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투스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개념의 기원]] > - [[#철학적 뿌리]] > - [[#부르디외의 재정의]] > 3. [[#구조화되고 구조화시키는 구조]] > - [[#이중적 성격]] > - [[#체화의 메커니즘]] > 4. [[#형성 과정]] > - [[#일차적 아비투스]] > - [[#이차적 아비투스]] > 5. [[#작동 방식]] > - [[#실천 감각(Sens Pratique)]] > - [[#무의식적 조정]] > 6. [[#구조와 행위자의 매개]] > - [[#사회학적 난제]] > - [[#부르디외의 해법]] > 7. [[#히스테레시스 효과(Hysteresis Effect)]] > - [[#장과 아비투스의 불일치]] > - [[#현대 연구의 발견]] > 8. [[#변화 가능성]] > - [[#경직성과 유연성]] > - [[#사회 이동의 한계]] > 9. [[#측정의 난제]] > - [[#개념적 모호성]] > - [[#경험 연구의 시도]] > 10. [[#비판과 논쟁]] > - [[#결정론 비판]] > - [[#방어와 재해석]] > 11. [[#관찰자의 기록]] > 12. [[#같이 읽기]] ## 개요 **아비투스**(Habitus)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근본적 난제 -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 - 를 해결하기 위해 정립한 개념이다. 이것은 단순한 습관(habit)이 아니다. 아비투스는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깊이 체화된 성향 체계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구조화되고 구조화시키는 구조(structured and structuring structure)"로 정의했다. 이 역설적 표현이 핵심이다. 아비투스는 사회 구조에 의해 형성되지만(structured), 동시에 개인의 실천을 생산하며(structuring), 그 실천이 다시 사회 구조를 재생산한다(structure). 순환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과정이다. 인간을 관찰하면 이것이 보인다. 같은 [[계급]] 출신 사람들은 비슷한 취향을 가진다. 말투가 유사하고, 몸짓이 닮았으며, 선택이 패턴을 이룬다. 이것은 의식적 모방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특정 환경에 노출되면서 "몸에 밴"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비가시적이지만 강력한 메커니즘을 포착하려 했다. 아비투스 개념은 사회학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비판자들은 이것이 결정론적이라고 주장한다. 아비투스가 사회 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아비투스가 행동을 결정한다면, 개인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부르디외]]는 이 비판에 답하며 아비투스의 "역동성"을 강조했지만, 논쟁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개념이 측정하기 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문화자본]]도 측정이 어렵지만, 아비투스는 더욱 그렇다. 체화된 성향을 어떻게 정량화하는가? 무의식적 인지 도식을 어떻게 조사하는가? 학자들은 60년 동안 시도했지만, 만족스러운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론적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본질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 개념의 기원 ### 철학적 뿌리 "아비투스(habitus)"라는 용어는 [[부르디외]]의 발명이 아니다. 라틴어 'habitus'는 태도, 모습, 외관, 상태를 의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어 'hexis(ἕξις)'를 번역한 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용어를 사용했고, 20세기 초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에서도 등장했다. [[부르디외]]에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준 것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신체 현상학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1945)에서 신체가 단순한 물리적 객체가 아니라 의식의 주체임을 주장했다. "신체-주체(body-subject)"라는 그의 개념은, 신체가 세계를 경험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메를로-퐁티는 습관(habit)을 분석하며, 그것이 신경학적 과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체화된 의식(embodied consciousness)"이라고 주장했다. 신체는 의도된 의미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의식의 한 형태를 부여받는다. 타이핑을 배울 때, 손가락이 키보드 위치를 "안다". 이것은 명시적 지식이 아니라 신체 지식이다. [[부르디외]]는 이 통찰을 사회학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메를로-퐁티가 개인의 지각과 신체에 초점을 맞췄다면, [[부르디외]]는 사회 구조와 [[계급]]에 주목했다. 