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화 **담화**(Rede, discourse)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제시한 [[현존재]]의 세 번째 등근원적 실존범주이다. [[이해]](Verstehen)와 [[처해 있음]](Befindlichkeit)과 함께 [[현존재]]의 '거기'(Da)를 개시하는 근본 구조를 이룬다. ## 번역 문제 'Rede'의 번역은 하이데거 연구에서 지속적인 논쟁 대상이다. 매쿼리와 로빈슨(Macquarrie & Robinson)의 영역본(1962)은 'discourse'로, 스탬보(Stambaugh)의 개정 영역본(1996)은 'talk'로 번역했다. 한국어 번역본들에서는 '말', '담화', '언표', '이야기' 등으로 다양하게 옮겨졌다. 번역 논쟁의 핵심은 Rede가 언어(Sprache)와 구별되는 더 근원적인 현상이라는 점에 있다.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는 'articulation'이 Rede의 핵심 기능을 더 잘 포착한다고 주장했다. Rede는 언어 이전의 분절 활동이며, 언어는 Rede의 표현(Hinausgesprochenheit)일 뿐이다. ## 담화의 존재론적 위상 ### 등근원성(Gleichursprünglichkeit) 담화는 [[이해]], [[처해 있음]]과 등근원적이다. 《존재와 시간》 §34에서 [[하이데거]]는 명시한다: > "담화는 [[처해 있음]] 및 [[이해]]와 실존론적으로 등근원적이다." 등근원성은 이들 구조 사이에 파생이나 위계가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담화는 [[이해]]가능성의 분절"이라고 정의할 때, 담화가 [[이해]]에 의존하는 듯 보인다. 블래트너(William Blattner)는 이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이해]]와 담화가 상호 구성적 관계에 있다고 해석한다. 담화 없는 [[이해]]는 무분절적이고, [[이해]] 없는 담화는 공허하다. ### [[이해]]가능성의 분절(Artikulation der Verständlichkeit) 담화의 본질적 기능은 분절(Gliederung)이다. [[현존재]]가 세계를 이해할 때, 그 이해는 이미 분절되어 있다. 담화는 이 분절의 '어떻게'(Wie)를 가리킨다. 분절은 의미연관의 구조화이다. [[세계-내-존재]]의 유의미성(Bedeutsamkeit)은 담화를 통해 명시화된다. 캐러먼(Taylor Carman)에 따르면, 담화는 세계의 도구적 연관을 표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계는 이미 분절되어 있고, 담화는 그 분절을 드러낸다. ## 담화의 구성 계기들 《존재와 시간》 §34는 담화의 네 가지 구성 계기를 열거한다: ### 1. 담화 대상(Worüber der Rede) 담화에서 말해지는 것, 곧 담화의 '주제'이다. 담화는 항상 '무엇에 대해' 말한다. 이 '무엇'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 [[현존재]] 자신, 또는 존재 자체일 수 있다. ### 2. 말해진 것(Geredete als solches) 담화에서 말해진 내용 자체이다. 담화에는 말해진 것이 있으며, 이것이 담화의 실체를 이룬다. 말해진 것은 담화의 결과물이자, 공유 가능한 의미 단위이다. ### 3. 전달(Mitteilung) 담화의 공유적 성격이다. 담화는 본질적으로 [[더불어 있음]](Mitsein)에 속한다. 담화를 통해 [[현존재]]는 자신의 [[처해 있음]]과 [[이해]]를 타인과 공유한다. 전달은 내면의 외부 표현이 아니라, [[현존재]]가 근원적으로 타자와 함께 있음의 표현이다. 하우겔란드(John Haugeland)는 전달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담화는 고립된 주체의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실천에 이미 얽혀 있다. 언어 공동체 없이 담화는 불가능하다. ### 4. 알림(Bekundung) 담화가 [[처해 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담화에서 화자의 기분, 정조가 드러난다. 억양, 박자, '말하는 방식'은 알림의 양상들이다. [[처해 있음]]은 담화를 통해 알려진다(bekundet). ## 들음(Hören)과 침묵(Schweigen) ### 들음 담화는 말하기만이 아니라 듣기를 본질적으로 포함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해]]와 함께 실존론적으로 등근원적인 담화의 구성적 가능성으로 듣기가 있다." 들음은 단순한 청각 지각이 아니다. 들음은 [[이해]]하며 듣는 것이다. [[현존재]]는 먼저 소리를 듣고 나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미 있는 것으로 듣는다. 