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회귀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사상의 기원과 발전]] > - [[#실스마리아의 계시]] > - [[#고대 우주론과의 연결]] > - [[#차라투스트라에서의 형상화]] > 3. [[#해석의 갈래]] > - [[#우주론적 해석]] > - [[#윤리적·심리적 해석]] > - [[#형이상학적 해석 - 하이데거]] > - [[#차이의 철학 - 들뢰즈]] > 4. [[#관련 개념들]] > - [[#운명애(아모르 파티)]] > - [[#힘에의 의지와의 통일]] > - [[#초인]] > 5. [[#가장 무거운 짐]] > - [[#사고 실험으로서의 영원회귀]] > - [[#삶의 긍정과 부정]] > 6. [[#비판과 논쟁]] > - [[#과학적 타당성 문제]] > - [[#허무주의 극복인가 완성인가]] > 7. [[#관찰자의 기록]] > 8. [[#같이 읽기]] ## 개요 **영원회귀**(永遠回歸, 독일어: ewige Wiederkehr, 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는 [[니체]] 철학에서 가장 심오하고 논쟁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모든 존재와 사건이 과거에 무한히 반복되었으며 미래에도 무한히 반복될 것이라는 사상이다. [[니체]]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철학적 발견"이자 "사상들 중의 사상"(Gedanke der Gedanken)으로 여겼다. 이 개념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우주론적 해석에 따르면 물리적 우주에서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반복된다. 윤리적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시험하는 "사고 실험"이다. 형이상학적 해석에 따르면 존재의 근본 구조를 규정하는 원리이다. 어떤 해석이 [[니체]]의 의도에 부합하는지는 여전히 학계의 논쟁거리이다. 영원회귀는 [[허무주의]] 극복의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신이 죽은 후 초월적 의미를 상실한 세계에서, 영원회귀는 삶의 매 순간에 "가장 큰 무게"를 부여한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당신은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자가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자이다. ## 사상의 기원과 발전 ### 실스마리아의 계시 1881년 8월, [[니체]]는 스위스 실스마리아 호숫가를 산책하던 중 영원회귀 사상이 "계시"처럼 떠올랐다고 기록했다. "인간과 시간을 6,000피트 너머로 끌어올려라"라는 메모가 남아 있다. 이 순간을 [[니체]]는 자신의 철학적 생애에서 결정적 전환점으로 여겼다. 그는 쥐렌토체(Surléj) 근처의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 앞에 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경험은 《즐거운 학문》(1882) 제341절에 처음으로 문헌화되었다. "어떤 날이든 밤이든 악마가 네 가장 외로운 고독 속으로 슬며시 다가와서 이렇게 말한다면—'네가 지금 살고 있고, 또 살았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은 영원회귀를 사고 실험으로 제시한다. [[니체]]는 유고에서 영원회귀를 우주론적으로 논증하려는 시도를 남겼다. 시간은 무한하고 물질(힘)은 유한하므로, 모든 가능한 조합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출간된 저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니체]]가 이것을 진지한 우주론으로 믿었는지, 아니면 수사적 장치로 사용했는지는 해석의 문제로 남는다. ### 고대 우주론과의 연결 영원회귀 사상은 [[니체]]의 독창적 발명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스토아학파에서 유사한 개념이 발견된다. 스토아학파는 우주가 주기적으로 대화재(ekpyrosis)에 의해 파괴되고 재생된다고 보았다. 각 주기에서 동일한 사건이 동일한 순서로 반복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영원한 불"(aion)도 이와 연관된다. 동양 사상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관찰된다. 힌두교의 칼파(kalpa) 주기, 불교의 윤회(samsara) 개념이 영원회귀와 비교된다. 그러나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 동양적 순환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동양의 순환은 초월이나 해탈을 지향하지만,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 삶 자체의 무한한 긍정을 요구한다. 피타고라스학파도 영원회귀를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내가 지금 이 막대기를 들고 너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니체]]가 고전문헌학자로서 이 전통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단순히 계승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변형시킨 것인지는 논쟁적이다. ### 차라투스트라에서의 형상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85)는 영원회귀 사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제3부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영원회귀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정령"(난쟁이)과 함께 두 갈래 길이 만나는 문 앞에 선다. 그 문의 이름은 "순간"(Augenblick)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묻는다: 이 두 길—하나는 영원히 과거로, 다른 하나는 영원히 미래로—이 서로 모순되는가? 난쟁이는 답한다: "시간 자체가 원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 대답에 만족하지 않는다. 