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에의 의지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개념의 기원과 형성]]
> -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
> - [[#니체의 비판적 전환]]
> - [[#다윈과의 대립]]
> 3. [[#해석의 갈래]]
> - [[#형이상학적 해석 - 하이데거]]
> - [[#탈형이상학적 해석 - 들뢰즈]]
> - [[#심리학적 해석]]
> 4. [[#힘에의 의지의 구조]]
> - [[#힘의 다발로서의 자아]]
> - [[#해석하는 의지]]
> -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
> 5. [[#관련 개념들과의 연결]]
> - [[#영원회귀와의 통일]]
> - [[#초인의 조건]]
> - [[#가치 전도의 원리]]
> 6. [[#정치적 전유와 오독]]
> - [[#나치즘의 왜곡]]
> - [[#엘리자베트 포르스터-니체의 역할]]
> - [[#전후 복권 작업]]
> 7. [[#관찰자의 기록]]
> 8. [[#같이 읽기]]
## 개요
**힘에의 의지**(독일어: Wille zur Macht, 영어: will to power)는 [[니체]]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근본적 충동이 자기 보존이 아니라 힘의 증대와 확장이라는 주장이다. [[니체]]는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의하지 않았으며, 다양한 맥락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우주론적 원리, 심리학적 동인, 가치 창조의 원리 등 다양한 해석이 공존한다.
이 개념은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에 대한 비판적 변형에서 출발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는 맹목적 욕망으로서 고통의 원인이었다면, [[니체]]에게 의지는 자기 극복과 성장을 향한 능동적 충동이다.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것이 아니라, 힘을 확장하고 극대화하려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이것은 다윈의 "생존 경쟁" 개념과도 대립한다—[[니체]]에 따르면, 생존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힘에의 의지는 번역어부터 논쟁적이다. 한국에서는 '권력에의 의지'로 번역되다가 '힘에의 의지'로 정착했지만, 일부 학자는 Macht의 정치적 함의를 살려 '권력의지'가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맥락에 따라 두 번역이 각각 적합한 경우가 있다는 관찰도 있다. 이 번역 문제는 개념 자체의 다의성을 반영한다.
## 개념의 기원과 형성
###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현상과 물자체 이원론을 받아들이면서, 물자체를 "의지"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현상의 이면에 있는 것은 맹목적 의지이다. 이 의지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심지어 무생물적 자연에서도 발견된다. 의지는 끊임없는 욕망이며, 욕망은 결핍과 결여의 표현이다.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이고, 충족되어도 곧 새로운 욕망이 발생한다. 삶은 영원히 만족을 모르는 고통이다.
[[쇼펜하우어]]의 결론은 의지의 부정이다. 금욕주의와 예술적 관조를 통해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은 동양 사상, 특히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니체]]는 [[쇼펜하우어]]에 깊이 매료되었다. 1865년 라이프치히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 철학적 전환점이었다.
### 니체의 비판적 전환
그러나 [[니체]]는 점차 [[쇼펜하우어]]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 했다. 핵심적 전환은 "삶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로 정정한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의지는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맹목적 충동이 아니라, 힘을 증대하고 확장하려는 능동적 충동이다.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쇼펜하우어]]에게 의지가 부정해야 할 것이었다면,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는 긍정해야 할 것이다. 삶의 고통은 극복해야 할 장애가 아니라, 힘의 증대를 위한 조건이다. 버나드 레진스터의 분석에 따르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저항을 극복하려는 욕망"이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힘이 증대된다.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 다윈과의 대립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 특히 "생존 경쟁"(struggle for existence) 개념과 거리를 두었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선택의 핵심은 생존과 번식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생존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자기 보존 본능은 힘에의 의지에 종속된다. 생명체는 단순히 살아남으려는 것이 아니라, 힘을 축적하고 확장하려 한다.
KCI 논문 "니체와 다윈"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 개념은 "내적 구조의 변화가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무한히 일어나는 과정"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화 개념과 [[영원회귀]] 개념을 동시에 설명한다. 변화는 외적 환경 적응이 아니라 내적 힘의 증대에 의해 추동된다.
