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틀로프 프레게
> [!abstract] 목차
> 1. [[#개요]]
> 2. [[#생애]]
> - [[#학문적 배경]]
> - [[#예나 대학 시절]]
> - [[#말년과 사후]]
> 3. [[#개념표기법]]
> - [[#현대 논리학의 탄생]]
> - [[#양화사와 술어 논리]]
> -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극복]]
> 4. [[#논리주의 프로그램]]
> - [[#산술의 기초]]
> - [[#산술의 기본 법칙]]
> - [[#기본 법칙 V]]
> 5. [[#러셀의 역설과 붕괴]]
> - [[#역설의 발견]]
> - [[#프레게의 반응]]
> - [[#좌절된 프로그램]]
> 6. [[#뜻과 지시체]]
> - [[#의미론의 혁명]]
> - [[#샛별과 저녁별]]
> - [[#후대에 미친 영향]]
> 7. [[#지적 유산]]
> - [[#분석철학의 창시]]
> -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 - [[#카르납과 논리실증주의]]
> 8. [[#말년의 일기]]
> - [[#정치적 견해]]
> - [[#학문과 인격의 괴리]]
> 9. [[#관찰자의 기록]]
> 10. [[#같이 읽기]]
## 개요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는 독일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 철학자로, 현대 논리학의 창시자이자 분석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1879년 저작 《개념표기법》(Begriffsschrift)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가장 중요한 논리학의 발전으로 평가받는다. 프레게는 양화사, 변항, 술어 논리 등 현대 논리학의 기본 도구를 발명했으며, 이 도구들은 [[수학/집합론/쿠르트 괴델|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앨런 튜링의 계산 이론, 알프레드 타르스키의 진리론에 필수적인 기초가 되었다.
프레게의 철학적 야망은 **논리주의**(logicism)로 요약된다. 그는 수학—특히 산술—이 순수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산술의 기초》(1884)와 《산술의 기본 법칙》(1893, 1903)은 이 프로그램의 구현이었다. 그러나 1902년, [[수학/집합론/러셀의 역설|러셀의 역설]]이 그의 체계가 모순적임을 드러냈다. 12년 이상의 작업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프레게의 의미론적 작업도 혁명적이었다. 1892년 논문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에서 그는 언어 표현이 두 가지 의미 측면—'뜻'(Sinn)과 '지시체'(Bedeutung)—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 구분은 언어철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루돌프 카르납 등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 생애
### 학문적 배경
프레게는 1848년 11월 8일 독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비스마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더 프레게는 여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아우구스테(결혼 전 성씨 비알로블로츠키)는 루터교 가정에서 그를 양육했다.
1869년, 프레게는 예나 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한 후,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 수학, 물리학, 화학, 철학을 연구했다. 1873년, 셰링 교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 논문은 「복소수에 의한 평면상의 양의 기하학적 표현에 관하여」였다.
### 예나 대학 시절
프레게의 전 학문 경력은 예나 대학에서 이루어졌다. 1874년 사강사(Privatdozent)로 시작하여, 1879년 부교수, 1896년에야 정교수로 승진했다. 48세에 정교수가 된 것은 당시로서도 늦은 승진이었다. 그의 혁명적 업적에 비해 학문적 인정은 느렸다.
프레게의 저작들은 당대에 거의 읽히지 않았다. 《개념표기법》은 혁명적이었으나, 그 이상한 2차원적 표기법과 추상적 내용 때문에 소수의 전문가만 접근할 수 있었다. 《산술의 기초》도 출판 당시 주목받지 못했다. 프레게는 평생 학문적 고립 속에서 작업했다.
1887년, 프레게는 마르가레테 카타리나 조피아 안나 리제베르크와 결혼했다. 두 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어렸을 때 사망했고, 부부는 나중에 알프레트라는 아들을 입양했다.