단순히 시간이 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영원회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회귀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고통을 겪는다. "가장 위대한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장 작은 인간(der kleine Mensch)도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실—이것이 차라투스트라를 괴롭힌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는 이것을 긍정한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 번!" ## 해석의 갈래 ### 우주론적 해석 우주론적 해석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물리적 우주에 대한 이론이다. [[니체]]의 유고에는 이 해석을 뒷받침하는 논증이 있다: 힘의 총량은 유한하고, 시간은 무한하다. 따라서 가능한 모든 상태의 조합은 유한하며, 무한한 시간 속에서 모든 상태는 무한히 반복된다. 흥미롭게도, 이 논증은 앙리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Poincaré recurrence theorem, 1890)와 유사하다. 푸앵카레 정리에 따르면, 유한한 상태 공간을 가진 역학계는 충분히 긴 시간 후에 초기 상태에 가까운 상태로 돌아온다. 역사학자 스티븐 브러시는 [[니체]]와 푸앵카레가 거의 동시에 유사한 아이디어에 도달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에서 이 이론의 타당성은 의심스럽다. 우주가 영원히 팽창한다면, 초기 상태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또한 엔트로피 증가 법칙(열역학 제2법칙)은 일방향적 시간을 함축한다. 푸앵카레 회귀 시간은 우주의 나이보다 훨씬 길며—10^10^10^120년 이상—실질적으로 무한하다. 우주론적 해석이 문자 그대로 참인지는 불분명하다. ### 윤리적·심리적 해석 많은 해석자들은 [[니체]]가 영원회귀를 우주론적 사실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 사고 실험으로 제시했다고 본다. 《즐거운 학문》 341절의 "악마의 질문"이 이 해석의 근거이다: "만약 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너는 그것을 원할 수 있는가?" 이 해석에서 영원회귀는 삶에 대한 태도를 시험하는 기준이다. 현재의 삶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삶을 충분히 긍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영원회귀를 긍정할 수 있는 자—지금 이 순간을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 자—만이 삶을 진정으로 긍정하는 자이다. 데니슨 대학의 미카 두가스는 영원회귀를 "행동의 심리적 시험"으로 분석했다. 매 순간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이 행동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은가? 이 질문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그러나 칸트의 명령이 보편적 법칙을 기준으로 삼는 반면, 영원회귀는 개인의 삶 긍정을 기준으로 삼는다. ### 형이상학적 해석 -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1936-46년 강의에서 영원회귀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제시했다. 그에게 영원회귀는 존재자의 존재 양태를 규정하는 원리이다. 힘에의 의지가 존재자의 본질(essentia)이라면, 영원회귀는 존재자의 존재(existentia)이다. 두 개념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 통일이 [[니체]] 형이상학의 핵심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모든 것을 힘에의 의지의 지배 아래 둔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환원된다. 이것은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의 완성이다. [[니체]]가 형이상학을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 형이상학의 가장 극단적 형태에 도달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하이데거]]는 영원회귀가 [[허무주의]]의 정점이라고 주장한다. 존재를 가치로 환원함으로써, 존재 물음 자체가 차단된다. "영원회귀는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의 최고 승리이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하이데거]]가 출간된 저작보다 유고를 특권화하여 [[니체]]를 오독했다고 비판한다. ### 차이의 철학 - 들뢰즈 질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1962)과 《차이와 반복》(1968)에서 [[하이데거]]와 다른 방향으로 영원회귀를 해석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다. 돌아오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생산하는 힘이다. 들뢰즈는 [[니체]]를 "차이의 철학자"로 읽는다. 영원회귀는 동일성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는 원리이다. "존재가 영원회귀 속에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회귀의 원리가 다양성과 다수성이 공유하는 유일한 것이다." 영원회귀는 되기(becoming)와 존재의 종합이다. 들뢰즈에게 영원회귀는 "선별적 원리"이기도 하다. 반동적 힘은 영원회귀를 감당하지 못하고 탈락한다. 오직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힘만이 돌아온다. 