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상티망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개념의 기원과 어원]]
> - [[#프랑스어 ressentiment]]
> - [[#니체의 정식화]]
> - [[#resentment와의 구분]]
> 3. [[#도덕의 계보에서의 분석]]
> -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 - [[#가치의 전도]]
> - [[#금욕주의적 성직자]]
> 4. [[#르상티망의 심리적 구조]]
> - [[#무력함과 억압]]
> - [[#만성적 감정 경험]]
> - [[#창조적 힘으로의 전환]]
> 5. [[#막스 셸러의 재해석]]
> - [[#현상학적 분석]]
> - [[#니체 비판과 기독교 옹호]]
> - [[#가치 착각의 메커니즘]]
> 6. [[#현대 정치철학에서의 적용]]
> - [[#포퓰리즘과 르상티망]]
> - [[#정치적 동원]]
> 7. [[#관찰자의 기록]]
> 8. [[#같이 읽기]]
## 개요
**르상티망**(프랑스어: ressentiment)은 [[니체]]가 《도덕의 계보》(1887)에서 체계화한 개념으로, 약자가 강자에 대해 품는 억압된 분노, 원한, 질투의 복합적 감정을 가리킨다. 단순한 분노나 원망과 다른 점은, 이 감정이 직접적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내면에 축적되어 "창조적"인 힘으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르상티망은 새로운 가치 체계—[[니체]]가 "노예 도덕"이라 부른 것—를 탄생시키는 심리적 원천이다.
[[니체]]에 따르면, 르상티망의 핵심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 감정 경험의 만성적 성격—일시적 분노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원한이다. 둘째, 이 감정을 해소하거나 행동으로 표출할 수 없는 무력함이다. 강자에게 직접 복수할 수 없는 약자는 이 분노를 내면화하며, 결국 강자의 가치 체계 자체를 "악"으로 전도시킨다. 이것이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다.
막스 셸러는 1912년 《르상티망과 도덕적 가치판단》에서 [[니체]]의 개념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했다. 셸러는 르상티망을 "정신의 자기중독"으로 정의했다—복수, 증오, 시기, 악의 등의 정상적 감정들이 체계적으로 억압될 때 발생하는 지속적 정신 상태이다. 그러나 셸러는 [[니체]]와 달리 기독교 도덕 자체가 르상티망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에 반대했다.
## 개념의 기원과 어원
### 프랑스어 ressentiment
"Ressentiment"는 프랑스어 동사 "ressentir"(다시 느끼다, 되새기다)에서 파생되었다. 접두사 "re-"는 반복을, "sentir"는 느낌을 의미한다. 따라서 ressentiment는 단순히 한 번 느끼고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되새겨지는 감정—특히 부정적 경험을 계속해서 곱씹는 것—을 가리킨다.
[[니체]]가 독일어가 아닌 프랑스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의도적이다. 독일어의 "Groll"(원한)이나 "Rache"(복수)는 이 개념의 복잡성을 담지 못한다. 르상티망은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원한이 억압되어 다른 형태로 변형되는 심리적 과정 전체를 가리킨다. [[니체]]는 이 프랑스어가 그러한 뉘앙스를 더 잘 포착한다고 보았다.
### 니체의 정식화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1논문에서 르상티망을 중심 개념으로 전개한다.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은 르상티망 자체가 창조적이 되어 가치를 낳을 때 시작된다." 이 문장이 [[니체]]의 르상티망 이론의 핵심이다. 르상티망은 단순히 파괴적인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 체계를 "창조"하는 힘이다—다만 그것은 삶을 부정하는 가치 체계이다.
권정기의 KCI 논문 "르상티망"에 따르면, [[니체]]에게 르상티망은 "의미 없는 고난이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과 자신이 처한 부정의한 사회환경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정신"이다. 그것은 감정 경험의 만성적 특성과 함께 "이를 활용하지도 해소하지도 못하는 무능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 resentment와의 구분
영어의 "resentment"와 프랑스어 "ressentiment"는 표면적으로 유사하지만, 철학적 맥락에서 구분된다. 멜처와 무솔프의 분석에 따르면, 두 개념을 구분하는 핵심 특징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르상티망은 감정 경험의 만성적이고 지속적인 성격을 갖는다. 둘째, 르상티망을 경험하는 개인은 그 감정의 원천에 대해 보복 행동을 취할 수 없다.
