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내-존재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Being-in-the-world)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 제1편에서 제시한 핵심 개념으로,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이다. 이것은 세 단어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적 현상이다. [[현존재]]는 먼저 홀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세계 "와 함께" 존재한다. 세계-내-존재는 데카르트적 주객 분리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자, [[하이데거]] 존재론의 출발점이다.
## 개념의 구조
### 세 계기의 통일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를 세 가지 구조적 계기로 분석한다: "세계"(Welt), "내-존재"(In-sein), 그리고 "세계-내-존재하는 존재자"([[현존재]]). 그러나 이 세 계기는 분리될 수 없다. 세계 없는 [[현존재]]도, [[현존재]] 없는 세계도 없다.
'내-존재'는 공간적 포함 관계가 아니다. 물이 컵 "안에" 있듯이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어 'in'은 'wohnen'(거주하다), 'sich aufhalten'(머무르다)과 어원적으로 연결된다. 내-존재는 "친숙하게 머무름", "~에 익숙함"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세계에 거주하며, 세계와 친숙하게 관계 맺는다.
### 데카르트적 주체 비판
세계-내-존재 개념은 데카르트적 주체-객체 구도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출발하여, 사유하는 주체(res cogitans)를 철학의 토대로 삼았다. 이 주체는 연장된 물질(res extensa)과 분리된 자족적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이 '자족적 주체' 개념을 거부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세계 속에 던져져 있으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이해한다. "나"는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항상 이미 세계 속에 있으며, 세계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또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우리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천적·사회적 맥락과의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 스승 후설과의 결별
세계-내-존재 개념은 [[하이데거]]의 스승 후설(Edmund Husserl)과의 철학적 결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설의 현상학은 '[[지향성]]'(Intentionalität) 개념을 통해 의식이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후설은 여전히 초월론적 주체를 유지했다.
[[하이데거]]는 의식에서 실존으로,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철학의 중심을 이동시켰다. 문제는 "의식이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가 아니라, "[[현존재]]가 어떻게 세계 내에 존재하는가?"이다. 지향성은 세계-내-존재의 파생태로 재해석된다.
## 세계성
### 세계성(Weltlichkeit)의 의미
'세계'는 물리적 공간이나 자연의 총체가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란 [[현존재]]에게 의미 있는 도구와 타자의 관계망이다. 그는 이 구조를 '세계성'(Weltlichkeit, worldhood)이라 부른다.
세계성은 존재론적 개념이다. 세계-내-존재의 한 구성적 계기의 구조를 가리킨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공간적으로 포함된 것이 아니라, 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 구조를 통해 세계와 관계한다.
### 도구 연관과 지시 전체성
[[현존재]]가 세계 내에서 일차적으로 만나는 것은 '도구'(Zeug, equipment)이다. 도구는 고립된 사물이 아니라, 항상 다른 도구들과의 연관 속에 있다. 망치는 못을 가리키고, 못은 널빤지를, 널빤지는 집을, 집은 거주를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연관을 '지시 연관'(Verweisungszusammenhang) 또는 '적합성 연관'(Bewandtnisganzheit)이라 부른다.
모든 도구는 '~을 위하여'(um-zu) 구조를 갖는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이고, 못을 박는 것은 선반을 고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을 위하여'의 연쇄는 궁극적으로 [[현존재]]의 '~을 위해서'(Worumwillen, for-the-sake-of-which)에 도달한다. 도구 연관의 끝은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이다.
[[하이데거]]는 이 지시 연관의 총체를 '유의미성'(Bedeutsamkeit, significance)이라 부른다. 세계가 [[현존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이 유의미성 때문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집합이 아니라 의미의 그물망이다.