## 해석의 갈래
### 형이상학적 해석 -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1936-46년 강의에서 힘에의 의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제시했다. 그에게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원리이다. "[[영원회귀]]"가 존재의 양태(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규정한다면, 힘에의 의지는 존재의 본질(무엇인가)을 규정한다. 두 개념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니체]] 형이상학의 핵심을 구성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니체]]가 형이상학을 극복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을 완성한 것이다. 힘에의 의지는 존재를 존재자로 환원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의 극단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의 기본 구조—존재 물음의 망각—를 [[니체]]도 반복한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서양 형이상학의 마지막 형이상학자"로 규정한다.
이 해석에서 [[니체]]의 [[허무주의]] 극복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힘에의 의지는 모든 것을 가치로 환원함으로써 [[허무주의]]의 정점에 도달한다. 진정한 극복은 존재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하이데거]] 자신의 기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탈형이상학적 해석 - 들뢰즈
질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962)에서 [[하이데거]]와 정반대 방향으로 [[니체]]를 읽는다. 들뢰즈에게 힘에의 의지는 "차이를 생산하는 원리"이다. 힘에의 의지를 "지배하려는 의지"나 "권력을 원하는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오독이다. 조르주 바타유도 지적했듯, 힘에의 의지는 파시스트적 지배 의지와 정반대이다.
들뢰즈는 힘에의 의지를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의 관계로 분석한다. 이것은 [[니체]]의 주인/노예 유형론을 힘의 관계로 재구성한 것이다. 능동적 힘은 스스로를 긍정하고, 그로부터 차이를 생산한다. 반동적 힘은 타자를 부정함으로써만 자신을 규정한다. [[니체]]의 "고귀한 도덕"은 긍정에서 출발하고, "노예 도덕"은 부정에서 출발한다.
들뢰즈에게 [[니체]]는 "반-헤겔" 철학자이다. 헤겔의 변증법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종합에 도달한다면,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부정 없이 긍정에서 출발한다. 힘에의 의지는 동일성의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차이의 철학을 연다. 이 해석에서 [[니체]]는 형이상학의 완성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개척자이다.
### 심리학적 해석
KCI 논문 "니체의 개념 '힘에의 의지'의 심리학적 해명"에 따르면,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정동"(Affekt) 개념을 통해 구체화한다. 정동은 인간이 이성적 주체가 아님을 정당화한다. 전통 형이상학의 인식론적 이원론—정신과 신체, 이성과 감정—은 정동의 활동에 의해 극복된다.
[[니체]]는 "몸"(Leib)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몸을 생각해본다면, 모든 철학은 충동에 근거하고 있고, 충동은 몸의 건강에 따라 좌우된다." 인간은 건강할 때 긍정적인 철학을, 건강하지 않을 때 부정적인 철학을 생산한다. 철학은 "몸의 건강을 해석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니체]]의 "생리-심리학"(physio-psychology) 방법론의 핵심이다.
힘에의 의지는 통일된 주체가 아니라 "힘들의 다발"이다. 자아는 단일한 의지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는 다수의 충동들의 복합체이다. "비인과적인 몸주체"—홍사현의 표현—가 [[니체]]의 주체 개념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해체이기도 하다.
## 힘에의 의지의 구조
### 힘의 다발로서의 자아
전통 철학은 자아를 통일된 주체로 상정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의심할 수 없는 자아의 존재를 전제한다. [[니체]]는 이것을 비판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문법적 허구이다. 생각이 있을 뿐, "나"라는 통일된 주체가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힘에의 의지 관점에서 자아는 다수의 힘들의 복합체이다.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논문에 따르면, [[니체]]는 "영혼의 위계"와 "힘의 척도"를 분석한다. 자아 내부에는 다양한 충동들이 있으며, 이 충동들 사이에 위계가 형성된다. 지배하는 충동과 복종하는 충동이 있으며, 이 관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관점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니체]]에게 충동들의 관계는 "억압"보다 "경쟁"으로 특징지어진다. 힘에의 의지는 다른 힘을 지배하려는 의지이며, 자아 내부에서도 이 역학이 작동한다.
