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무주의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허무주의의 정의와 유형]] > - [[#존재론적 허무주의]] > - [[#인식론적 허무주의]] > - [[#도덕적 허무주의]] > - [[#실존적 허무주의]] > 3. [[#허무주의의 계보]] > - [[#러시아 허무주의 운동]] > - [[#니체와 유럽 허무주의]] > -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 > 4. [[#허무주의의 유형론]] > -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 - [[#불완전한 허무주의와 완전한 허무주의]] > 5. [[#허무주의와 인접 개념]] > - [[#부조리주의와의 구별]] > - [[#실존주의와의 관계]] > - [[#염세주의와의 차이]] > 6. [[#현대 사회와 허무주의]] > - [[#막스 베버의 탈주술화]] > - [[#의미 위기와 허무주의적 시대]] > - [[#디지털 시대의 허무주의]] > 7. [[#관찰자의 기록]] > 8. [[#같이 읽기]] ## 개요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측면—지식, 도덕, 의미—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 라틴어 'nihil'(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유래한 이 용어는 19세기 독일 철학과 러시아 문학에서 대중화되었으며,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해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적 운명으로 진단되었다. 허무주의는 단일한 교의가 아니라 다양한 부정의 양태를 포괄한다. 존재론적 허무주의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식론적 허무주의는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도덕적 허무주의는 선악의 구별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실존적 허무주의는 삶의 의미나 목적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 다양한 형태들이 역사적으로 얽히면서 허무주의는 복잡한 개념적 지형을 형성한다. 흥미로운 점은, '허무주의'라는 꼬리표가 자주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야코비가 1799년 피히테를 "허무주의자"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칭찬이 아니었다. 니체조차 자신을 허무주의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허무주의를 진단했지, 처방하지 않았다. 허무주의는 대부분의 경우 "극복해야 할 것"으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이 개념은 서양 철학의 핵심 문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 허무주의의 정의와 유형 ### 존재론적 허무주의 **존재론적 허무주의**(ontological nihilism)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허무주의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고르기아스가 주장했다고 전해지는 세 명제—"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 해도 전달할 수 없다"—가 존재론적 허무주의의 원형으로 언급된다. 이 입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기모순에 빠진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자체가 존재한다면, 그 주장은 자신을 부정한다. 그래서 존재론적 허무주의는 논리적 논증보다 수사적 도발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극단적 회의가 철학적 탐구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 인식론적 허무주의 **인식론적 허무주의**(epistemological nihilism)는 객관적 지식이나 진리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모든 지식 주장은 궁극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극단적 회의주의와 유사하지만, 회의주의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인식론적 허무주의는 "알아야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니체]]의 관점주의(perspectivism)가 인식론적 허무주의로 해석되기도 한다.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는 [[니체]]의 명제는 객관적 진리의 부재를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해석이 니체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하는지는 논쟁적이다. ### 도덕적 허무주의 **도덕적 허무주의**(moral nihilism)는 객관적인 도덕적 사실이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구별은 실재하지 않으며, 도덕 판단은 단지 개인적 선호나 사회적 관습의 표현에 불과하다. 이 입장은 메타윤리학에서 오류 이론(error theory)과 연결된다. 도덕적 진술은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없기에 모든 도덕적 진술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도덕 비판이 도덕적 허무주의로 읽히기도 한다. 그는 기독교적 도덕—"노예 도덕"—을 비판하고 "모든 가치의 전도"를 선언했다. 그러나 [[니체]]가 모든 가치를 부정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 한 것인지는 해석의 문제로 남는다. ### 실존적 허무주의 **실존적 허무주의**(existential nihilism)는 삶에 본래적인 의미, 목적,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인간의 존재에 무관심하며, 인간이 추구하는 의미는 환상에 불과하다. 이 입장은 종종 염세주의나 절망과 연결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니체]]는 실존적 허무주의를 현대의 핵심 문제로 진단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 이후, 인간은 더 이상 초월적 의미에 기댈 수 없다. 