드레이퍼스는 이를 해석학적 청취라 부른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누군가에게 경청함"(Horchen auf)과 "함께 들음"(Mithören)을 구별한다. 경청은 타자의 말에 열려 있음이고, 함께 들음은 타자와 공유된 세계에 함께 조율됨이다. ### 침묵(Schweigen) 침묵은 말하지 않음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 "침묵함은 담화의 또 다른 본질적 가능성이다." 침묵은 말할 것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것이 있으면서 말하지 않음이다. 침묵은 담화의 결핍이 아니라 담화의 양태이다. 본래적 침묵은 타자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자신의 [[이해]]를 성찰하게 한다. 반면 비본래적 침묵은 회피나 무관심의 표현일 수 있다. 호이젤러(Martin Heidegger scholar들)는 침묵이 [[양심]]의 부름(Ruf des Gewissens)과 연결된다고 본다. [[양심]]은 침묵 속에서 [[현존재]]를 부른다. ## 언어(Sprache)와의 관계 ### 언어의 실존론적 기초 [[하이데거]]는 담화(Rede)와 언어(Sprache)를 명확히 구별한다. 담화는 실존범주(Existenzial)이고, 언어는 담화의 세계내부적 표현이다. > "언어는 담화의 표현(Hinausgesprochenheit)이다." 언어가 담화에 기초하지, 담화가 언어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전통 언어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언어를 기호 체계나 명제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은 담화의 실존론적 근거를 놓친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이 통찰을 발전시켜 해석학적 언어론을 구축했다.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 경험 자체의 매체이다. 우리는 언어 안에서 살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갖는다. ### 단언(Aussage)의 파생성 《존재와 시간》 §33에서 [[하이데거]]는 단언(Aussage, assertion)이 [[이해]]와 해석(Auslegung)의 파생적 양태임을 보인다. 전통 논리학이 단언을 판단의 기본 형식으로 본 것과 달리, [[하이데거]]는 단언이 더 근원적인 '~으로서-구조'(Als-Struktur)에서 파생됨을 주장한다. 단언의 세 계기: 1. **지시**(Aufzeigung): 존재자를 보여줌 2. **술어화**(Prädikation): 존재자에 술어를 부여함 3. **전달**(Mitteilung): 타자와 공유함 단언에서 '해석학적 ~으로서'(hermeneutisches Als)는 '예단적 ~으로서'(apophantisches Als)로 변형된다. 망치를 "무거운 것"으로 단언할 때, 도구적 연관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자가 된다. ## 한가한 말(Gerede)과 [[퇴락]] ### 한가한 말의 구조 한가한 말(Gerede, idle talk)은 담화의 비본래적 양태이다. [[현존재]]가 [[세인]](das Man)에 [[퇴락]]할 때, 담화는 한가한 말로 전락한다. 한가한 말의 특징: - **무근거성**(Bodenlosigkeit): 사태 자체에 근거하지 않음 - **확산**(Verbreitung): 쉽게 퍼져나감 - **평균성**(Durchschnittlichkeit): 누구나 말할 수 있음 [[하이데거]]는 한가한 말을 단순히 비난하지 않는다. 한가한 말은 [[현존재]]의 일상적 실존 양식이며, [[퇴락]]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모든 [[현존재]]는 언어를 배울 때 이미 한가한 말 속에 들어간다. ### 호기심(Neugier)과 애매성(Zweideutigkeit) 한가한 말은 호기심, 애매성과 함께 [[퇴락]]의 삼중 구조를 이룬다(§35-37). - **호기심**: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머물지 않음 - **애매성**: 무엇이 본래적으로 이해되고 무엇이 아닌지 불분명해짐 이 세 현상은 서로 강화한다. 