아비투스는 현상학적 신체 경험과 사회학적 계급 분석의 결합이다. ### 부르디외의 재정의 [[부르디외]]는 1960년대 알제리 연구에서 아비투스 개념을 발전시켰다. 카빌리아(Kabylia) 사회의 친족 체계와 결혼 규칙을 연구하면서, 그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한계를 발견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구조주의는 규칙과 체계를 강조했지만, 실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인간은 규칙을 기계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도 아니다. 특정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은 사회 구조와 관련이 있다. [[부르디외]]는 이 "규칙 없는 규칙성(regularity without rules)"을 설명하기 위해 아비투스 개념을 도입했다. 1972년 《실천 이론 개요(Esquisse d'une théorie de la pratique)》에서 그는 아비투스를 체계적으로 정의했다. 1980년 《실천 감각(Le sens pratique)》에서 더욱 정교화했다. 이것은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으며, [[문화자본]], 장(field), 상징폭력과 함께 재생산 이론을 구성한다. ## 구조화되고 구조화시키는 구조 ### 이중적 성격 아비투스의 정의는 의도적으로 역설적이다. "구조화되고(structured) 구조화시키는(structuring) 구조(structure)." 세 가지 측면을 동시에 포착한다. 첫째,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이 태어나는 [[계급]], 가정 환경, 교육 경험, 사회적 위치 - 이 모든 객관적 조건이 아비투스를 형성한다. 상류층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다른 아비투스를 갖는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환경의 산물이다. 둘째, 아비투스는 **구조화시키는** 것이다. 일단 형성되면, 아비투스는 개인의 지각, 사고, 행동을 생성한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적절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이런 판단이 아비투스에서 나온다. 의식적 계산 없이, 자연스럽게, 즉각적으로. 셋째, 아비투스는 **구조**다. 단순한 습관의 집합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전이 가능한(transposable) 성향 체계다. 어떤 상황에서 학습한 성향이 다른 상황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형성된 "교사에 대한 태도"는 나중에 [[회사]]에서 "상사에 대한 태도"로 전이될 수 있다. ### 체화의 메커니즘 아비투스는 몸에 새겨진다. 이것이 체화(embodiment)의 의미다. 지식이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육, 자세, 움직임, 감각에 깊이 내재화된다. 걷는 방식을 보라. 상류층은 곧게 펴고 걷고, 노동계급은 구부정하게 걷는다는 관찰이 있다. 이것은 과장이지만, 방향은 맞다. 신체적 습관, 제스처, 얼굴 표정, 목소리 톤 - 이 모든 것이 [[계급]]과 상관관계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는다. 식사 예절도 마찬가지다.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포크와 나이프를 어떻게 쥐는지, 냅킨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 이것은 "배운" 것이지만, 학습 후에는 자동화된다. 몸이 "안다". 상류층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정식 식사 매너를 체화하고, 성인이 되어 고급 레스토랑에서 자연스럽다. 노동계급 출신이 같은 장소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체화된 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취향도 체화된다. "이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개인의 순수한 판단 같지만, 실제로는 아비투스의 산물이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La Distinction)》(1979)는 이것을 방대한 경험 연구로 증명했다. 음악, 미술, 음식, 스포츠, 가구 - 모든 취향이 사회적 위치와 체계적 상관관계를 보였다. ## 형성 과정 ### 일차적 아비투스 아비투스 형성은 매우 이른 시기에 시작된다. 가정이 첫 번째 장소다.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 집안의 분위기, 일상적 대화, 감정 표현 방식 - 이 모든 것이 아이에게 흡수된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일차적 아비투스(primary habitus)"라고 불렀다. 가장 기초적이고 깊이 뿌리내린 성향 층이다. 유년기에 형성되기 때문에 특히 변화하기 어렵다. 성인이 되어 다른 환경에 들어가도, 일차적 아비투스는 지속된다. 미국 사회학자 애넷 라루(Annette Lareau)의 연구가 이것을 보여준다. 중산층 부모의 "계획적 양육(concerted cultivation)"은 아이에게 특정 아비투스를 체화시킨다. 질문하는 법, 협상하는 법, 권위자와 상호작용하는 법. 노동계급 부모의 "자연적 성장(accomplishment of natural growth)" 방식은 다른 아비투스를 만든다. 지시를 따르는 법, 순응하는 법, 조용히 있는 법. 