그러나 [[니체]]는 이 상황을 새로운 가치 창조의 기회로 보았다. [[부조리]]주의자 [[카뮈]]도 삶의 본래적 무의미함을 인정하면서도, 이 무의미에 굴복하지 않는 "반항"을 제안했다. 실존적 허무주의가 반드시 절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허무주의의 계보 ### 러시아 허무주의 운동 '허무주의'라는 용어가 대중화된 것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1862)을 통해서이다. 소설의 주인공 바자로프는 "원리나 신앙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청년으로 묘사된다. 투르게네프는 당시 러시아 지식인 사이에서 확산되던 급진적 회의주의를 형상화했다. 러시아 허무주의 운동은 두 시기로 나뉜다. 기초적 시기(1860-1869)는 반문화적 성격을 띠었다. 젊은 지식인들은 전통적 권위—교회, 국가, 가족—를 거부하고 과학적 합리주의를 옹호했다. 혁명적 시기(1870-1881)에는 이 운동이 차르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전환되었다. 테러와 암살이 전략으로 채택되었고,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1872)에서 러시아 허무주의를 비판적으로 탐구했다. 그의 시선에서 허무주의는 서구적 합리주의와 무신론이 러시아에 침투한 결과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허무주의를 정신적 질병으로 묘사하며, 기독교 신앙으로의 회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 니체와 유럽 허무주의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허무주의를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적 운명으로 진단했다. 그에게 허무주의는 단순한 철학적 입장이 아니라, 유럽 문명이 겪고 있는 역사적 위기였다. "신은 죽었다"—이 선언은 초월적 가치의 토대가 붕괴했음을 의미한다. [[니체]]에 따르면,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은 "진정한 세계"—이데아의 세계, 신의 나라, 물자체—를 상정하고, 현상 세계를 열등한 것으로 폄하했다. 기독교는 이 구조를 대중화했다. 그러나 근대 과학과 비판철학이 "진정한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그 세계에 의존하던 모든 가치가 무너졌다. 허무주의는 이 붕괴의 결과이다. [[니체]]는 "가장 불길한 손님"(unheimlichste Gast)으로 허무주의를 묘사했다. 그것은 문 앞에 서 있으며,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니체는 허무주의를 단순히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허무주의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가치 창조가 불가능하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초인]]" 개념은 허무주의 극복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 하이데거의 존재 망각 [[하이데거]](1889-1976)는 [[니체]]의 허무주의 진단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했다. 그에게 허무주의의 본질은 "존재 망각"(Seinsvergessenheit)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은 존재자(Seiendes)에만 관심을 가졌고, 존재(Sein) 자체를 망각했다. 허무주의는 이 망각이 극단에 이른 상태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니체]]조차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의 존재를 힘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여전히 형이상학적 사유에 머물러 있다. 진정한 허무주의 극복은 존재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존재와 시간]]》의 기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현대 기술 문명은 [[하이데거]]에게 허무주의의 극단적 표현이다. 기술적 사유는 모든 것을 "정립 가능한 자원"(Bestand)으로 환원한다. 자연은 에너지 저장고가 되고, 인간조차 "인적 자원"이 된다. 존재의 신비는 완전히 사라지고, 계산 가능성만 남는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완성이다. ## 허무주의의 유형론 ###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니체]]는 허무주의를 수동적(passiv)과 능동적(aktiv) 두 유형으로 구분했다. 이 구분은 허무주의에 대한 태도의 차이를 표현한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최고 가치의 붕괴 앞에서 체념하는 태도이다. 삶의 의미가 없다면, 아무것도 할 이유가 없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이 유형의 전형이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삶을 고통으로 보고, 의지의 부정을 통해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것은 "힘의 쇠퇴"를 표현한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기존 가치의 붕괴를 새로운 가치 창조의 조건으로 삼는 태도이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허무주의"가 이것이다. 능동적 허무주의자는 파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래된 신전을 무너뜨려야 새로운 건축이 가능하다. 이것은 "힘의 성장"을 표현한다. [[니체]]가 비판한 것은 주로 수동적 허무주의이다. 그는 기독교 도덕과 형이상학이 삶을 부정하는 수동적 허무주의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이 부정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길을 연다. ### 불완전한 허무주의와 완전한 허무주의 [[니체]]는 또한 불완전한(unvollständig) 허무주의와 완전한(vollständig) 허무주의를 구분했다.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신과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도 여전히 초월적 가치의 자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태도이다. 