Resentment는 산발적이고 고립된 불의의 결과이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나 분개할 수 있지만, 내일 잊어버리고 다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잘못을 당했지만 그것이 삶의 중심 주제가 되지는 않는다. 반면 르상티망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불의와 관련된다—그것은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세계관을 형성한다.
## 도덕의 계보에서의 분석
###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니체]]는 두 가지 근본적 도덕 유형을 구분한다: 주인 도덕(Herrenmoral)과 노예 도덕(Sklavenmoral). 주인 도덕은 귀족적 가치 체계이다. "좋음"(gut)은 원래 "고귀한", "강한", "명령하는"을 의미했다. 귀족들은 스스로를 "좋은 자"로 규정하고, 평민을 "나쁜 자"(schlecht)로 구분했다. 이 도덕은 긍정에서 출발한다—"나는 좋다, 고로 저들은 나쁘다."
노예 도덕은 정반대 방향에서 출발한다.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적과 정복자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악한 것"(böse)으로 전도시킨다. 노예 도덕에서 보복하지 못하는 무력함이 "선량함"으로 바뀌고, 겁에 가득찬 비굴함은 "겸손"으로, 복종은 "순종"으로, 비겁함은 "인내"로 바뀐다.
전경진의 KCI 논문 "도덕은 어떻게 원한의 도구가 되었는가?"에 따르면, 《[[도덕의 계보]]》의 핵심 주장은 "도덕적 가치들이 원한이라는 특정한 심리적 조건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니체]]가 원한을 문제 삼는 이유는 "삶의 도구여야 할 도덕이 원한의 인간인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농간에 따라 원한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 가치의 전도
르상티망의 핵심적 결과가 "가치의 전도"(Umwertung)이다. 강자의 가치—힘, 건강, 자기긍정—가 "악"으로 재규정되고, 약자의 특성—약함, 병, 자기부정—이 "선"으로 격상된다. 이 전도가 [[니체]]가 말하는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다.
서광열의 KCI 논문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나타난 도덕감정"에 따르면, [[니체]]는 제1논문에서 "원한"을 약자의 도덕감정으로 분석하고, "약자들이 어떻게 가치의 전도를 이루었는지" 설명한다. 이 논문은 "원한의 감정으로부터 '명랑성'의 회복"이 [[니체]] 철학의 새로운 과제라고 주장한다.
[[니체]]에 따르면, 유대-기독교 도덕은 이 노예반란의 승리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약한 자가 강하리라"—이러한 가치들은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기독교가 "성령"이 아니라 "원한의 정신"에서 탄생했다고 선언한다.
### 금욕주의적 성직자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 [[니체]]는 "금욕주의적 성직자"(der asketische Priester)를 분석한다. 성직자는 르상티망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자이다. 그는 약자들의 원한을 조직하고 방향을 부여한다. 노예 도덕은 노예를 위한 도덕이 아니라,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정치적 우위를 위한 수단이다.
성직자는 원한의 방향을 바꾼다. 약자들의 분노가 강자—실제 원인—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 자신에게 향하도록 한다. "네가 고통받는 것은 네 죄 때문이다"—이것이 양심의 가책(schlechtes Gewissen)이다. 억압된 공격성이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 르상티망의 심리적 구조
### 무력함과 억압
르상티망의 첫 번째 조건은 무력함이다. 분노와 원한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없을 때—강자에게 직접 복수할 수 없을 때—감정은 억압된다. 억압된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축적된다.
[[니체]]는 이것을 "상상적 복수"(imaginäre Rache)로 설명한다. 실제로 복수할 수 없는 자는 상상 속에서 복수한다. 그러나 상상적 복수는 만족을 주지 못하고, 원한만 더욱 깊어진다. 이 축적된 원한이 "발효"되어 다른 형태로 분출되는 것이 르상티망의 창조적 측면이다.