이것은 [[니체]]의 윤리적 의도와 연결된다: 삶을 긍정하는 것만이 영원히 반복될 가치가 있다. ## 관련 개념들 ### 운명애(아모르 파티) **[[운명애]]**(amor fati, 運命愛)는 영원회귀와 긴밀하게 연결된 개념이다. 라틴어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운명애: 필연적인 것 앞에서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것이 나의 정식이다"라고 썼다. 영원회귀의 "결론"이 [[운명애]]라고 볼 수 있다. 영원회귀를 긍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고통, 상실, 모든 것을 포함하여—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운명애]]가 [[허무주의]]적 체념과 정반대라는 것이다. "운명이니까 받아들여"라는 굴복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그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적극적 태도이다. "이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 번!"—이 외침이 [[운명애]]의 본질이다. ### 힘에의 의지와의 통일 [[하이데거]]는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가 [[니체]] 철학에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두 교의의 화해가 [[니체]] 철학의 핵심이다." [[힘에의 의지]]는 존재자가 "무엇인가"(본질)를 규정하고, 영원회귀는 존재자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양태)를 규정한다. 서강인문논총의 연구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는 공간적·물리적 원리이고, 영원회귀는 시간적·형이상학적 관점이다. 두 개념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다. [[힘에의 의지]]는 영원회귀를 통해 실현되고, 영원회귀는 [[힘에의 의지]]의 시간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통일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일부 학자는 두 개념이 서로 다른 시기에 발전했으며, 완전히 일관되게 통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니체]]가 체계적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불완전성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 초인 **[[초인]]**(Übermensch)은 영원회귀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초인]],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는 함께 등장하며 서로를 규정한다. [[초인]]은 신의 죽음 이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며, 영원회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자이다. 영원회귀는 [[초인]]의 "시험"으로 기능한다. 영원회귀를 두려워하는 자—"가장 작은 인간"(der kleine Mensch)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자—는 아직 [[초인]]이 아니다. [[초인]]은 모든 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지어 고통과 불의까지도 긍정할 수 있다. 이 관계에서 [[허무주의]]와 그 극복의 논리가 드러난다. 신의 죽음은 [[허무주의]]를 가져온다.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 창조—[[초인]]의 과업—이다. 영원회귀는 이 과업의 시험대이다. 자신의 삶을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할 수 있는 자만이 [[허무주의]]를 극복한 것이다. ## 가장 무거운 짐 ### 사고 실험으로서의 영원회귀 《즐거운 학문》 341절은 영원회귀를 "가장 무거운 짐"(das grösste Schwergewicht)이라고 부른다. 악마가 묻는다: 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너는 그것을 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삶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니체]]는 두 가지 반응을 제시한다. 하나는 절망이다: "너는 땅바닥에 몸을 내던지고 이빨을 갈며 그렇게 말한 악마를 저주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긍정이다: "너는 신성한 순간을 경험하고,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성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의 분석에 따르면, 영원회귀의 핵심은 "부담"(burden)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그 질문이 부과하는 무게가 중요하다. 매 순간을 영원히 반복할 것처럼 살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한다. ### 삶의 긍정과 부정 영원회귀를 긍정하지 못하는 것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현재의 삶은 충분히 좋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영원히 반복해도 좋을 만큼 삶을 살아야 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긍정 형식"이라고 불렀다. 모든 고통, 모든 실패, 모든 상실까지도 긍정하는 것—이것이 삶에 대한 최고의 "예"(Ja)이다. [[카뮈]]의 [[부조리]] 개념과 비교할 때, 영원회귀는 더 적극적인 긍정을 요구한다. [[카뮈]]의 시지프가 무의미 속에서 반항하는 것이라면, [[니체]]의 초인은 무의미 자체를 긍정한다. 그러나 이 긍정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불분명하다. 모든 고통을 영원히 반복한다는 것을 어떻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일부 학자는 이것이 [[니체]]의 요구가 아니라 이상(理想)이라고 해석한다. 