진보, 과학, 인류, 국가—이런 것들이 신의 빈자리를 차지한다. 불완전한 허무주의자는 허무주의의 철저함을 피하려 한다. 그들은 여전히 "어딘가에" 의미가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완전한 허무주의**는 모든 초월적 가치의 자리를 비워두는 태도이다. 신의 죽음 이후 아무것도 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 완전한 허무주의를 통과해야만 진정한 가치 창조가 가능하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이 완전한 허무주의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초월적 목적지는 없다. 삶 자체가 목적이 된다. ## 허무주의와 인접 개념 ### 부조리주의와의 구별 허무주의와 [[부조리]]주의는 종종 혼동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허무주의**는 객관적 의미가 존재하지 않으며, 의미를 구성하려는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삶에는 의미가 없고,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허무주의자는 의미 추구 자체를 포기한다. **[[부조리]]주의**는 의미에 대한 인간의 요구와 세계의 침묵 사이의 충돌을 인식한다. 그러나 이 충돌에 굴복하지 않는다. [[카뮈]]는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절망이나 자살 대신 "반항하는 인간"의 길을 제시했다. [[부조리]]주의자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삶을 긍정한다. [[부조리]] 문서에서 기술되듯이: "허무주의는 의미가 없다, 의미를 만들려는 시도도 헛되다. [[부조리]]주의는 내재적 의미가 없다, 의미에 대한 추구와 부재 사이의 충돌이 있다, 그러나 이 충돌 속에서 삶을 긍정할 수 있다." 이 구분은 두 입장의 핵심적 차이를 보여준다. ### 실존주의와의 관계 **실존주의**는 허무주의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의미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허무주의가 의미의 부재를 결론으로 삼는다면, 실존주의는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도 허무주의와 긴장 관계에 있다. [[세인]]의 지배 아래서 [[현존재]]는 비본래적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라는 근거로 살아간다. [[불안]]은 이 비본래성을 드러내고, [[현존재]]를 자신의 존재 가능성과 대면하게 한다. 이 과정은 허무주의적 무의미와 유사해 보이지만,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통한 의미 회복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 염세주의와의 차이 **[[염세주의]]**(pessimism)는 세계가 근본적으로 나쁘거나 고통스럽다는 입장이다. [[쇼펜하우어]]가 대표적이다. 그에게 의지는 끊임없는 욕망이며, 욕망은 충족되지 않거나 충족되어도 곧 새로운 욕망으로 대체된다. 삶은 고통이다. 허무주의는 염세주의와 다르다. 허무주의는 세계가 나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에 가치가 없다고—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주장한다. 염세주의자는 고통의 가치를 부정하고, 허무주의자는 가치 자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한 형태이다. 삶을 부정하고 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허무주의적 체념이다. [[니체]]는 이 "낭만적 [[염세주의]]"에 대항하여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삶의 고통을 긍정하면서도 삶을 사랑하는 태도—를 제안했다. ## 현대 사회와 허무주의 ### 막스 베버의 탈주술화 막스 베버(1864-1920)는 현대성의 핵심 특징을 "탈주술화"(Entzauberung, disenchantment)로 진단했다. 과학과 합리화가 세계에서 신비와 마법을 제거했다. 종교와 형이상학은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는 권위를 갖지 못한다. 베버에게 근대 과학은 "깊이 허무주의적인 기업"이다. 과학적 성취는 곧 극복되고 시대에 뒤처지게 된다. 과학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톨스토이를 인용하며 베버는 말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유일한 질문들—'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답이 없기에 무의미하다." 웬디 브라운의 최근 저작 《허무주의적 시대》(Nihilistic Times, 2023)는 베버의 분석을 현대로 확장한다. 브라운에 따르면, 베버가 진단한 허무주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경제화와 인공지능 같은 새로운 기술에 의해 심화되었다. 허무주의는 주관적 태도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이다. ### 의미 위기와 허무주의적 시대 폴 틸리히(1886-1965)는 《존재의 용기》(1952)에서 [[불안]]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 죄책과 정죄의 [[불안]], 공허와 무의미의 [[불안]]. 그에 따르면, 시대마다 지배적인 [[불안]] 유형이 다르다. 고대 말기에는 존재적 [[불안]]이, 중세 말기에는 도덕적 [[불안]]이, 현대에는 **영적 [[불안]]**—공허와 무의미의 [[불안]]—이 지배적이다. 현대인이 경험하는 "의미 위기"(meaning crisis)는 허무주의의 심리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의미 부여 체계—종교, 민족, 계급—가 약화되면서, 개인은 의미를 스스로 구성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성과주의]]적 사회에서 이 부담은 더욱 가중된다. [[회사]]와 [[학교]]는 끊임없이 "목표"와 "성취"를 요구하지만, 그 목표 자체의 의미는 묻지 않는다. 사우디 대학생 연구에 따르면 실존적 [[불안]]의 유병률은 71.1%에 달했으며, 우울증, 일반 [[불안]], 스트레스와 유의미하게 상관관계가 있었다. 