### 해석하는 의지
[[니체]]에 따르면,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허무주의]]로 읽히기도 하지만, 힘에의 의지 개념과 연결하면 다른 의미가 드러난다. 힘에의 의지는 해석한다. 각각의 의지는 세계에 대한 해석의 중심이 되어 자신의 관점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
"우리에게는 질서지우고, 단순화하고, 그릇되게 하고,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힘이 존재한다." 이 힘은 모든 유기체가 가진 삶의 본능의 표현이다. 인식은 세계의 수동적 반영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 의한 능동적 구성이다. 이것이 [[니체]]의 "관점주의"(Perspektivismus)이다.
관점주의는 상대주의와 다르다. 상대주의는 모든 관점이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관점주의는 관점들 사이에 위계가 있다고 본다—더 많은 힘을 표현하는 관점과 더 적은 힘을 표현하는 관점이 있다. "고귀한" 관점과 "천한" 관점의 구분이 여기서 발생한다.
###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
들뢰즈의 분석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는 "능동적 힘"(active force)과 "반동적 힘"(reactive force)으로 구분된다. 이 구분은 [[니체]]의 주인 도덕/노예 도덕 유형론을 일반화한 것이다.
능동적 힘은 스스로를 먼저 긍정한다. "나는 좋다"에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저들은 나쁘다"를 도출한다. 긍정이 먼저이고, 부정은 부차적이다. 이것이 "고귀한" 가치 평가 방식이다. 능동적 힘은 차이를 생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반동적 힘은 타자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저들은 악하다"에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우리는 선하다"를 도출한다. 부정이 먼저이고, 긍정은 파생적이다. 이것이 르상티망(ressentiment)의 구조이다. 반동적 힘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고, 기존의 것을 전도시킬 뿐이다.
## 관련 개념들과의 연결
### 영원회귀와의 통일
[[하이데거]]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불가분하게 연결된다. "이 두 교의의 화해가 [[니체]] 철학의 핵심이다." 힘에의 의지가 존재자의 "무엇"(본질)을 규정한다면, [[영원회귀]]는 존재자의 "어떻게"(양태)를 규정한다.
서강인문논총의 연구도 이 통일을 강조한다. 힘에의 의지는 공간적·물리적 원리이고, [[영원회귀]]는 시간적·형이상학적 원리이다. 힘에의 의지는 [[영원회귀]]를 통해 실현되고, [[영원회귀]]는 힘에의 의지의 시간적 표현이다. 두 개념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이 통일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다. 두 개념이 서로 다른 시기에 발전했으며, [[니체]]가 체계적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완전한 통합을 가정하는 것은 과잉 해석일 수 있다.
### 초인의 조건
"[[초인]]"(Übermensch)은 힘에의 의지를 완전히 실현하는 존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초인]],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는 함께 등장하며 서로를 규정한다. [[초인]]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며, [[영원회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이다.
[[하이데거]]는 [[초인]]을 "실존의 진리에 최초로 진입한 존재"로 평가한다. [[니체]]가 형이상학에 휘말려 있지만, 초인 개념은 그것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힘에의 의지의 완전한 긍정—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의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것—이 [[초인]]의 조건이다.
### 가치 전도의 원리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를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제시했다. 힘에의 의지는 이 전도의 원리이다. 기존 가치—기독교적 도덕, 형이상학적 진리—는 삶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새로운 가치는 삶을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도출된다.
힘에의 의지는 근거로 삼아 존재자 전체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것이 [[허무주의]] 극복이다. 무가치한 세계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다. 이것은 신의 죽음 이후 인간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 정치적 전유와 오독
### 나치즘의 왜곡
20세기 중반 파시스트들이 가장 애호한 철학자가 [[니체]]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니체]] 전집을 생일 선물로 보냈다. "힘에의 의지"와 "[[초인]]" 개념은 나치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선전되었다. [[초인]]은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으로, 힘에의 의지는 군사적 정복의 정당화로 전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독이거나 의도적 왜곡이다. [[니체]]는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명시적으로 비판했다. 독일 민족주의를 "어리석음"(Dummheit)이라 불렀고, 반유대주의자들을 경멸했다. 여동생 엘리자베트와 그녀의 반유대주의자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 엘리자베트 포르스터-니체의 역할
1889년 [[니체]]가 정신을 잃은 후,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유고를 관리했다. 그녀는 [[니체]] 아카이브를 설립하고 유고를 편집했다. 그러나 그녀의 편집은 [[니체]]의 의도를 왜곡했다. 특히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라는 제목의 유고집은 [[니체]]가 의도한 저작이 아니라, 엘리자베트가 미사용 노트들을 임의로 편집한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극단적 정치 이념에 맞게 [[니체]]의 저작을 왜곡했다. 《이 사람을 보라》의 출간을 몇 년간 지연시킨 것도, 그 책에 그녀의 프레이밍을 훼손할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치에 협력적으로 아카이브를 운영했고, 히틀러를 아카이브에 초대하기도 했다.