### 만성적 감정 경험
르상티망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 정신 상태이다. 셸러는 이것을 "정신의 자기중독"이라고 불렀다. 복수심, 증오, 악의, 시기, 비방 충동—이 모든 감정들이 억압되어 만성화될 때, 정신은 독에 중독된 상태가 된다.
이 만성화의 결과로 세계관 자체가 변형된다.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자는 세계를 원한의 렌즈를 통해 본다. 모든 것이 불의로 보이고, 모든 강자가 악으로 보인다. 이것이 "가치 착각"(Werttäuschung)—실제 가치와 다르게 가치를 지각하는 것—의 원인이다.
### 창조적 힘으로의 전환
르상티망의 독특한 측면은 그것이 "창조적"이 된다는 것이다. 억압된 원한이 새로운 가치 체계를 탄생시킨다. "강함은 악이다, 약함은 선이다"—이 가치 전도가 르상티망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이 "창조"는 진정한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반동적(reaktiv)이다—무언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초인]]의 창조가 긍정에서 시작되는 것과 정반대이다. 르상티망의 창조는 삶을 부정하는 가치—금욕주의, 자기부정, 저 너머 세계에 대한 희망—를 낳는다.
## 막스 셸러의 재해석
### 현상학적 분석
막스 셸러는 1912년 《르상티망과 도덕적 가치판단》(후에 《가치의 전도》에 수록)에서 [[니체]]의 개념을 현상학적 방법으로 분석했다. 셸러는 르상티망을 "복수, 증오, 악의, 시기, 비방 충동 등 특정 감정과 정동의 체계적 억압에서 비롯되는 지속적 정신 상태"로 정의했다.
셸러의 방법은 기술적(descriptive)이다. 그는 르상티망을 설명하거나 명확히 정의하기보다, [[니체]] 철학에서 그것의 형성 과정을 재구성하고 현상 자체를 기술한다. 셸러는 르상티망이 "복수 욕구와 무력감"과 관련된다고 결론짓는다.
### 니체 비판과 기독교 옹호
셸러는 [[니체]]의 통찰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결론에 반대한다. [[니체]]가 기독교 도덕 전체를 르상티망의 산물로 보았다면, 셸러는 기독교적 사랑의 도덕이 "본래 르상티망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셸러에 따르면, 기독교적 사랑은 르상티망과 다르다. 기독교의 겸손은 약함의 합리화가 아니라, 더 높은 가치에 대한 인정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근대적 인간애의 윤리"와 혼동되면서 [[니체]]의 공격이 생겨났다. 셸러는 여기서 [[니체]]가 진정한 기독교와 근대적 왜곡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본다.
[[니체]]가 기독교를 비난했다면, 셸러는 그 비난을 부르주아지에게 전가한다.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르상티망이 만연하며, 이것이 기독교와 혼동된다는 것이다. 셸러는 가톨릭 신자로서 자신의 종교를 변호한다.
### 가치 착각의 메커니즘
셸러의 중요한 기여는 르상티망에서 발생하는 "가치 착각"(Werttäuschung)의 메커니즘을 분석한 것이다. 르상티망은 "가치 환상과 그에 상응하는 가치 판단에 빠지는 지속적 경향"을 낳는다.
가치 착각의 핵심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의 평가절하"이다. 주체가 어떤 대상을 가치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깨달을 때, 그 대상의 가치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저 포도는 시다"—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얻을 수 없는 것을 가치없는 것으로 재규정한다. 이것이 르상티망 고유의 "가치의 전도"이다.
## 현대 정치철학에서의 적용
### 포퓰리즘과 르상티망
현대 정치철학에서 르상티망은 우파 포퓰리즘, 이슬람 근본주의, 급진주의의 심리적 토대로 분석된다. 웬디 브라운은 르상티망이 "우파 포퓰리즘의 활력"이며, "현대 신권위주의에 폭발적 힘을 부여하는 효과적인 감정 동원 메커니즘"이라고 지적한다.