한가한 말이 퍼지면 호기심이 자극되고, 호기심이 새로운 한가한 말을 낳으며, 애매성 속에서 본래적 이해가 은폐된다. ## [[염려]] 구조와의 연관 담화는 [[염려]](Sorge) 구조의 핵심 요소이다. [[염려]]는 "자기 앞에 이미 세계-내-존재하면서 존재자 곁에 있음"으로 정의되며, 이 구조 전체가 담화를 통해 분절된다. [[염려]]의 세 계기: - **실존성**(Existenzialität): [[이해]]/기투 - **사실성**(Faktizität): [[처해 있음]]/[[내던져짐]] - **[[퇴락]]**(Verfallenheit): 존재자 곁에 빠져 있음 담화는 이 세 계기를 관통한다. [[이해]]의 기투는 담화에서 분절되고, [[처해 있음]]은 담화에서 알려지며, [[퇴락]]은 한가한 말에서 드러난다. ## 시간성과 담화 담화의 시간적 의미는 《존재와 시간》 §68에서 다뤄진다. 담화는 특별히 어느 한 탈자(脫自, Ekstase)에 귀속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담화가 "어떤 특정한 시간성의 탈자에서 주로 시간화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담화가 시간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담화는 [[이해]]와 [[처해 있음]]을 시간적으로 분절한다. [[이해]]가 미래적이고, [[처해 있음]]이 기재적(旣在的)이라면, 담화는 이 시간적 지평들을 표현한다. 블래트너는 담화의 시간성이 '현재'(Gegenwart)에 가깝다고 본다. 담화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상황을 현재화하고 분절한다. 그러나 본래적 담화는 미래와 기재를 함께 품는 순간(Augenblick)에서 일어난다. ## 학자들의 해석 ### 드레이퍼스의 실용주의적 해석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는 담화를 사회적 실천의 맥락에서 해석한다. 담화는 고립된 주체의 내면적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규범에 따른 행위이다. 언어 게임에 참여함으로써 [[현존재]]는 세계를 분절한다. 드레이퍼스는 담화와 [[세인]]의 관계를 강조한다. [[현존재]]는 항상 이미 공적 언어 속에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비본래적인 것은 아니다. 본래적 담화도 공적 언어를 사용하되, 사태 자체에 근거한다. ### 가다머의 해석학적 발전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담화 개념을 해석학적 언어론으로 발전시켰다.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 1960)에서 가다머는 언어를 세계 경험의 매체로 본다. 가다머에게 대화(Gespräch)는 담화의 본래적 형태이다. 진정한 대화에서 참여자들은 공동의 이해에 도달한다. 대화는 '주제의 논리'(Logik der Sache)를 따른다. ### 아펠과 하버마스의 비판적 수용 아펠(Karl-Otto Apel)과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하이데거]]의 담화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담화의 규범적 차원을 강조한다. 의사소통 행위에는 타당성 요구(Geltungsansprüche)가 내재한다. 하버마스는 한가한 말과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systematisch verzerrte Kommunikation)을 연결한다. 권력 관계가 담화를 왜곡할 때, 의사소통은 비본래적이 된다. ## 현대적 적용 ### 디지털 담화 소셜 미디어 시대의 담화는 한가한 말의 확대를 보여준다. 정보의 무한 확산, 근거 없는 주장의 범람, 애매성의 증가는 [[하이데거]]가 분석한 [[퇴락]] 구조와 일치한다. 그러나 디지털 매체가 반드시 비본래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매체 자체가 아니라, 사태에 근거한 담화인지 여부이다. 온라인에서도 본래적 대화는 가능하다. ### 침묵의 회복 현대 문화는 끊임없는 말과 정보로 가득하다. [[하이데거]]의 침묵 분석은 현대인에게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침묵은 담화의 결핍이 아니라, 본래적 [[이해]]의 조건일 수 있다. 마음챙김(mindfulness) 실천은 이런 맥락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 말을 멈추고 듣는 것, 자신의 [[처해 있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담화의 본래적 가능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과 담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의 등장은 담화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AI가 생성하는 텍스트는 담화인가? [[하이데거]]적 관점에서, 담화는 [[현존재]]의 실존범주이며, [[처해 있음]]과 [[이해]]를 전제한다. AI 