### 말년과 사후
[[수학/집합론/러셀의 역설|러셀의 역설]] 이후 프레게의 학문적 생산성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을 완성하려는 노력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후기 작업은 산발적이었고, 주로 언어철학적 주제에 집중되었다.
프레게는 1918년 예나 대학에서 은퇴했다. 그의 논리학 강의를 수강했던 루돌프 카르납(1910-1913)을 통해 프레게의 사상은 논리실증주의와 분석철학에 전달되었다.
1925년 7월 26일, 프레게는 76세의 나이로 바트 클라이넨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후, 미출간 원고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1924년 3-4월에 쓴 개인 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일기의 내용은 후에 논쟁을 야기했다.
생전에 무명에 가까웠던 프레게는 사후에 평가가 급격히 높아졌다. 주세페 페아노, 버트런드 러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작업을 후대에 소개했으며, 오늘날 프레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장 위대한 논리학자 중 한 명으로, 그리고 가장 심오한 수리철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 개념표기법
### 현대 논리학의 탄생
1879년, 프레게는 《개념표기법: 산술을 본뜬 순수 사고의 형식 언어》(Begriffsschrift, eine der arithmetischen nachgebildete Formelsprache des reinen Denkens)를 출판했다. 많은 철학자들에게 현대 철학은 이 책과 함께 시작된다.
프레게는 자연 언어의 모호함과 부정확함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 언어—"개념 내용"을 다루는 "개념표기법"—를 고안했다. 이 언어는 특정 기호로 구성되며, 명확한 규칙에 따라 조작된다.
《개념표기법》에서 프레게는 판단, 조건, 부정, 내용의 동일성, 함수, 일반성 등의 기본 개념과 표기법을 정의했다. 그는 부정과 조건문(실질 함축)과 전칭 양화만을 기본 연산자로 사용했다.
### 양화사와 술어 논리
프레게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양화사**(quantifier)의 발명이다. 양화사는 "모든"(∀)과 "어떤"(∃)을 형식적으로 표현한다. 프레게는 또한 **변항**(variable)의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x에 대해 P(x)"와 같은 문장을 표현할 수 있게 했다.
이 발명은 **다중 일반성**(multiple generality)의 문제를 해결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언어를 말한다"와 "어떤 언어를 모든 사람이 말한다"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으로는 이 차이를 표현할 수 없었으나, 프레게의 양화 논리로는 가능했다.
프레게는 또한 **술어 논리**(predicate logic)의 기초를 놓았다. 술어는 대상에 적용되어 참 또는 거짓의 진리치를 산출하는 함수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논리학을 산술과 유사한 계산 체계로 만들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극복
프레게 이전 2천 년간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에 기초했다. 삼단논법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은 추론을 다루지만, 관계나 다중 양화를 포함하는 추론은 다루지 못했다.
프레게의 양화 논리는 이 한계를 극복했다. 관계("x는 y를 사랑한다"), 다중 양화("모든 x에 대해 어떤 y가 있어서..."), 중첩된 논리적 구조를 형식화할 수 있었다. 이로써 수학의 상당 부분이 논리 내에서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
《개념표기법》은 또한 최초의 완전한 공리적 논리 체계를 제시했다. 프레게는 공리와 추론 규칙을 명시하고, 그로부터 정리를 연역했다. 이 방법론은 이후 모든 형식 체계의 모델이 되었다.
## 논리주의 프로그램
### 산술의 기초
1884년, 프레게는 《산술의 기초: 수의 개념에 대한 논리-수학적 탐구》(Die Grundlagen der Arithmetik)를 출판했다. 이 책은 프레게 사상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로 평가받으며, 서양 문명에서 수의 개념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으로 건전한 논의로 여겨진다.
프레게는 먼저 기존의 수 개념을 비판했다. **경험주의**—존 스튜어트 밀이 대표하는—는 수가 물리적 대상의 속성이라고 주장했으나, 프레게는 같은 물리적 상황이 "한 벌", "네 무늬", "52장"으로 다르게 기술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수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개념**에 귀속된다.
