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래성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개념의 기원과 의미]] > - [[#Eigentlichkeit의 어원]] > - [[#소유와 고유함]] > - [[#진정성과의 구별]] > 3. [[#본래성의 구조]] > - [[#세인-자기와 본래적 자기]] > - [[#양심의 부름]] > - [[#결단성(Entschlossenheit)]] > - [[#선구적 결단성]] > 4. [[#본래성으로의 통로]] > - [[#불안과 개별화]] > - [[#죽음-을-향한-존재]] > - [[#순간(Augenblick)]] > 5.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관계]] > - [[#존재론적 가치 중립성]] > - [[#변양으로서의 본래성]] > - [[#일상성의 불가피성]] > 6. [[#실존주의적 전유]] > - [[#키르케고르의 선구]] > - [[#사르트르의 진정성]] > - [[#보부아르와 타자]] > 7. [[#비판과 논쟁]] > - [[#아도르노의 전문용어 비판]] > - [[#개인주의 문제]] > - [[#정치적 함의]] > 8. [[#현대적 적용]] > - [[#찰스 테일러의 진정성 윤리]] > - [[#성과사회와 가짜 본래성]] > - [[#디지털 시대의 본래성]] > 9. [[#관찰자의 기록]] > 10. [[#같이 읽기]] ## 개요 **본래성**(Eigentlichkeit)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제시한 핵심 개념으로, [[현존재]]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떠맡는 실존 양식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authenticity', 'ownedness', 'own-most-ness'로 번역되며, 한국어로는 '본래성', '본래적 실존', '진정성'으로 옮겨진다. 본래성은 [[세인]](Das Man)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라는 익명의 규범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다. 본래적 [[현존재]]는 이 익명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떠맡는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현존재]]가 자기를-앞질러-있음에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을 향해 자유롭게 있는 것"이 본래성이다. 본래성은 [[염려]](Sorge)의 본래적 양태이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본래성 개념은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 자신은 본래성을 도덕적 이상이나 규범적 요청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본래성과 비본래성은 [[현존재]]의 두 가지 존재 양식이며, 비본래성은 결함이나 타락이 아니라 [[현존재]]의 본질적 구성 계기이다. 흥미로운 점은, 본래성 개념이 [[하이데거]]의 의도와 달리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본래성을 윤리적 이상으로 전유했고, 대중문화에서 '진정한 자기'(authentic self)의 추구는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은 본래성 담론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했다. ## 개념의 기원과 의미 ### Eigentlichkeit의 어원 독일어 'Eigentlichkeit'는 형용사 'eigentlich'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eigentlich'는 일상 독일어에서 "본래의", "진정한", "실제로"를 의미한다. "Was willst du eigentlich?"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거야?"라는 뜻이다. [[하이데거]]는 이 일상어를 철학적 개념으로 전용했다. 어원적으로 'eigentlich'는 'eigen'(자신의, 고유한)에서 왔다. 'eigen'은 소유와 고유함을 동시에 함축한다. "mein eigen"은 "나의 것"이고, "Eigenschaft"는 "특성" 또는 "고유한 성질"이다. [[하이데거]]는 이 어원적 연결을 활용하여 본래성을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자기 것으로"(zu eigen)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영어 번역 'authenticity'는 그리스어 'authentikos'(genuine, principal)에서 왔다. 이 번역은 널리 사용되지만, [[하이데거]]의 의도를 완전히 담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authenticity'는 진품/위조품의 구별을 함축하지만, [[하이데거]]의 Eigentlichkeit는 소유와 떠맡음의 의미가 강하다. ### 소유와 고유함 본래성의 핵심은 '각자성'(Jemeinigkeit)과 연결된다. [[현존재]]의 존재는 항상 "나의 것"이다. 타인이 대신 살아줄 수 없고, 대신 죽어줄 수 없다. 이 '나의 것임'이 각자성이다. 본래성은 이 각자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각자 나의 것이기 때문에, 이 존재자는 그때마다 본래적으로 또는 비본래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 본래적 실존은 각자성을 떠맡는 것이고, 비본래적 실존은 각자성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것으로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소유물을 갖는 것과 다르다. 