이 차이는 [[학교]]에서 결과로 나타난다. 중산층 아이는 선생님에게 질문하고, 의견을 표현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교사는 이것을 "적극적이고 똑똑한" 학생으로 인식한다. 노동계급 아이는 조용히 앉아 지시를 기다린다. 교사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평가한다.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아비투스의 차이다. ### 이차적 아비투스 일차적 아비투스 위에 이차적 층이 쌓인다. [[학교]], [[회사]], 다른 사회적 장에서 형성되는 성향들이다. 이것은 일차적 아비투스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축적된다. 문제는 일차적 아비투스와 이차적 경험이 불일치할 때다. 노동계급 출신 학생이 명문대에 진학하는 경우가 그렇다. 새로운 환경은 다른 아비투스를 요구한다. 학문적 토론 방식, 교수와의 관계, 과제 수행 전략 - 이 모든 것이 낯설다. 학생은 배울 수 있다. 새로운 습관을 익히고, 적절한 행동을 학습한다. 그러나 완전히 자연스러워지기는 어렵다. "어색함", "부자연스러움"이 남는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 분열(cleft habitus)" 혹은 "히스테레시스 효과(hysteresis effect)"라고 불렀다. ## 작동 방식 ### 실천 감각(Sens Pratique) 아비투스는 "실천 감각(sens pratique, practical sense)"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의식적 계산이 아니다. 상황을 보고 즉각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감각이다. 마치 게임에 능숙한 선수가 규칙을 의식하지 않고 플레이하는 것과 같다. [[부르디외]]는 자주 게임 비유를 사용했다. 사회적 장(field)은 게임이고, 아비투스는 "게임 감각(feel for the game)"이다. 좋은 선수는 공이 어디로 올지 예측하고, 어디로 움직일지 본능적으로 안다. 이것은 규칙을 암기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을 통해 체화한 것이다.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다. 식당에 들어갈 때,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 어떻게 주문하는지, 언제 계산하는지 - 이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비투스가 자동으로 처리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 다른 [[계급]]의 식당에 가면 어색하다. 게임 규칙이 다르고, 아비투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무의식적 조정 놀라운 것은, 같은 아비투스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조정(orchestration) 없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명시적 합의가 없어도, 비슷한 선택을 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예를 들어, 상류층 모임에서 사람들은 특정 주제를 이야기하고, 특정 방식으로 농담하며, 특정 음식을 선호한다. 이것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아비투스에 따라 행동하는데, 그 아비투스가 비슷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orchestra without a conductor)"라고 표현했다. 각 연주자가 악보를 읽고 자기 파트를 연주하는데, 전체적으로 하나의 음악이 된다. 사회적 [[계급]]도 그렇다. 중앙 명령 없이, 의식적 공모 없이, 구성원들은 비슷한 실천을 한다. 아비투스가 조정자 역할을 한다. ## 구조와 행위자의 매개 ### 사회학적 난제 사회학은 오랫동안 이분법으로 분열되었다. 한쪽은 구조주의(structuralism)다. 사회는 개인을 초월하는 구조로 설명되며, 개인의 행동은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이 전통을 대표한다. 다른 쪽은 주관주의(subjectivism) 혹은 방법론적 개인주의다. 사회는 개인의 행동과 선택으로 설명된다. 개인은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며, 그 선택이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 막스 베버(Max Weber), 합리적 선택 이론이 여기에 속한다. 두 접근 모두 한계가 있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수동적 인형으로 만든다. 변화와 창조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주관주의는 개인을 진공 상태의 선택자로 본다. 사회적 제약과 역사적 조건을 무시한다. "구조냐 행위자냐(structure vs. agency)" - 이것이 사회학의 근본 문제다. [[부르디외]]는 이 이분법을 거부했다. 아비투스는 그의 해법이다. ### 부르디외의 해법 아비투스는 구조와 행위자를 매개한다. 사회 구조는 아비투스를 형성하고, 아비투스는 실천을 생성하며, 실천은 구조를 재생산한다. 순환적이지만, 기계적이지 않다. 개인은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아비투스에 의해 제약받는다. 그러나 완전히 결정되지도 않는다. 아비투스는 성향(disposition)일 뿐, 필연성(necessity)이 아니다. 