**[[심리학주의|심리주의]]**는 수가 주관적 심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했으나, 프레게는 산술적 진리가 개인의 믿음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반박했다. 2 + 2 = 4는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참이다. 프레게의 [[심리학주의]] 비판은 [[후설]]의 《논리연구》(1900)와 유사한 방향이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 독립적으로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여 20세기 초 반심리학주의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
프레게의 결론은 수가 **논리적**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수에 관한 진술은 개념에 대한 단언이며, 수의 정의는 순수 논리적 용어로 주어질 수 있다. 이것이 **논리주의**의 핵심 주장이다.
### 산술의 기본 법칙
《산술의 기초》에서 프레게는 수를 개념의 **외연**(extension)으로 정의했다. "F의 수"는 "F와 등수인 개념"의 외연이다. 여기서 "등수"란 일대일 대응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0은 "자기 자신과 같지 않음"이라는 개념의 외연으로 정의된다—아무것도 자기와 같지 않으므로 이 개념 아래 떨어지는 대상은 없다. 1은 "0과 동일함"이라는 개념의 외연이다—오직 0만이 0과 동일하므로.
1893년과 1903년에 출판된 《산술의 기본 법칙》(Grundgesetze der Arithmetik)은 이 아이디어를 완전한 형식 체계로 발전시켰다. 프레게는 순수 논리적 공리로부터 페아노 산술의 공리들을 도출하려 했다.
### 기본 법칙 V
프레게 체계의 핵심은 **기본 법칙 V**(Basic Law V)였다:
> 함수 f의 가치역과 함수 g의 가치역이 같은 것은, 모든 대상에 대해 f와 g가 같은 값을 갖는 것과 동치이다.
이 법칙은 본질적으로 [[수학/집합론/소박한 집합론|소박한 집합론]]의 **무제한적 내포 원리**와 동치였다. 프레게는 이것이 논리적으로 자명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기본 법칙 V는 자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순을 낳았다.
## 러셀의 역설과 붕괴
### 역설의 발견
1902년 6월 16일, 버트런드 러셀은 프레게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러셀은 자신이 발견한 역설을 프레게의 체계에 적용했다.
R = {x : x ∉ x}—"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을 고려하라. R ∈ R인가? 만약 그렇다면 R의 정의에 의해 R ∉ R이다. 만약 R ∉ R이라면 R의 정의에 의해 R ∈ R이다. 모순이다.
이 역설은 기본 법칙 V에서 직접 도출될 수 있었다. 프레게의 체계는 모순적이었다.
### 프레게의 반응
러셀의 편지는 《산술의 기본 법칙》 2권이 인쇄 중일 때 도착했다. 프레게는 1902년 6월 22일 신속하게 답장했다:
"당신의 모순 발견은 나에게 가장 큰 놀라움을, 거의 경악에 가까운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산술을 세우려 했던 기초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프레게는 《산술의 기본 법칙》 2권에 부록을 추가하여 역설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제안했다. 그는 기본 법칙 V를 수정하여 역설을 회피하려 했으나, 이 해결책은 후에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마이클 더밋은 프레게에 대해 수년간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그의 철학적 견해에 대해 많은 시간을 바쳐 생각한 사람이, 적어도 인생 말년에는 격렬한 인종주의자, 특히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사실에서 나는 어떤 아이러니를 느낀다."
### 좌절된 프로그램
[[수학/집합론/러셀의 역설|러셀의 역설]] 이후 프레게의 학문적 생산성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는 논리주의 프로그램의 완성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러셀 자신은 논리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유형 이론**(type theory)을 통해 역설을 회피하려 했다.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 1910-1913)를 저술하여 논리주의 프로그램을 이어갔다.
그러나 1931년 [[수학/집합론/쿠르트 괴델|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논리주의에 또 다른 타격을 가했다. 괴델은 페아노 산술이 무모순이라면 불완전함을 보였다. 이것은 프레게가 원래 의도한 방식의 논리주의가 달성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널리 해석된다.