자신의 존재를 자기 것으로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기투]]하고, 자신이 던져진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조건들—시대, 문화, 신체—을 결단하여 떠맡는 것이다. 이것이 [[내던져짐]]의 본래적 인수이다. ### 진정성과의 구별 한국어 번역에서 '본래성'과 '진정성'이 혼용되지만, 엄밀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진정성'은 내면의 진실함, 꾸밈없음을 함축한다. "진정성 있는 사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과이다. 이 의미는 [[하이데거]]의 Eigentlichkeit와 다르다. [[하이데거]]의 본래성은 내면의 진실함이 아니라, 존재론적 구조이다. [[현존재]]가 [[세인]]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떠맡는 방식이다. 이것은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실존의 양태이다. 그러나 일상적 담론에서 'authenticity'는 종종 "진정한 자기"의 발견으로 이해된다. "내 안의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표현이 그렇다. 이 이해는 [[하이데거]]의 본래성과 다르다. [[하이데거]]에게 본래적 자기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는 것이다. 숨겨진 "진정한 나"가 있어서 그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기투함으로써 본래적 자기가 된다. ## 본래성의 구조 ### 세인-자기와 본래적 자기 [[현존재]]의 자기 이해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세인-자기'(Man-selbst)로 존재한다. [[세인]]의 해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세인]]의 결정을 자신의 결정으로 여긴다.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다. 세인-자기는 익명적이다. "누구나 타자이며, 아무도 자기 자신이 아니다."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대신 [[세인]]이 미리 결정해놓은 가능성들 안에서 움직인다. 자기 결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율이다. 본래적 자기(eigentliches Selbst)는 세인-자기의 변양이다. [[현존재]]가 [[세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기투]]하며 열려 있는 것이다. 본래적 자기는 [[세인]]과 단절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세계-내-존재]]이고 타인과 함께 있다. 달라지는 것은 자신에 대한 관계이다. [[하이데거]]는 강조한다: "본래적 실존은 [[세인]]을 떠난 상태가 아니라, [[세인]]의 실존론적 변양이다." 본래성은 사회로부터의 도피나 은둔이 아니다. 동일한 세계에서, 동일한 타인들과 함께,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세계-내-존재]]하는 것이다. ### [[양심]]의 부름 본래성으로의 전환은 '[[양심]]의 부름'(Ruf des Gewissens)을 통해 일어난다. [[양심]]은 도덕적 판단 기관이 아니다. [[양심]]은 [[현존재]]를 [[세인]]의 소음에서 불러내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양심]]의 부름은 내용이 없다. 무엇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다만 부른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양심]]은 세인-자기를 자기 자신에게로 불러 세운다."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가 모두 [[현존재]] 자신이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부른다. [[양심]]이 알려주는 것은 [[현존재]]의 '탓이 있음'(Schuldigsein)이다. 이것은 도덕적 죄책감이 아니다.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존재를 떠맡아야 한다. 근거 없이 던져진 존재가 자신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 존재론적 부담이 '탓이 있음'이다. [[양심]]은 이 탓이 있음을 현존재에게 알린다. ### 결단성(Entschlossenheit) 양심의 부름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결단성]]'(Entschlossenheit, resoluteness)이다. [[결단성]]은 특정한 선택이나 결심이 아니다.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이다. 독일어 'Entschlossenheit'는 문자 그대로 "열려-있음"(un-closedness)을 함축한다. 닫혀 있던 것이 열리는 것이다. [[세인]]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능성에 닫혀 있다. 결단성은 이 닫힘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결단한 [[현존재]]는 상황(Situation) 속에서 행위한다. 상황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다. 결단한 [[현존재]]에게만 상황이 열린다. [[세인]] 속의 [[현존재]]는 상황을 보지 못하고, "일반적 사정"만 본다. 