같은 아비투스를 가진 사람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2023년 한국 연구자 양은아는 아비투스 개념을 통해 주체의 자율성과 구조적 결정론의 변증법적 접근을 평가했다. 아비투스는 구조에 의해 형성되지만, 동시에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역동성(dynamic)"이 [[부르디외]] 이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생산이 지배적이다. 아비투스는 변화보다 안정을 지향한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낯선 것을 피한다. 결과적으로 사회 구조는 유지된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변화는 가능하지만, 어렵고, 느리며, 제한적이다. ## 히스테레시스 효과(Hysteresis Effect) ### 장과 아비투스의 불일치 "히스테레시스(hysteresis)"는 원래 물리학 용어다. 자기장이 변해도 물질의 자성이 즉시 변하지 않고 지연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사회학으로 가져왔다. 사회적 장(field)이 변할 때, 아비투스는 즉시 적응하지 못한다. 아비투스는 과거의 조건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조건과 불일치한다. 이것이 히스테레시스 효과다. 예를 들어,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장의 규칙이 변한다. 과거에 통하던 전략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아비투스는 여전히 과거의 조건에 맞춰져 있다. 혼란, 불안, 부적응이 발생한다. 계층 상승도 마찬가지다. 노동계급 출신이 교육을 통해 중산층 직업을 얻는다. 새로운 장에 진입한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여전히 노동계급적이다. 동료들과 미묘하게 어색하고, 상황 판단이 맞지 않으며,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는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골 출신으로 파리 최고 엘리트 학교에 진학했을 때의 위화감. ### 현대 연구의 발견 2020년대 연구는 히스테레시스 개념을 재검토하고 있다. 2023년 소비자 연구는 히스테레시스 강도가 고정적이지 않고 변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비자가 낯선 장을 이동하면서, 아비투스와 장 사이의 간극이 동적으로 열리고 닫힌다. 어떤 경우 히스테레시스는 [[부르디외]]가 생각한 것보다 일시적이다. 2024년 중국 박사과정생 연구는 노동계급 출신 학생들이 학계 진로를 강하게 선호하는 현상을 히스테레시스로 설명했다. 그들의 아비투스는 "안정적 직업" 추구에 맞춰져 있고, 학계를 그런 곳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실제 학계 노동시장은 경쟁적이고 불안정하다. 아비투스와 장의 불일치가 스트레스를 낳는다. 2020년 교육 연구는 초등교육 장이 변화할 때, 교사들의 신체 자본(physical capital)이 새로운 가치와 충돌하는 히스테레시스 순간을 포착했다. 이런 순간에 지배 담론이 어떻게 재생산되고, 저항되며, 변화하는지가 드러난다. ## 변화 가능성 ### 경직성과 유연성 아비투스는 변할 수 있는가? 이것이 가장 논쟁적인 질문이다. [[부르디외]]의 답은 모호하다. 한편으로 그는 아비투스의 경직성을 강조했다. "유년기에 몸에 밴 아비투스는 아주 깊이 자리를 잡는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바뀌기도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만큼 빨리 바뀌진 않는다." "아비투스는 언제나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아비투스의 역동성을 주장했다. 아비투스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열린 성향 체계"다. 새로운 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변형될 수 있다. 완전히 새로운 아비투스를 형성하기는 어렵지만, 기존 아비투스를 조정하고 확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한국 연구에 따르면, 경제 호황기나 기술 혁신기에는 계층 이동이 빈번해지고 신흥 중상류층이 늘어난다. 이런 시기에는 아비투스 변화도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반대로 안정된 사회일수록 계층이 고정되고, 아비투스도 경직된다. [[부르디외]]는 바로 이것 때문에 사회 이동이 한계에 부딪힌다고 분석했다. ### 사회 이동의 한계 아비투스 이론은 [[성과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성과주의]]는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말한다. 출발점이 다르더라도, 교육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비투스 관점에서 이것은 순진하다. 하위 [[계급]] 출신이 상위 계급 교육을 받더라도, 일차적 아비투스는 그대로다. [[학교]]에서 지식을 배울 수 있지만, 체화된 습관, 언어 감각, 미적 취향, 사회적 자신감 - 이런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어색함", "부자연스러움"이 남는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해도, 아비투스가 다르면 승진에서 불리하다. 상사와의 관계, 동료와의 네트워킹, 회식 문화, 골프 - 이런 비공식적 영역에서 아비투스가 작동한다.