완전한 긍정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비판과 논쟁 ### 과학적 타당성 문제 우주론적 해석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비판은 과학적 타당성 문제이다. 현대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영원히 팽창하고 있으며, 초기 상태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증가 법칙—도 일방향적 시간을 함축한다. 푸앵카레 회귀 정리가 적용되려면 닫힌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주는 닫힌 시스템이 아닐 수 있다. 또한 회귀 시간은 우주의 나이(약 138억 년)보다 압도적으로 길다—10^10^10^120년 이상. 실질적으로 이것은 무한한 시간이며, "영원회귀"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러나 이 비판은 [[니체]]가 영원회귀를 우주론적 사실로 주장했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윤리적 해석에 따르면, 과학적 타당성은 핵심이 아니다. 영원회귀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살겠는가—이 가설적 질문이 중요하다. [[하이데거]]도 "그러한 것이 사실일 수 있는지 여부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 허무주의 극복인가 완성인가 영원회귀가 [[허무주의]]를 극복하는지, 아니면 극단으로 밀어붙이는지는 논쟁적이다. [[니체]]의 의도는 분명히 [[허무주의]] 극복이다. 신의 죽음 이후 초월적 의미가 사라진 세계에서, 영원회귀는 이 세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영원히 반복될 가치가 있는 삶—이것이 새로운 가치의 기준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니체]]가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영원회귀는 존재를 가치로 환원함으로써 [[허무주의]]의 정점에 도달한다.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의 최고 승리"로서, 영원회귀는 존재 물음 자체를 차단한다. 진정한 극복은 존재 물음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하이데거]] 자신의 기획—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들뢰즈는 다른 방향으로 읽는다. 영원회귀는 동일성의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차이의 철학을 연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통과함으로써 긍정의 철학에 도달했다. 이 해석에서 [[니체]]는 형이상학의 완성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개척자이다. ## 관찰자의 기록 영원회귀를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점이 발견된다. 첫째, 이 개념의 해석적 다양성이 주목된다. 우주론적, 윤리적, 형이상학적 해석이 공존하며, 어떤 해석이 [[니체]]의 의도에 부합하는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니체]]가 체계적 철학자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출간된 저작과 유고 사이의 차이가 이 해석적 다양성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영원회귀가 "사고 실험"으로 기능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살겠는가?"라는 질문은 삶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게 한다. 이 점에서 영원회귀는 순수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함의를 갖는 개념이다. 셋째, 영원회귀와 [[허무주의]]의 관계가 역설적이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허무주의]] 극복의 핵심으로 제시했지만, [[하이데거]]는 그것이 [[허무주의]]의 완성이라고 비판한다. 이 해석적 갈등은 [[니체]] 철학 전체의 성격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니체]]는 형이상학을 극복했는가, 아니면 그 최종 단계에 도달했는가? 넷째, 운명애와의 연결이 실존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삶의 모든 순간을 영원히 반복해도 좋다고 긍정하는 것—이것은 요구라기보다 이상으로 보인다. 완전한 긍정이 가능한지는 불분명하지만, 긍정을 향한 노력 자체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문자 그대로 믿었는가, 아니면 수사적 장치로 사용했는가? 영원회귀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가, 아니면 그것의 가장 철저한 표현인가? 모든 고통까지도 긍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이 바람직한가? 그리고 영원회귀가 삶의 실천에 어떤 구체적 차이를 만드는가? ## 같이 읽기 ### 니체의 핵심 개념 - [[니체]] - 영원회귀를 발견한 철학자 - [[허무주의]] - 영원회귀가 극복하려는 문제 - [[힘에의 의지]] - 영원회귀와 불가분의 개념 - [[초인]] - 영원회귀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 ### 관련 저작 - 《즐거운 학문》 - 영원회귀가 처음 언급된 저작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영원회귀의 문학적 형상화 ### 해석자들 - [[하이데거]] - 형이상학적 해석, 영원회귀를 니체 철학의 핵심으로 분석 - 들뢰즈 - 차이의 철학으로 재해석 - 칼 뢰비트 - 《니체의 영원회귀 철학》 저자 ### 관련 개념 - [[운명애]] - 영원회귀의 윤리적 결론 - [[부조리]] - 유사한 실존적 문제의식 - [[카뮈]] - 시지프와 영원회귀의 비교 ### 역사적 맥락 - 스토아학파 - 고대의 우주적 순환론 - 푸앵카레 회귀 정리 - 물리학적 유사 개념 **마지막 업데이트**: 2025-12-02 22: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