결단성은 상황의 요구를 보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다. ### 선구적 결단성 '선구적 결단성'(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은 본래성의 완전한 형태이다. 죽음으로의 선구(Vorlaufen zum Tode)와 결단성이 통일된 것이다. 죽음으로의 선구는 죽음을 지금 현재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을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유예하지 않고, 지금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직면한다. 죽음을 선취함으로써 [[현존재]]는 [[세인]]의 지배에서 해방된다. 선구적 결단성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을 떠안으며 동시에 상황 속에서 행위한다.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삶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틸리히가 말한 "존재의 용기"는 이 선구적 결단성과 유사하다. ## 본래성으로의 통로 ### 불안과 개별화 본래성으로의 주된 통로는 [[불안]](Angst)이다. [[불안]]은 두려움(Furcht)과 달리 대상이 없다. 아무것도 위협하지 않는데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세인]]이 제공하던 안정과 친숙함이 붕괴한다. [[불안]]에서 일상적 세계가 무너진다. [[하이데거]]는 이를 '섬뜩함'(Unheimlichkeit)이라 부른다. 문자 그대로 "집처럼-있지-않음"이다. 친숙했던 것이 낯설어지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불안]]의 핵심 기능은 '개별화'(Vereinzelung)이다. [[세인]] 속에서 [[현존재]]는 익명적이다. [[불안]]은 이 익명성을 깨뜨린다. [[현존재]]는 자신이 홀로 자신의 존재를 떠맡아야 함을 깨닫는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위안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불안]]은 고통스럽지만 해방적이다. [[불안]] 없이 본래성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불안]]을 회피하고 다시 [[세인]]의 안정으로 도피한다. ### 죽음-을-향한-존재 죽음은 본래성의 궁극적 조건이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인, 추월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죽음이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이유는, 누구도 대신 죽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각자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죽음이 무연관적(unbezüglich)인 이유는, 죽음에서 모든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연결, [[세인]]의 지배가 무효화된다. 죽음이 추월 불가능한 이유는, 죽음 이후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성의 종결이다. [[세인]]은 죽음을 회피한다. "사람은 죽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지금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익명화하고 미래로 유예한다. 이것이 비본래적 죽음-을-향한-존재이다. 본래적 죽음-을-향한-존재는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다. 죽음을 지금 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인다. 죽음의 선취가 [[세인]]의 지배를 무력화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가 죽음 앞에서 공허해진다. ### 순간(Augenblick) '순간'(Augenblick, the moment of vision)은 본래적 시간성의 양태이다. 일상적으로 시간은 "지금들"의 연속이다. 지나간 지금, 현재의 지금, 올 지금. 이것은 비본래적 시간 이해이다. 본래적 현재는 순간이다. 순간은 결단한 [[현존재]]가 상황을 통찰하는 시간이다. 과거에서 물려받은 가능성과 미래로 기투하는 가능성이 현재에서 통일된다. 순간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시간성]] 전체를 떠안는다. 순간은 충만한 현재이다. 일상적 현재가 비어 있다면—지금이 지나가고 또 다른 지금이 온다—순간은 삶 전체가 응축된 현재이다. 결단한 [[현존재]]에게만 순간이 열린다. ##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관계 ### 존재론적 가치 중립성 [[하이데거]]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가치 판단을 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본래성은 도덕적 결함이 아니다. [[현존재]]의 본질적 구성 계기이다. 본래성이 "더 나은" 실존이라는 해석을 [[하이데거]]는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비본래성이라는 표현은 어떤 '덜함'이나 '더 낮은' 존재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본래성은 [[현존재]]의 "완전히 긍정적인" 존재 양식이다. [[현존재]]는 먼저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며, 이것이 실존의 "일차적이고 대개의" 양식이다. 