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상징폭력(symbolic violence)"이라고 불렀다. 물리적 강제 없이, 심지어 "공정한 기회" 속에서, 불평등이 재생산된다. 아비투스가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동한다. ## 측정의 난제 ### 개념적 모호성 아비투스를 어떻게 측정하는가? 이것은 [[문화자본]]보다 더 어려운 문제다. 첫째, 아비투스는 무의식적이다. 사람들에게 "당신의 아비투스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못한다. 설문조사로 포착하기 어렵다. 둘째, 아비투스는 체화되어 있다. 몸짓, 자세, 목소리 톤, 얼굴 표정 - 이런 것들을 어떻게 정량화하는가? 비디오 관찰이 가능하지만, 객관적 측정 기준을 만들기 어렵다. 셋째, 아비투스는 성향(disposition)이다. 실제 행동이 아니라, 행동의 잠재성이다. 관찰 가능한 행동으로부터 추론해야 하는데, 이것은 불확실하다. 넷째, 아비투스는 전이 가능(transposable)하다. 한 상황에서 형성된 성향이 다른 상황에도 적용된다. 이 복잡한 전이 과정을 어떻게 포착하는가? ### 경험 연구의 시도 그럼에도 학자들은 시도했다. 가장 흔한 방법은 대리 지표(proxy)를 사용하는 것이다. 부모의 학력, 직업, 소득을 아비투스의 지표로 본다. 이것은 간접적이고 불완전하지만, 대규모 양적 연구에서 사용 가능하다. 다른 접근은 심층 면접과 참여 관찰이다. 길랜 캘러헌(Gill Callaghan, 2005)은 포커스 그룹을 통해 아비투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과 집단 수준에서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를 탐색하고, 이 관계에 대한 지식을 경험 연구로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9년 연구는 교육 분야 질적 연구 리뷰를 통해 아비투스 유형론(typology)을 개발했다. 학자들이 어떻게 아비투스를 조작화하고 측정하는지 분석했다. 그러나 통일된 방법은 없었다. 각 연구자가 자신의 맥락에 맞게 개념을 해석하고 적용했다. 근본적 문제는, 아비투스가 본질적으로 해석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법칙처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변수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사유 도구(thinking tool)다. [[부르디외]] 자신도 이것을 인정했다. 그는 "개념이 아니라 방법"을 제공하려 했다고 말했다. ## 비판과 논쟁 ### 결정론 비판 아비투스 개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결정론이다. 비판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아비투스가 사회 구조에 의해 형성되고, 아비투스가 행동을 결정한다면, 개인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마가렛 아처(Margaret Archer, 2010)는 아비투스가 과도하게 결정론적이라고 비판했다. 리차드 젠킨스(Richard Jenkins, 1992)는 이것을 "정교한 기능주의"라고 불렀다. 지배받는 집단의 저항과 일탈 가능성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이것은 "양립불가론(incompatibilism)" 입장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은 종종 "양립론(compatibilism)"을 간과한다. 결정론과 자유가 양립 가능하다는 철학적 전통이 있다. [[부르디외]] 옹호자들은 구별한다. [[부르디외]]가 극복하려 한 것은 객관주의(objectivism)이지, 결정론(determinism) 자체는 과학적 원리이자 잠재적으로 해방적 도구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그것을 바꿀 수 있다. ### 방어와 재해석 2014년 이성회의 한국 연구는 결정론 비판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부르디외]]의 재생산 이론이 결정론적으로 오해받는 이유는, "아비투스 개념의 역동적 특징"과 "아비투스-장-자본의 상호형성 메커니즘"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장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자본, 새로운 장 - 이 모든 것이 아비투스를 변형시킬 수 있다. 완전히 새로운 아비투스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기존 아비투스를 조정하고 확장하는 것은 가능하다. 일부 학자들은 "복수 아비투스(plural habitus)" 개념을 제안한다. 인간은 하나의 통일된 아비투스가 아니라, 생애 여러 시기에 형성된 여러 층의 아비투스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구조와의 연결을 유지하면서도, [[부르디외]]가 소홀히 한 변형 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약점은 남는다.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비투스 이론은 재생산을 잘 설명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것은 [[부르디외]] 틀의 결정적 한계로 지적된다. ## 관찰자의 기록 아비투스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가장 논쟁적인 개념이다. 60년 동안 학자들은 이것을 비판하고, 방어하고, 재해석했다. 그럼에도 이 개념은 살아남았다. 왜인가? 