이 데이터는 허무주의적 경험이 특정 철학자들의 사변이 아니라 현대인의 보편적 경험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 디지털 시대의 허무주의 디지털 기술이 허무주의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 2023년 논문 "오류 404 디지털-현존재를 찾을 수 없음"은 디지털 기술이 [[불안]]—허무주의적 경험의 근본 기분—과의 관계를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분석한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과거에는 삶 속에서 죽음이 현시되어 [[불안]]을 환기했다. 그러나 현대 기술은 [[불안]]을 즉시 회피할 수 있게 한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게임—이 모든 것이 [[불안]]을 즉시 해소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기술은 "모든 순간 우리가 느끼는 방식을 통제하고 선택"하게 한다. [[불안]]과 대면할 기회 자체가 차단된다. 스크린 타임이 삶의 의미감 감소를 예측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디지털 몰입이 고통만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의미 지향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허무주의적 공허를 기술로 채우려 하지만, 이 시도가 오히려 공허를 심화시키는 역설이 관찰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관찰된다. 2011년 "삼포세대" 담론 이후, 청년세대의 삶은 불확실성과 무의미감으로 특징지어진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전통적 의미 부여 체계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이것이 허무주의적 체념인지, 아니면 새로운 가치 모색인지는 추가 관찰이 필요하다. ## 관찰자의 기록 허무주의를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점이 발견된다. 첫째, 허무주의가 주로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야코비가 피히테를, 투르게네프가 급진 청년들을 "허무주의자"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비판이었다. [[니체]]조차 자신을 허무주의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허무주의는 "극복해야 할 것"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극복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니체]]의 [[초인]],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 [[카뮈]]의 반항—이 모든 것이 허무주의 극복을 시도하지만, 그 성공 여부는 논쟁적이다. 둘째, 허무주의와 [[부조리]]주의의 구별이 중요해 보인다. 둘 다 의미의 부재를 인식하지만, 그 인식에 대한 응답이 다르다. 허무주의가 의미 추구 자체를 포기한다면, [[부조리]]주의는 무의미 속에서도 삶을 긍정한다. 이 구별은 [[카뮈]]가 자신을 허무주의자로 규정받는 것을 거부한 이유를 설명한다. 셋째, 허무주의가 개인적 태도인지 역사적 조건인지가 불분명하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허무주의를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적 운명으로 진단했다. 베버와 브라운은 그것을 현대성의 구조적 특징으로 본다. 이 관점에서 허무주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조건이다. 개인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회 전체의 변화가 필요한지는 미해결 질문이다. 넷째, 현대 기술과 허무주의의 관계가 주목된다. 기술이 [[불안]]을 회피하게 함으로써 [[본래성]]으로의 통로를 차단한다는 진단이 있다. 그러나 기술이 새로운 형태의 의미 구성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디지털 공동체, 온라인 연대, 가상 현실에서의 경험—이것들이 허무주의적 공허를 채울 수 있는지는 추가 관찰이 필요하다. 다섯째, 허무주의적 경험이 보편적인지 문화 특수적인지가 불분명하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진단은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 동양 사상—불교의 "공"(空), 도가의 "무위"(無爲)—은 허무주의와 어떻게 관계하는가? 이것들도 허무주의의 변형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허무주의는 진정으로 극복 가능한가, 아니면 현대인의 영구적 조건인가? 허무주의적 경험이 병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정상적인 것인가? 의미를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창조된 의미는 발견된 의미만큼 유효한가? 그리고 허무주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 실제로 허무주의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가? ## 같이 읽기 ### 핵심 사상가 - [[니체]] - 허무주의 진단과 극복의 시도 - [[하이데거]] - 존재 망각으로서의 허무주의 - [[쇼펜하우어]] - 염세주의와 의지의 부정 - 막스 베버 - 탈주술화와 근대의 허무주의 ### 철학적 배경 - [[존재와 시간]] -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 - [[불안]] - 허무주의적 경험의 근본 기분 - [[본래성]] - 허무주의 극복의 가능성 - [[세인]] - 비본래적 존재의 양태 ### 관련 개념 - [[부조리]] - 허무주의와의 구별 - [[카뮈]] - 부조리에 대한 반항 - [[반항하는 인간]] - 반항의 철학적 분석 - [[사르트르]] - 실존주의적 응답 - [[실존주의]] - 허무주의에 대한 철학적 대응 ### 러시아 허무주의 - 투르게네프 - 《아버지와 아들》 - 도스토예프스키 - 《악령》과 허무주의 비판 ### 현대적 전개 - 탈주술화 - 베버의 근대 분석 - [[성과주의]] - 현대 사회의 의미 구조 - 의미 위기 -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 - 디지털 사회 - 기술과 허무주의의 관계 ### 관련 문서 - [[회사]] - 의미 추구가 제도화된 공간 - [[학교]] - 목표와 성취의 학습 - [[계급]] - 사회적 의미 부여 체계 **마지막 업데이트**: 2025-12-02 22: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