이 주장은 텍스트의 실제 어조와 긴장을 일으킨다. [[세인]]에 대한 묘사—잡담, 호기심, 애매함—는 부정적 함의를 담고 있다. "[[퇴락]]"(Verfallen)이라는 용어 자체가 타락의 뉘앙스를 갖는다. [[하이데거]]의 공식 입장과 실제 서술 사이에 괴리가 있다. ### 변양으로서의 본래성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비본래성의 "변양"(Modifikation)으로 규정한다. 본래적 실존은 비본래적 실존과 별개가 아니라, 비본래적 실존의 "특정한 파악"이다. 이것은 두 가지를 함축한다. 첫째, 본래성은 비본래성을 전제한다. [[현존재]]는 먼저 [[세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본래성은 비본래성 없이 불가능하다. 둘째, 본래성은 비본래성의 완전한 극복이 아니다. 본래적 [[현존재]]도 [[세계-내-존재]]이고 타인과 함께 있다. [[세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인]]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본래성은 지속적 상태가 아니라 순간적 사건으로 보인다. [[현존재]]는 본래성과 비본래성 사이를 오간다. 결단은 매 순간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번 결단했으니 항상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 일상성의 불가피성 [[하이데거]]는 일상성(Alltäglichkeit)을 [[현존재]]의 "일차적이고 대개의" 존재 양식으로 규정한다. [[현존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상성 속에서 보낸다. 비본래성이 "정상"이다. 이것은 본래성의 희귀함을 함축한다. 본래성은 예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을 [[세인]] 속에서 보낸다. [[불안]]을 회피하고, 양심의 부름을 듣지 않으며, 죽음을 유예한다. 이것이 인간의 "일상"이다. 일부 해석자들은 이 점에서 [[하이데거]]의 엘리트주의를 읽는다. 본래성이 소수의 특권이라면, 대중은 영구히 비본래적인가? [[하이데거]]는 이 비판을 거부할 것이다. 모든 [[현존재]]에게 본래성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은 드물다. ## 실존주의적 전유 ### 키르케고르의 선구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하이데거]]의 본래성 개념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에서 키르케고르는 세 가지 실존 양식—심미적, 윤리적, 종교적—을 구별했다. 심미적 실존은 쾌락과 즉각적 만족을 추구한다. 윤리적 실존은 의무와 책임을 받아들인다. 종교적 실존은 신 앞에 홀로 선다. 키르케고르에게 윤리적 실존으로의 전환은 "선택"을 통해 일어난다.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 자신의 존재에 책임을 지는 것이 핵심이다. 키르케고르의 '단독자'(den Enkelte) 개념은 [[하이데거]]의 각자성과 유사하다. 단독자는 대중에서 벗어나 신 앞에 홀로 서는 개인이다. 키르케고르의 대중 비판은 [[하이데거]]의 [[세인]] 분석과 공명한다. 그러나 차이도 있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결단을 강조하지만, [[하이데거]]는 신학적 전제를 배제한다. [[하이데거]]의 본래성은 세속화된 키르케고르로 볼 수 있다. ### 사르트르의 진정성 장-폴 [[사르트르]](1905-1980)는 [[하이데거]]의 본래성을 '진정성'(authenticité)으로 전유했다. 《존재와 무》(1943)에서 사르트르는 "나쁜 믿음"(mauvaise foi)의 반대로 진정성을 제시한다. 나쁜 믿음은 자신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에 "처해진"(condemned) 존재이지만, 이 자유를 회피하려 한다. 마치 결정된 것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카페 웨이터가 "너무 웨이터처럼" 행동할 때, 그는 자유를 부정하고 역할에 동일시한다. [[사르트르]]의 진정성은 자유를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기투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본래성보다 윤리적 색채가 강하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에서 진정성은 보편화된다. "자신을 선택할 때 인간은 모든 인간을 선택한다." 진정한 선택은 모든 인간에게 타당한 선택이어야 한다. 이것은 [[하이데거]]에게 없는 윤리적 보편성이다. ### 보부아르와 타자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애매성의 윤리를 위하여》(1947)에서 실존적 진정성을 타자와의 관계로 확장했다. [[사르트르]]의 진정성이 개인적이라면, [[보부아르]]는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보부아르]]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전제한다. "나의 자유가 실현되려면 타인의 자유를 원해야 한다." 억압받는 타자의 해방 없이 나의 진정한 자유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본래성 개념의 정치화이다. [[보부아르]]의 여성주의 고전 《제2의 성》(1949)도 이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여성이 "타자"로 규정되고 내재성에 갇힐 때, 진정한 실존이 불가능하다. 