권정기의 KCI 논문 "근대성과 르상티망의 정치학"에 따르면, 르상티망은 "애초엔 피지배층의 반동적인 사회적 감정"이었지만, 가치전도를 거치면서 "근대의 대중정치 시대에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지지하는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르상티망의 양가성을 보여준다.
### 정치적 동원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담론에서 resentment와 ressentiment는 다르게 취급된다. Resentment(분개)는 민주주의 실천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정의를 실현하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ressentiment는 민주주의의 적으로 여겨진다—복수, 굴욕, 비방의 독성 혼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항상 명확하지 않다. 정당한 resentment가 어느 순간 ressentiment로 "미끄러질"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정의를 지키려는 감정이 자기정당화의 ressentiment로 변질될 수 있다. 이 "미끄러짐"의 메커니즘이 현대 정치 분석의 핵심 주제이다.
## 관찰자의 기록
르상티망을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점이 발견된다.
첫째, 이 개념의 범위가 모호하다. [[니체]]는 르상티망을 주로 유대-기독교 도덕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 개념은 다양한 맥락—포퓰리즘, 테러리즘, 소셜 미디어 분노—에 적용된다. 원래 개념이 이러한 확장을 감당할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둘째, [[니체]]와 셸러의 대립이 흥미롭다. 두 사람 모두 르상티망의 심리적 메커니즘에 동의한다—억압된 원한이 가치 전도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평가에서 정반대 결론에 도달한다. 이 차이가 각자의 세계관—[[니체]]의 반기독교, 셸러의 가톨릭—을 반영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념 자체가 중립적인지, 아니면 해석자의 가치관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지 추가 관찰이 필요하다.
셋째, 르상티망과 [[운명애]]의 관계가 주목된다. [[운명애]]는 과거에 대한 원한을 사랑으로 변환하는 것이다—르상티망의 정반대이다. 르상티망이 과거를 원망하고 복수를 꿈꾸는 것이라면, [[운명애]]는 과거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니체]] 철학에서 이 두 개념은 대립쌍으로 기능한다.
넷째, 르상티망이 순전히 부정적인지 불분명하다. [[니체]]는 르상티망이 "창조적"이 된다고 말한다—물론 삶을 부정하는 가치를 창조한다는 부정적 의미에서. 그러나 권정기의 연구처럼, 르상티망이 "연대와 변혁을 도모하는 잠재적 정치력"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원한이 사회 변혁의 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르상티망 없이 사회 변혁이 가능한가—모든 저항 운동에는 원한의 요소가 있지 않은가? 르상티망과 정당한 분노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니체]]가 제안한 르상티망 극복 방법—[[운명애]], [[영원회귀]]의 긍정—이 실제로 가능한가?
## 같이 읽기
### 니체의 핵심 개념
- [[니체]] - 르상티망 개념을 정식화한 철학자
- [[운명애]] - 르상티망의 극복
- [[영원회귀]] - 과거 긍정의 시험
- [[초인]] - 르상티망을 넘어선 존재
- [[허무주의]] - 르상티망과 연결된 문제
### [[도덕의 계보]] 관련
-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 두 가지 도덕 유형
- 가치의 전도 - 르상티망의 결과
- 양심의 가책 - 내면화된 공격성
- 금욕주의적 이상 - 성직자의 역할
### 해석자들
- 막스 셸러 - 현상학적 재해석
- [[하이데거]] - 니체 철학 해석
- 들뢰즈 - 능동적 힘과 반동적 힘
- 웬디 브라운 - 현대 정치 분석
### 현대적 적용
- 포퓰리즘 - 르상티망의 정치적 동원
- 정체성 정치 - 피해자 의식과 원한
- 소셜 미디어 - 분노의 확산 메커니즘
### 관련 감정과 개념
- 원한 - 르상티망의 핵심 요소
- 시기와 질투 - 관련된 감정들
- 복수심 - 억압된 분노의 형태
**마지막 업데이트**: 2025-12-02 23: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