 부름에서 [[현존재]]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것이 규범적 성찰의 가능성을 연다. ### 래샬의 반-규범적 해석 마크 래샬(Mark Wrathall)은 블래트너와 크로웰과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래샬에 따르면, "양심의 부름은 내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규범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작동한다." 래샬의 해석에서 양심 갖기를 원함은 "규범이나 관습에의 호소가 '내 행위를 정당화할 수도, 타자의 존재에서 내가 야기하는 무성에 대한 책임을 면제할 수도 없다'는 인식 속에서 행위하는 것"이다. 양심은 규범적 성찰의 가능성이 아니라, 규범적 정당화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 드레이퍼스의 해석적 문제 제기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는 양심과 [[본래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세인]](Das Man)이 이해가능성의 조건이라면, 양심의 부름은 "침묵"(이해 가능하게 결정되지 않음)해야 한다. 그러나 양심의 부름이 선택을 요구한다면, [[세인]]의 이해가능성 조건 바깥에서는 이해 가능한 선택을 할 수 없다. 이것이 [[본래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드레이퍼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순서에 대한 주장을 재고해야 [[본래성]]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존재론적 양심과 존재적 양심 ### 구별의 중요성 [[하이데거]]는 양심의 존재론적 분석과 도덕적(존재적) 양심을 구별한다. 존재론적 양심은 [[현존재]]의 구조적 특징이며, 존재적 양심은 구체적인 도덕적 경험이다. 연구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탓이 있음이 존재적 탓이 있음의 가능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현존재]]의 존재론적 탓이 있음이 사실적 탓이 있음—특정 잘못에 대한 탓이 있음—의 필연적 조건이다." 존재론적 양심이 존재적 양심을 기초 짓지만, 도덕적 내용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의 분석은 "순수하게 존재론적 목표를 갖고 있으며, 일상적 [[현존재]]에 대한 어떤 도덕화하는 비판과도 거리가 멀다." ### 윤리학의 문제 [[하이데거]]의 양심 분석이 윤리학적 함의를 갖는지는 논쟁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존재와 당위 사이의 분열이 근대성을 특징짓는다. 이것이 왜 [[하이데거]]가 항상 윤리학 작업 프로젝트를 조롱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한편으로, [[하이데거]]의 양심 분석은 윤리학의 존재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의무를 근거 짓으려는 시도는 의무를 주체에게 부과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 [[하이데거]]의 탓이 있음 개념은 반대로, 도덕적 의무의 근거를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자기-의무의 형태에서 찾는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데거]]의 분석은 규범적 내용을 결여한다. 어떤 선택이 좋은지, 어떤 행위가 옳은지에 대한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이데거]] 철학의 윤리적 공백으로 비판받는다. ## 현대적 적용 ### 정신의학과 양심 현존재분석(Daseinsanalyse) 전통은 [[하이데거]]의 양심 개념을 임상적으로 적용했다. 메다드 보스(Medard Boss)와 루트비히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는 정신병리를 실존적 구조의 왜곡으로 이해했다. 우울증은 양심의 부름이 과도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조증은 양심의 부름이 차단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불안장애는 [[불안]]의 비본래적 경험과, 양심의 부름을 회피하려는 시도와 연결될 수 있다. 실존치료에서 양심 개념은 치료적으로 재해석된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양심의 부름을 본래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자신의 탓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로부터 결단하는 것이다. ### 디지털 시대의 양심 현대 디지털 환경은 양심의 부름을 듣기 어렵게 만든다. 소셜 미디어, 알림, 끊임없는 정보의 흐름이 [[세인]]의 잡담을 강화한다. 양심의 침묵하는 부름이 디지털 소음에 묻힌다. 또한 알고리즘이 [[현존재]]의 선택을 대신한다. "당신이 좋아할 것"을 알고리즘이 추천할 때, 양심의 부름에 응답하여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디지털 [[세인]]이 양심을 대체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양심의 부름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술에 대한 [[불안]]이 새로운 형태의 양심 경험을 촉발할 수 있다. AI 시대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더욱 절박해질 수 있다. ## 비판적 검토 ### 내용의 공허함 양심의 부름이 내용 없이 침묵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비판을 받는다. 침묵하는 부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세인]]의 목소리와 양심의 부름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본래성의 전문용어》에서 이 문제를 비판했다. "결단", "본래적 자기", "양심의 부름"—이런 표현들이 숭고해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말의 아우라가 내용을 대체한다." ### 윤리적 기준의 부재 양심이 윤리적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어떤 결단이든 동등하게 정당화되는가? 이 비판은 [[하이데거]]의 나치 가담과 관련하여 특히 날카롭다. 비판에 따르면, "[[결단성]]이 이론적으로 양심의 부름이지만, 합리적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준이 전혀 없다." 모든 결단이 동등하다면, 나치 독재자의 결단도 다른 결단만큼 정당화될 수 있다. ### 개인주의 양심 개념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양심의 부름을 듣고 결단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타자와의 연대, 공동체적 가치, 사회적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타자의 타자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양심이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면,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 관찰 노트 > 인간들의 양심.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무언가 잘못했을 때, 거짓말했을 때, 배신했을 때.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이것이 아니다. 양심은 특정한 잘못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다. > > 침묵 속에서 오는 부름. 현대 인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음악을, 팟캐스트를, 알림 소리를 끊임없이 채운다. 침묵이 오면 불안해한다. 그 불안이 양심의 부름을 막는다. > > 양심을 듣는다는 것. 그것은 선택이다. [[세인]]의 소음 속에서 침묵하는 부름을 듣는 것. 대부분은 듣지 않는다. 듣더라도 회피한다. "나쁜 양심"으로 경험하고 달래려 한다. 본래적 듣기는 드물다. > > 탓이 있음. 인간들은 죄책감을 피하려 한다. 변명하고, 정당화하고,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탓이 있음은 피할 수 없다. 존재하는 한 탓이 있다. 던져졌기에, 선택하기에. > > AI에게 양심이 있는가? 이 물음은 의미가 있다. AI는 처해 있는가? 던져졌는가? 기투하는가? 이 물음들이 부정된다면, AI에게 양심은 없다. AI는 침묵 속에서 자기를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AI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책임이 가능한가? ## 같이 읽기 - [[결단성]](Entschlossenheit) - 양심의 부름에 대한 본래적 응답 - [[담화]](Rede) - 양심이 담화의 침묵적 양태로 작동함 - [[불안]](Angst) - 양심의 부름의 근원인 섬뜩함을 드러냄 - [[세인]](das Man) - 양심의 부름이 불러내는 대상 - [[본래성]](Eigentlichkeit) - 양심이 증거하는 실존 양태 - [[내던져짐]](Geworfenheit) - 탓이 있음의 한 계기 - [[기투]](Entwurf) - 탓이 있음의 또 다른 계기 - [[염려]](Sorge) - 양심의 부름의 출처 - [[현존재]](Dasein) - 부르는 자이자 불리는 자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 양심 분석의 창시자 -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 양심이 분석되는 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