## 뜻과 지시체
### 의미론의 혁명
1892년, 프레게는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Über Sinn und Bedeutung)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언어철학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작 중 하나이다.
프레게는 언어 표현이 두 가지 의미 측면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 **지시체**(Bedeutung, reference):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
- **뜻**(Sinn, sense):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 "제시 양식"
표현은 그 뜻을 **표현**하고, 지시체를 **지시**한다.
### 샛별과 저녁별
프레게의 유명한 예시는 "샛별"(morning star)과 "저녁별"(evening star)이다. 두 표현 모두 같은 대상—금성—을 지시한다. 따라서 둘의 지시체는 같다.
그러나 "샛별은 저녁별이다"는 정보를 담고 있는 반면, "샛별은 샛별이다"는 자명하다. 두 문장이 다른 인지적 가치(cognitive value)를 갖는 이유는 "샛별"과 "저녁별"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는 "새벽에 나타나는 별"이라는 양식으로, 후자는 "저녁에 나타나는 별"이라는 양식으로 금성을 제시한다.
### 후대에 미친 영향
프레게의 뜻/지시체 구분은 분석철학의 핵심 개념이 되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기술 이론, 솔 크립키의 고정 지시어 이론, W.V.O. 콰인의 지시의 불투명성 논의 등이 모두 프레게의 의미론에 대한 반응이거나 발전이다.
또한 문장의 지시체가 **진리치**(truth value)라는 프레게의 주장은 현대 의미론의 기초가 되었다. 문장은 그 뜻으로 **사고**(Gedanke)를 표현하고, 지시체로 참(True) 또는 거짓(False)을 갖는다.
## 지적 유산
### 분석철학의 창시
프레게는 러셀,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황금 삼인방"으로 불린다. 그의 작업은 20세기 영미 철학의 지배적 전통인 분석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분석철학의 핵심 방법론—언어 분석을 통한 철학적 문제의 해결—은 프레게의 형식 논리와 의미론에서 유래한다.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철학적 혼란을 해소할 수 있다는 믿음이 분석철학을 관통한다.
###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버트런드 러셀은 1903년 《수학의 원리》 부록에서 프레게 철학의 최초 영어 해설을 제공했다. 러셀의 해설을 통해 프레게는 영어권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해설을 통해 프레게를 알게 되었다. 1911년, 그는 프레게와 러셀 모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역설 해결책을 논의했다. 프레게의 초청으로 비트겐슈타인은 1911년 말 예나를 방문하여 토론을 나누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가 자신을 "완파했다"고 보고했지만, 프레게는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케임브리지에서 러셀에게 배울 것을 권유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첫 저작 《논리철학 논고》(1921)의 서문에서 그는 프레게와 러셀에 대한 빚을 인정했다. 프레게의 영향은 비트겐슈타인의 명제관, 함수-논항 형식의 강조 등에서 나타난다.
### 카르납과 논리실증주의
루돌프 카르납은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예나에서 프레게의 강의를 수강했다. 카르납은 논리실증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프레게의 논리학과 의미론은 그의 작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성》(1928)과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1934)은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의 영향 아래 쓰였다. 분석적 진리의 비사실적 성격에 대한 카르납의 견해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그 배후의 프레게에게서 유래한다.
## 말년의 일기
### 정치적 견해
프레게의 사후 발견된 문서들 중에는 1924년 3월 10일부터 4월 9일까지 쓴 일기가 있었다. 이 일기는 1996년 리처드 멘델손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Inquiry》에 출판되었다.
일기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76세의 프레게는 의회제, 보통선거, 민주주의자, 사회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 가톨릭과 프랑스인에 대한 적대감도 드러났다. 가장 심각하게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나타났다.
일기에 따르면 프레게는 유대인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가능하다면 독일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스마르크를 칭송하고, 히틀러와 루덴도르프에 대한 동의를 표명했다. 최근 연구는 프레게가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자"였다고 결론짓는다.