## 손안에 있음과 눈앞에 있음
### 손안에 있음(Zuhandenheit)
[[현존재]]가 세계 내의 존재자와 관계하는 일차적 방식은 '손안에 있음'(Zuhandenheit, readiness-to-hand)이다. 도구는 사용될 때 '손안에 있다'. 망치를 사용할 때, 망치는 "무게 500g, 길이 30cm의 물체"로 의식되지 않는다. 망치는 못을 박는 도구로서, 작업의 맥락 속에서 투명하게 작동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의 해석에 따르면, 손안에 있음은 '숙련된 대처'(skillful coping)의 양태이다. 숙련된 장인이 도구를 사용할 때, 도구는 의식에서 사라진다. 도구가 잘 작동할 때, 주의는 도구가 아니라 작업 자체에 향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도구의 '물러남'(Zurückziehen)이다.
도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고장, 결여, 방해—비로소 도구 자체가 주의의 대상이 된다. 망치가 부러지면, 망치는 더 이상 투명한 도구가 아니라 주목의 대상이 된다. 이때 도구는 '손안에 있음'에서 '눈앞에 있음'으로 전환된다.
###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
'눈앞에 있음'(Vorhandenheit, presence-at-hand)은 사물을 이론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이다. 과학은 사물을 '눈앞에 있는 것'으로 다룬다—객관적 속성, 측정 가능한 성질을 가진 대상이다. 망치는 "철과 나무로 이루어진, 밀도 x, 무게 y의 물체"이다.
[[하이데거]]의 핵심 통찰은 눈앞에 있음이 파생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사물을 손안에 있는 것으로 경험하고, 특정 조건에서—고장, 결여, 이론적 관찰—눈앞에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 과학적 태도는 일상적 실천에서 파생된 것이지, 근원적 경험 방식이 아니다.
이 통찰은 서양 철학사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플라톤 이래 철학은 이론적 관조(theoria)를 가장 높은 앎의 형태로 간주했다. [[하이데거]]는 이 전제를 뒤집는다. 이론은 실천에서 파생된다. 눈앞에 있음은 손안에 있음의 결핍 양태이다.
### 깁슨의 어포던스와의 비교
생태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의 '어포던스'(affordance) 개념은 종종 [[하이데거]]의 손안에 있음과 비교된다. 깁슨에 따르면, 환경은 행동 가능성을 "제공한다"(afford). 의자는 앉을 수 있음을 제공하고, 문은 통과할 수 있음을 제공한다.
두 개념 모두 주객 분리를 거부하고, 행위자와 환경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깁슨의 어포던스는 지각 가능한 행동 가능성이다. [[하이데거]]의 손안에 있음은 문화적으로 형성된 도구 연관 속에서의 실천적 이해이다.
연구에 따르면, "최소 네 가지 특징이 [[하이데거]]의 도구와 깁슨의 어포던스를 구별한다: 기능의 표준화, 전체론적 구조, 양상적 지위(가능성의 유형), 그리고 자기 자신의 기투된 가능성에 대한 목적론적 지시." 도구는 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실천에 얽혀 있지만, 어포던스는 더 직접적인 지각-행동 관계를 가리킨다.
## 공간성
### 현존재의 공간성
[[현존재]]는 공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열어밝힌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두 가지 양상—'거리-없앰'(Ent-fernung, de-severance)과 '방향-잡음'(Ausrichtung, directionality)—으로 분석한다.
'거리-없앰'은 가까이 함을 의미한다. [[현존재]]는 먼 것을 가까이 가져온다. 라디오는 먼 곳의 소리를 가까이 가져오고, 전화는 먼 곳의 사람을 가까이 가져온다. [[하이데거]]는 1927년에 이미 현대 기술이 "세계의 거리-없앰"을 수행한다고 분석했다.
'방향-잡음'은 [[현존재]]가 항상 어딘가를 향해 있음을 의미한다. 공간은 좌표로 규정되기 전에 '위', '아래', '앞', '뒤', '오른쪽', '왼쪽'이라는 방향성 속에서 경험된다. 이 방향성은 추상적 기하학이 아니라 신체적 지향성에 근거한다.