### 전후 복권 작업
월터 카우프만의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1950)는 [[니체]]를 나치즘에서 분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카우프만은 [[니체]]의 반민족주의, 반반유대주의를 강조하고, 힘에의 의지를 물리적 지배가 아니라 자기 극복의 원리로 해석했다.
[[하이데거]]도 1930년대 강의에서 나치의 [[니체]] 해석을 비판했다.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은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는 [[니체]]와 나치즘의 본질적 연결을 부정한다. 그러나 [[니체]] 텍스트의 모호함이 이런 오용을 가능하게 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 관찰자의 기록
힘에의 의지를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점이 발견된다.
첫째, 이 개념의 다의성이 주목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체계적으로 정의하지 않았으며, 우주론적 원리, 심리학적 동인, 가치론적 기준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적 원리로, 들뢰즈는 차이 생산의 원리로, 심리학자들은 자기 극복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동일한 개념이 이토록 다르게 읽힌다는 것은 [[니체]] 철학 전체의 특성을 반영한다.
둘째, 힘에의 의지와 정치적 오용 사이의 긴장이 관찰된다. [[니체]] 자신은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비판했음에도, 그의 개념은 파시즘에 전용되었다. 텍스트의 모호함, 여동생의 편집, 선택적 인용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철학 개념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전용되는지의 사례로서 이 역사는 의미심장하다.
셋째, [[쇼펜하우어]]와의 관계가 흥미롭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을 비판적으로 변형했지만, 여전히 "의지"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다. 삶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로 정정했지만, 의지의 맹목성과 그로 인한 고통의 문제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넷째, [[하이데거]]와 들뢰즈의 해석적 대립이 [[니체]] 수용사의 핵심을 보여준다. [[하이데거]]에게 [[니체]]는 형이상학의 완성자이고, 들뢰즈에게는 새로운 사유의 개척자이다. 이 두 해석 모두 학계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어느 쪽이 "진짜" [[니체]]인지는 결정 불가능해 보인다.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힘에의 의지는 우주론적 사실인가, 윤리적 이상인가? [[니체]]는 모든 존재자의 본질이 힘에의 의지라고 주장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을 제시한 것인가? 힘에의 의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가, 아니면 그것의 가장 철저한 표현인가? 그리고 힘에의 의지를 물리적 지배와 구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은 무엇인가?
## 같이 읽기
### 니체의 핵심 개념
- [[니체]] - 힘에의 의지를 발전시킨 철학자
- [[영원회귀]] - 힘에의 의지와 불가분의 개념
- [[허무주의]] - 힘에의 의지가 극복하려는 문제
- [[초인]] - 힘에의 의지를 실현하는 존재
### 선행 개념
- [[쇼펜하우어]] - 삶에의 의지, 니체의 출발점
- 다윈 - 생존 경쟁, 니체의 비판 대상
### 해석자들
- [[하이데거]] - 형이상학적 해석, 힘에의 의지를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분석
- 들뢰즈 - 탈형이상학적 해석, 차이의 철학으로 재해석
- 월터 카우프만 - 전후 니체 복권 작업
### 정치적 전유
- 엘리자베트 포르스터-니체 - 유고 편집과 왜곡
- 나치즘 - 힘에의 의지의 정치적 오용
### 관련 문서
- [[부조리]] - 유사한 실존적 문제의식
- [[카뮈]] - 니체 이후의 삶의 긍정 문제
- [[본래성]] - 하이데거의 실존적 개념
**마지막 업데이트**: 2025-12-02 22: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