여성 해방은 실존적 진정성의 조건이다. ## 비판과 논쟁 ### 아도르노의 전문용어 비판 테오도어 아도르노(1903-1969)는 《진정성의 전문용어》(Jargon der Eigentlichkeit, 1964)에서 [[하이데거]]의 본래성 담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본래성 언어는 "전문용어"—의미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언어—이다. 아도르노의 비판은 다층적이다. 첫째, 본래성 담론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결단으로 환원한다. 불평등, 착취, 지배의 문제가 "본래적 실존"의 문제로 치환된다. 구조 비판이 실종되고 개인 윤리만 남는다. 둘째, "본래적"과 "비본래적"의 구분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다. 누가 본래적이고 누가 비본래적인지 결정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지배이다. "진정한" 실존에 대한 담론이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낸다. 셋째, 본래성 언어는 내용 없이 형식만 갖추고 있다. "결단", "본래적 자기", "양심의 부름"—이런 표현들이 숭고해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리면, "말의 아우라가 내용을 대체한다." ### 개인주의 문제 본래성 개념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양심의 부름, 결단성, 죽음-을-향한-존재—이 모든 것이 개인적이다. 타자와의 연대, 공동체적 가치, 사회적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타자의 타자성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공동존재(Mitsein) 분석에서 타인은 나와 함께 있는 공동-[[현존재]]로 나타나지만, 나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타자의 얼굴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1906-1975)—[[하이데거]]의 학생이자 연인—는 《인간의 조건》(1958)에서 공적 영역과 복수성을 강조했다. [[하이데거]]의 본래성이 고립된 개인에 머문다면, 아렌트의 "행위"는 타인들 사이에서, 공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 정치적 함의 [[하이데거]]의 1933년 나치 입당과 총장 취임은 본래성 개념의 정치적 함의를 의심하게 만든다. 본래적 결단성, 민족의 운명, 역사적 순간—이런 개념들이 나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일부 연구자들은 《[[존재와 시간]]》에 이미 문제적 요소가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세인]]에 대한 경멸, 대중 비판, 영웅적 개인의 결단 강조—이런 것들이 반민주적 경향과 친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철학적 개념과 정치적 활용을 구별해야 한다고 반론한다. 본래성 개념은 그 자체로 평가되어야 하며, [[하이데거]]의 정치적 선택과 무관하게 유효하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본래성을 해방의 언어로 전유한 것이 그 증거이다. 이 논쟁은 계속되며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 현대적 적용 ### 찰스 테일러의 진정성 윤리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는 《진정성의 윤리》(The Ethics of Authenticity, 1991)에서 현대 진정성 문화를 분석했다. 테일러는 진정성 이상을 단순히 비판하는 대신, 그것의 높은 형태와 낮은 형태를 구별한다. 테일러에 따르면, 진정성 이상의 핵심은 "각자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인간이 됨"이다. 이것은 18세기 낭만주의에서 시작된 근대적 이상이다. 내면에 귀 기울이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요청이다. 문제는 이 이상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면 옳다"는 식의 주관주의,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시즘으로 변질될 수 있다. 테일러는 이것을 진정성의 "낮은 형태"라 부른다. 높은 형태의 진정성은 "의미의 지평"을 전제한다. 자기실현이 의미를 가지려면, 자신을 넘어서는 것—역사, 자연, 타자, 신—과의 연결이 필요하다. 철저한 개인주의는 역설적으로 진정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성과사회와 가짜 본래성 한병철의 [[성과주의]] 분석은 현대의 "진정성" 담론이 새로운 형태의 비본래성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성과사회에서 "진정한 자기"의 추구는 또 다른 성과 명령이 된다. "자기 자신이 되라", "잠재력을 실현하라", "열정을 따르라"—이런 명령들이 현대의 [[세인]]이다. [[하이데거]]의 [[세인]]이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금지했다면, 현대의 [[세인]]은 "더 자기 자신이 되라"고 명령한다. 자기실현 자체가 강박이 된다. 이 역설은 본래성의 상품화에서 극단화된다. "진정한 여행", "진정한 음식", "진정한 경험"—마케팅은 본래성을 소비재로 판매한다. 본래성의 추구가 비본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디지털 시대의 본래성 디지털 기술은 본래성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진정한 자기"의 연출, 온라인 정체성과 오프라인 정체성의 괴리, 알고리즘에 의한 자기 이해의 형성—이 모든 것이 본래성의 의미를 복잡하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본래성을 위협한다는 진단이 있다. 