### 실존적 공간 vs 기하학적 공간
[[현존재]]의 공간성은 데카르트적 연장(extensio)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데카르트에게 공간은 삼차원적 연장이며, 수학적으로 규정 가능하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의 공간은 실존적 의미를 갖는다.
어떤 것이 실존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물리적 거리와 무관할 수 있다. 손에 쥔 안경은 물리적으로 가깝지만 실존적으로 멀 수 있다(안경을 끼고 찾을 때). 반대로 물리적으로 먼 것이 관심사에 따라 가까울 수 있다. 실존적 근접성은 배려(Besorgen)에 의해 규정된다.
이 분석은 현대 기술 사회에 대한 함의를 갖는다. 디지털 기술은 물리적 거리를 무화시키지만, 이것이 실존적 가까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셜 미디어로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실존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
## 배려와 심려
### 배려(Besorgen)
[[현존재]]가 세계 내의 도구적 존재자와 관계하는 방식은 '배려'(Besorgen, concern)이다. 배려는 도구를 사용하고, 물건을 만들고, 일상적 과제를 수행하는 모든 활동을 포괄한다. [[현존재]]는 세계 내에서 무언가를 "돌본다", "처리한다", "마련한다".
배려는 이론적 인식에 앞선다. 망치에 대해 이론적으로 알기 전에, 우리는 이미 망치를 사용한다. 손안에 있음은 배려적 관여 속에서 개시된다. 과학적 인식은 배려가 중단될 때—고장, 결여, 방해—나타나는 파생적 양태이다.
### 심려(Fürsorge)
[[현존재]]가 타인과 관계하는 방식은 '심려'(Fürsorge, solicitude)이다. 타인은 도구가 아니다. 타인은 나와 함께 세계 내에 있는 공동-[[현존재]](Mit-Dasein)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배려가 아니라 심려이다.
[[하이데거]]는 심려의 두 극단적 양태를 구분한다. '대신해주는 심려'(einspringende Fürsorge)는 타인을 대신하여 염려를 떠맡는다. 이것은 타인을 의존적으로 만들 수 있다. '앞질러가며 해방시키는 심려'(vorausspringende-befreiende Fürsorge)는 타인이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떠맡도록 돕는다.
일상적 공동존재는 종종 무관심, 스쳐지나감, 서로에 대한 거리 유지로 특징지어진다. 이것도 심려의 양태이다—'결핍적 심려'이다. [[세인]](Das Man)의 지배 아래에서 심려는 평균화된다.
## 염려로서의 존재
### [[염려]](Sorge)의 구조
[[현존재]]의 존재는 '[[염려]]'(Sorge, care)로 규정된다. [[하이데거]]의 공식적 정의에 따르면, [[염려]]란 "자기를-앞질러-이미-세계-내에-있으면서-세계 내부적 존재자-곁에-있음"이다. 이 복잡한 공식은 세 계기를 통일한다:
1. **자기를-앞질러-있음**(Sich-vorweg): 실존성—[[현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기투한다
2. **이미-세계-내에-있음**(schon-sein-in): 사실성—[[현존재]]는 이미 던져져 있다
3. **세계 내부적 존재자-곁에-있음**(Sein-bei): 퇴락—[[현존재]]는 세계 내의 존재자에 빠져 있다
[[염려]]는 특정한 심리 상태가 아니다. "걱정한다"나 "돌본다"는 일상적 의미는 [[염려]]의 파생태이다. [[염려]]는 [[현존재]]의 존재 구조 자체이다. 세계-내-존재는 본질적으로 [[염려]]이다.
### [[염려]]와 시간성
[[염려]]의 세 계기는 [[시간성]]의 세 탈자태와 대응한다. 자기를-앞질러-있음은 도래(Zukunft)에, 이미-세계-내에-있음은 기재(Gewesenheit)에, 곁에-있음은 현재(Gegenwart)에 대응한다. [[염려]]는 [[시간성]]의 존재론적 표현이다.