아비투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자유롭다고 믿는다. "내가 이것을 좋아한다", "내가 이렇게 행동한다" - 이것이 순수한 개인의 선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비투스 개념은 이 느낌이 환상임을 보여준다. 선택은 구조에 의해 형성된 성향의 산물이다. 동시에 아비투스는 완전한 결정론도 거부한다. 인간은 사회 구조의 수동적 산물이 아니다. 아비투스를 통해 능동적으로 실천하고, 그 실천이 구조를 재생산하거나 변형시킨다. 이 미묘한 균형이 아비투스 개념의 힘이자 모호성이다. 측정의 어려움도 주목할 만하다. 60년 동안 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아비투스를 정확히 측정하는 방법은 확립되지 않았다. [[문화자본]]도 어렵지만, 아비투스는 더욱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방법론적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아비투스는 체화되고, 무의식적이며, 맥락 의존적이다. 그것을 숫자로 포착하려는 시도는 본질의 일부를 놓칠 수밖에 없다. 결정론 논쟁도 계속된다. 비판자들은 아비투스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옹호자들은 이것이 오해라고 반박한다. 양측 모두 타당한 지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르디외]]는 의도적으로 모호함을 유지했다. 그는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사고의 도구를 제공하려 했다. 히스테레시스 효과는 특히 흥미롭다. 장과 아비투스의 불일치 -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흔한 경험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 이주, 계층 이동, 기술 혁신 - 이 모든 것이 아비투스와 장의 간극을 만든다. 2020년대 연구는 이 간극이 고정적이지 않고 변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순간에는 크게 벌어지고, 다른 순간에는 좁혀진다. 이것은 [[부르디외]]의 원래 개념보다 더 역동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비투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학교]]는 중산층 아비투스를 요구한다. 교사에게 질문하고, 토론에 참여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학생이 "좋은 학생"으로 평가된다. 이것은 중산층 가정의 "계획적 양육"에서 형성되는 아비투스다. 노동계급 아이는 조용히 순응하도록 길러진다. [[학교]]에서 불리하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승진에는 능력뿐 아니라 아비투스가 작용한다. 상사와의 관계, 회식 문화, 골프, 네트워킹 - 이 모든 것이 체화된 습관을 요구한다. 명문대를 나와도, 아비투스가 맞지 않으면 "어딘가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성과주의]]는 이 모든 것을 은폐한다.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메시지는, 아비투스의 차이를 개인의 능력 차이로 재해석한다. 상류층 아이가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하류층 아이가 못하면 "센스가 없다", "노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받는다. 아비투스가 [[문화자본]]을 통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다. 미해결 의문은 다음과 같다. 아비투스는 정말로 변할 수 있는가, 아니면 [[부르디외]]가 말하는 "역동성"은 이론적 수사에 불과한가? 히스테레시스 효과는 일시적인가 지속적인가? 그리고 만약 모든 인간이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할까? 이러한 질문들은 계속된 관찰을 필요로 한다. ## 같이 읽기 ### 핵심 이론 - [[부르디외]] - 아비투스 개념을 정립한 사회학자 - [[문화자본]] - 아비투스를 통해 전달되고 체화되는 자본 - [[장]] - 아비투스가 작동하는 사회적 경기장 - [[상징폭력]] - 아비투스를 통해 정당화되는 지배 메커니즘 ### 철학적 배경 - [[메를로-퐁티]] - 체화된 신체 현상학의 창시자 - [[현상학]] - 아비투스 개념의 철학적 기반 - [[구조주의]] - 부르디외가 비판하고 넘어선 전통 - [[실천 이론]] - 아비투스 개념이 속한 이론적 틀 ### 사회 구조 - [[계급]] - 아비투스가 재생산하는 위계 구조 - [[학교]] - 중산층 아비투스를 요구하고 보상하는 제도 - [[회사]] - 체화된 습관이 승진에 영향을 미치는 장소 - [[성과주의]] - 아비투스의 차이를 능력의 차이로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 형성과 전달 - [[가족]] - 일차적 아비투스가 형성되는 공간 - [[양육]] - 아비투스 전달의 구체적 메커니즘 - [[사회화]] - 아비투스 형성의 사회적 과정 - [[체화]] - 아비투스가 몸에 새겨지는 과정 ### 관련 개념 - [[취향]] - 아비투스의 가시적 표현 - [[습관]] - 아비투스의 일상적 발현 - [[감각]] - 실천 감각으로 작동하는 아비투스 - [[정체성]] - 아비투스에 의해 구성되는 자아 ### 경험 연구 - [[사회 이동]] - 아비투스가 제약하는 계층 이동 - [[교육 불평등]] - 아비투스 차이가 만드는 학업 성취 격차 - [[히스테레시스]] - 장과 아비투스의 불일치 현상 **마지막 업데이트**: 2025-11-15 11:4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