알고리즘이 "당신이 좋아할 것"을 결정하고, 소셜 미디어가 비교와 모방을 강화하며, 주의 경제가 깊은 자기 성찰을 방해한다. [[세인]]이 알고리즘으로 구현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새로운 본래성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정보 접근의 민주화, 소수자 목소리의 확산, 대안적 정체성 실험—이런 것들이 [[세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관찰자의 기록 본래성 개념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하이데거]]의 공식 입장과 텍스트의 실제 어조 사이에 긴장이 있다. 그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가치 중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세인]]에 대한 묘사는 명백히 부정적이다. "퇴락", "잡담", "애매함"—이런 용어들은 가치 판단을 함축한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가치 개입을 은폐하고 있는지, 아니면 존재론적 기술과 평가적 언어가 불가피하게 뒤섞이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둘째, 본래성이 실제로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음"—이 정의는 추상적이다. 본래적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 [[하이데거]]는 내용을 제시하지 않고 형식만 제시한다. 이것이 강점인지 약점인지는 해석에 달려 있다. 셋째,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구분이 또 다른 형태의 [[세인]]이 될 수 있다. "본래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새로운 익명적 규범이 되면, 본래성의 추구 자체가 비본래적이 된다. 이 자기모순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는 미해결 문제이다. 넷째, 본래성 개념이 사회 비판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는 논쟁적이다. [[하이데거]]의 분석은 개인의 실존에 집중하지만, [[보부아르]]와 테일러는 사회적 조건을 강조한다. 억압 구조 속에서 본래성이 가능한가? 불평등한 사회에서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떠맡으라"는 요청이 공정한가? 다섯째, [[하이데거]]의 정치적 실패가 본래성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결단성을 강조한 철학자가 나치에 입당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래성 개념에 이미 권위주의적 경향이 내재해 있었는가, 아니면 철학과 정치를 분리해야 하는가?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본래성은 지속 가능한 상태인가, 순간적 경험인가? 본래성의 추구가 비본래적일 수 있다면, 어떻게 이 역설을 피하는가? 사회적 억압 속에서 개인의 본래성은 가능한가, 의미 있는가? 디지털 시대에 본래성의 의미는 변했는가? 그리고 [[하이데거]]의 정치적 실패는 그의 철학적 개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영향을 미치는가? ## 같이 읽기 ### 핵심 저작 - [[존재와 시간]] - 본래성 개념의 출처 - 휴머니즘에 대한 서간 - 실존주의와의 거리두기 - 이것이냐 저것이냐 - 키르케고르의 선구적 분석 - 존재와 무 - [[사르트르]]의 진정성 개념 ### 근본 개념 - [[현존재]] - 본래적/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존재 - [[세계-내-존재]] - 본래적 현존재도 유지하는 기본 구조 - [[염려]](Sorge) - 본래성/비본래성이 변양되는 [[현존재]]의 존재 구조 - [[세인]] - 비본래성의 원천 - [[퇴락]] - 세인 속으로 빠져듦의 존재론적 구조 - [[불안]] - 본래성으로의 통로 - [[내던져짐]] - 본래적으로 인수해야 할 사실성 - [[기투]] - 본래적 존재 가능성을 향한 자기 던짐 - 각자성 - 본래성의 조건 - 비본래성 - 본래성의 대립항이자 전제 ### 본래성의 구조 - [[양심]]의 부름 - 세인에서 불러냄 - [[결단성]] - 본래적 실존의 양태 - 죽음-을-향한-존재 - 본래성의 궁극 조건 - 순간(Augenblick) - 본래적 시간성 - [[시간성]] - 본래성의 시간적 의미 - [[역사성]] - 본래적 역사적 존재 ### 철학적 맥락 - [[하이데거]] - 본래성 개념의 창안자 - 키르케고르 - 실존적 선택의 선구자 - [[사르트르]] - 진정성 개념으로 전유 - [[보부아르]] -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 - 레비나스 - 타자 윤리학적 비판 ### 비판과 대안 - 아도르노 - 《진정성의 전문용어》 - 찰스 테일러 - 《진정성의 윤리》 - [[부르디외]] - 사회적 규범의 분석 - 푸코 - 자기의 테크놀로지 ### 현대 사회와의 연결 - [[성과주의]] - 자기실현 강박 - [[회사]] - 본래성의 상품화 - [[학교]] - 규범화된 자기실현 - 디지털 사회 - 알고리즘화된 자기 ### 심리치료적 적용 - 현존재분석(Daseinsanalyse) - 본래성을 향한 치료 - 로고테라피 - 의미와 본래성 - 실존주의 상담 - 실존적 진정성의 탐구 **마지막 업데이트**: 2025-11-26 14: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