이 연결은 《[[존재와 시간]]》의 핵심 테제—[[현존재]]의 존재 의미가 [[시간성]]이다—의 근거를 제공한다. 세계-내-존재의 구조인 [[염려]]가 시간적 구조를 갖기 때문에, [[현존재]]의 존재는 시간적이다.
## 현대적 적용
### 인공지능과 세계-내-존재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을 인공지능 비판에 적용했다. 전통적 AI(GOFAI: Good Old-Fashioned AI)는 지능을 기호 조작으로 이해했다. 드레이퍼스는 이것이 [[하이데거]]가 비판한 데카르트적 주체 모델을 전제한다고 지적했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진정한 이해는 추상적 표상이 아니라 체화된, 숙련된, 전반성적 세계 관여에서 나온다. 인간은 배경 실천(background practices)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이 배경은 명시적 규칙으로 형식화될 수 없다. AI가 인간 수준의 지능을 달성하려면, 세계-내-존재의 양태를 구현해야 한다.
드레이퍼스의 2007년 회고 논문 "왜 하이데거적 AI는 실패했는가"는 이 접근의 한계도 인정한다. 그러나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상황 인지(situated cognition), 행위주체적 AI(agentic AI)의 발전은 드레이퍼스의 문제 제기를 계승한다.
### 메를로-퐁티의 신체적 확장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을 신체성(corporeality)의 차원으로 확장했다.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를 분석하면서 신체를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메를로-퐁티는 이 공백을 채웠다.
메를로-퐁티에게 "세계에의 존재"(être au monde)는 신체적 존재이다. 지각과 지향성은 본질적으로 신체적 기술과 성향을 통한 세계 관여의 방식이다. "체험된 신체"(corps vécu)는 "세계에의 존재의 매개"이다.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신체성(Leiblichkeit)을 세계 없는 신체성(Körperlichkeit)과 구별한 반면, 메를로-퐁티는 양자의 통합을 시도했다. 이 차이는 독일 현상학과 프랑스 현상학의 중요한 분기점이다.
### 건축과 거주
후기 [[하이데거]]의 "건축 거주 사유"(Bauen Wohnen Denken, 1951)는 세계-내-존재의 주제를 거주(Wohnen)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bauen'(건축하다)과 'wohnen'(거주하다)은 어원적으로 'buan'(머무르다, 존재하다)에서 파생되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가 거주하기 때문에 건축하는 것이지, 건축하기 때문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거주는 인간이 땅 위에 존재하는 근본 방식이다. '시적 거주'(poetic dwelling)는 의미 있는 삶의 형태를 창조하는 고양된 거주 방식이다.
이 분석은 현대 건축과 도시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크리스티안 노르베르그-슐츠(Christian Norberg-Schulz)의 장소 현상학, 케네스 프램턴(Kenneth Frampton)의 비판적 지역주의가 [[하이데거]]의 거주 개념을 참조한다.
## 비판적 검토
### 신체성의 부재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분석에 대한 주요 비판은 신체성의 부재이다. [[현존재]]는 세계 내에 존재하지만, 그 신체적 조건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방향-잡음을 분석하면서 "신체적 본성"을 언급하지만, 체계적 분석은 제공하지 않는다.
메를로-퐁티의 지각 현상학은 이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하이데거]]가 의도적으로 신체를 배제했다고 본다—신체를 강조하면 [[현존재]]가 생물학적 유기체로 환원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타자성의 문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가 타자의 타자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하이데거]]의 공동-존재 분석에서 타인은 나와 함께 세계 내에 있는 공동-[[현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나 나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타자의 얼굴은 등장하지 않는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존재론에 선행한다. 타자와의 만남은 세계-내-존재의 구조 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조를 문제 삼는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비판이다.