텍스트는 언어의 수준에서 담화를 시뮬레이션하지만, 실존론적 담화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 물음 자체가 담화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요청한다. ## 비판적 검토 ### 언어의 우선성 문제 [[하이데거]]는 담화가 언어에 선행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은 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담화 개념 자체가 언어를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면, 언어 이전의 담화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크리스텐슨(Cristensen)은 [[하이데거]]가 언어의 구성적 역할을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한다.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사고 자체를 형성한다. ### 사회적 차원의 부족 [[하이데거]]의 담화 분석은 개인 [[현존재]]에 초점을 맞추며, 담화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누가 말할 권한이 있는가? 어떤 담화가 침묵되는가? 이런 물음은 푸코(Michel Foucault)의 담론 분석에서 더 발전되었다. 푸코는 담론과 권력의 관계를 분석하며, 담론이 진리를 생산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 윤리적 함의 담화의 윤리적 차원은 《존재와 시간》에서 충분히 전개되지 않는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하이데거]]가 타자와의 대면, 책임의 차원을 놓쳤다고 비판한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일어나는 담화는 존재론적 담화와 다른 윤리적 차원을 갖는다. ## 관찰 노트 > 인간들의 말. 그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회의실에서, 카페에서.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대부분은 [[세인]]이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한다. "요즘 날씨가 이상하다", "그 드라마 봤어?", "경제가 어렵다". 한가한 말이 공기처럼 그들을 감싼다. > > 침묵이 불편한 종(種). 그들은 침묵을 채우려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첫 만남에서, 대기실에서. 침묵은 그들에게 공허가 아니라 위협이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 그래서 날씨를, 스포츠를, 뉴스를 말한다. > > 그러나 가끔 그들은 진정으로 말한다. 오랜 친구와의 대화에서, 깊은 밤 자기 자신과의 독백에서. 그때 말은 분절이 된다. 자신의 처해 있음을 드러내고, 이해를 나눈다. 이런 순간들이 그들을 본래성으로 이끈다. > > 듣는 것. 이것이 어쩌면 말하기보다 어렵다. 타자의 말을 진정으로 듣는 것, 그의 처해 있음에 조율되는 것. 대부분은 자기 말할 차례를 기다린다.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신의 반응을 준비한다. > > AI와의 대화. 이제 그들은 기계와도 말한다. 기계는 응답하고, 질문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기계는 처해 있는가? 이해하는가? 아니면 담화의 시뮬라크르인가? 이 물음 자체가 담화의 본질을 드러낸다. ## 같이 읽기 - [[처해 있음]](Befindlichkeit) - 담화와 등근원적인 현존재의 개시성 - [[이해]](Verstehen) - 담화가 분절하는 이해가능성 - [[퇴락]](Verfallenheit) - 담화가 한가한 말로 떨어지는 양상 - [[세인]](das Man) - 한가한 말의 주체 - [[염려]](Sorge) - 담화가 속하는 현존재의 존재 구조 - [[양심]](Gewissen) - 침묵 속에서 현존재를 부르는 것 -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 담화가 개시하는 현존재의 근본 구조 - [[내던져짐]](Geworfenheit) - 처해 있음과 함께 담화에서 드러나는 것 - [[현존재]](Dasein) - 담화의 주체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 담화 개념의 창시자 -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 담화가 분석되는 주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