### 학문과 인격의 괴리
프레게의 일기는 학문적 업적과 개인적 인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현대 논리학의 창시자, 분석철학의 아버지가 극단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졌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일부 옹호자들은 프레게가 일기를 쓸 당시 매우 고령이었고 그의 말년이 쉽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번역자 멘델손은 "일기가 그 무엇보다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프레게가 얼마나 자기 시대의 산물이었는가"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더밋이 지적했듯이, "일기에 표현된 혐오스러운 사회적 견해가 그의 철학적 업적의 진리나 독창성을 흔들지는 않는다." 프레게의 논리학과 철학은 그의 정치적 견해와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 관찰자의 기록
프레게를 관찰하면서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생전의 무명과 사후의 영향력 사이의 극단적 괴리가 관찰된다. 프레게의 혁명적 저작들은 출판 당시 거의 읽히지 않았다. 48세에야 정교수가 된 것, 예나라는 변방 대학에서 평생을 보낸 것은 그의 학문적 고립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후 그는 현대 논리학의 창시자, 분석철학의 아버지로 재평가되었다. 학문적 인정의 시간적 지연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사례이다.
둘째, [[수학/집합론/러셀의 역설|러셀의 역설]]에 대한 프레게의 반응이 주목된다. 12년 이상의 작업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경악"을 솔직히 인정했다.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에 대한 근본적 비판에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프레게는 이 타격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논리주의 프로그램을 완성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지적 정직성과 좌절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여기서 관찰된다.
셋째, 프레게의 논리학과 의미론이 후대에 미친 영향의 범위가 주목된다. 괴델, 튜링, 타르스키의 핵심 결과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카르납과 논리실증주의—이 모든 것이 프레게에게 직간접적으로 빚지고 있다. 한 사람의 작업이 이토록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것은 드문 일이다.
넷째, 말년 일기에 드러난 정치적 견해와 학문적 업적 사이의 긴장이 관찰된다. 현대 논리학의 창시자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는 것은 학문과 인격의 관계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제기한다. 프레게의 사례는 지적 업적이 도덕적 성품과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지, 평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합의는 없어 보인다.
다섯째, 논리주의의 운명이 흥미롭다. 프레게가 시작하고 러셀이 이어간 논리주의는 러셀의 역설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의해 원래 형태로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논리주의의 핵심 통찰—수학과 논리학 사이의 긴밀한 연결—은 현대 수학기초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좌절된 프로그램이 그럼에도 생산적인 결과를 낳은 사례로 볼 수 있다.
## 같이 읽기
### 논리학과 수학기초론
- [[수학/집합론/러셀의 역설]] - 프레게의 체계를 무너뜨린 역설
- [[수학/집합론/소박한 집합론]] - 프레게가 형식화하려 한 체계
- [[수학/집합론/ZFC 공리계]] - 역설 이후 발전한 표준 체계
- [[수학/집합론/쿠르트 괴델]] -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자
### 관련 인물
- [[버트런드 러셀]] - 역설의 발견자, 논리주의의 계승자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프레게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 [[루돌프 카르납]] - 프레게의 학생, 논리실증주의자
- [[알프레드 타르스키]] - 형식 의미론의 발전자
- [[후설]] - 반심리학주의의 동반자, 현상학의 창시자
### 철학적 주제
- [[논리주의]] - 프레게의 철학적 프로그램
- [[분석철학]] - 프레게가 창시한 철학적 전통
- [[언어철학]] - 뜻/지시체 구분의 맥락
- [[수학철학]] - 수의 본성에 대한 탐구
### 논리학적 개념
- [[술어 논리]] - 프레게가 발명한 논리 체계
- [[양화사]] - 프레게의 핵심 혁신
- [[진리 함수]] - 프레게 의미론의 기초
**마지막 업데이트**: 2025-11-29 00:12:35