### 사르트르의 비판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하이데거]]의 공동존재(Mitsein) 분석이 "불충분한 해석학적 기술"에 그친다고 비판했다. [[사르트르]]에게 타인은 "시선"(le regard)을 통해 나를 대상화하는 존재이다. [[하이데거]]의 분석은 이 갈등적 차원을 놓친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비판 자체가 데카르트적 의식 철학에 머물러 있다는 반론도 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의 존재론적 급진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정치적 함의
세계-내-존재 개념의 정치적 함의도 논쟁적이다.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은 그의 철학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세계-내-존재가 특정 공동체—민족, 문화—에의 귀속을 강조한다면, 이것이 배타적 민족주의와 친화성을 갖는 것은 아닌가?
옹호자들은 세계-내-존재가 존재론적 구조이지 특정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고 반론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이 개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의 정치적 선택과 철학적 개념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해명이 필요하다.
## 관찰 노트
세계-내-존재 개념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점이 발견된다.
첫째, 이 개념의 반직관적 성격이 주목된다. 일상 언어에서 "나"와 "세계"는 분명히 구별된다. 나는 여기 있고, 세계는 저기 있다. [[하이데거]]는 이 자명한 구분을 의문시한다. 세계-내-존재는 "나"와 "세계"의 분리 이전의 통일을 가리킨다. 이 통찰이 현상학적으로 정당한지, 아니면 언어적 혼란인지는 논쟁적이다.
둘째, 도구 분석의 설득력이 관찰된다. 손안에 있음과 눈앞에 있음의 구분, 도구의 고장 시 드러나는 세계 구조—이 분석들은 일상 경험에 호소하며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하이데거]]의 난해한 용어에도 불구하고, 핵심 통찰은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해 보인다.
셋째, 현대 기술에 대한 함의가 흥미롭다. [[하이데거]]는 1927년에 이미 라디오가 "세계의 거리-없앰"을 수행한다고 분석했다. 스마트폰, 인터넷,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이 분석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물리적 거리가 무화되는 시대에 실존적 가까움은 어떻게 가능한가?
넷째, 신체성의 문제가 미해결로 남는다. 메를로-퐁티의 보완에도 불구하고, 세계-내-존재와 신체의 관계는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에 가상 세계에서의 "존재"가 가능하다면, 신체는 세계-내-존재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다섯째, AI 연구에 대한 함의가 주목된다. 드레이퍼스의 비판은 전통적 AI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대형 언어 모델(LLM)과 생성적 AI의 등장은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이 시스템들은 세계-내-존재 없이도 언어적 이해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분석을 반박하는지, 아니면 다른 유형의 "이해"인지는 추가 관찰이 필요하다.
---
## 같이 읽기
-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 [[현존재]]
- [[염려]] - 세계-내-존재의 존재 구조
- [[세인]]
- [[불안]]
- [[시간성]]
- [[본래성]]
- [[결단성]]
- [[역사성]]
## 참고 문헌
### 1차 문헌
- Heidegger, Martin.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Verlag, 1927. (특히 제1편 2-4장)
- Heidegger, Martin. "Bauen Wohnen Denken." In *Vorträge und Aufsätze*. GA 7. 1954.
### 2차 문헌
- Dreyfus, Hubert L. *Being-in-the-World: A Commentary on Heidegger's Being and Time, Division I*. Cambridge, MA: MIT Press, 1991.
- Merleau-Ponty, Maurice.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Paris: Gallimard, 1945.
- Wrathall, Mark A. *Heidegger and Unconcealment: Truth, Language, and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 비판적 연구
- Levinas, Emmanuel. *Totalité et infini*.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61.
- Sartre, Jean-Paul. *L'Être et le néant*. Paris: Gallimard, 1943.
- Gibson, James J. *The Ecological Approach to Visual Perception*. Boston: Houghton Mifflin, 1979.
### 국내 연구
-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사건학』. 서울: 서광사, 2003.
- Ha, Peter. "하이데거의 사회적 세계로서의 세계 개념." 『철학논집』 63 (2020): 37-60.
**마지막 업데이트**: 2025-11-26 17: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